사라지는 빙하들 -『시간과 물에 대하여』를 읽고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 아주 오랫동안 살고 있는 빙하, 그 빙하가 사라지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몇 세기 안에 아이슬란드는 그 이름과는 상관없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한반도와는 멀고도 먼 곳이다. 한국인들의 관광도 몇 년 전 예능 여행 프로그램에서 소개되기 전까지는 많지 않았을 것 같다. 나에게도 생소한 곳이다.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축구 선수, 바이킹의 후손들일 것이라는 어렴풋한 짐작. 그 정도가 아이슬란드에 관한 나의 마인드 맵이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의 저자는 작가이자 환경 운동가인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이다. 이름부터 낯설다. 책에 등장한 아이슬란드인들의 이름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끊어서 읽게 된다. 휠다 필리퓌스도티르, 아우르드니 캬르탄손, 존 소르비아르드나르손. 책에 언급되는 아이슬란드인들의 이름이다. 저자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 지명은 또 어떠한가. 도시, 산맥, 빙하까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간 후에도 이들의 인명과 지명은 낯설다. 아이슬란드어를 배워 단어들의 뜻을 익히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평생 내게 낯설 것이다.

언어뿐이겠는가. 아이슬란드. 세계에서 의회가 가장 먼저 생긴 나라. 나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역사는 무려 1100년이나 됐단다. 한국은 어떤가. 독재였다가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 100년이 뭔가. 반세기도 안됐다. 아이슬란드 역사를 찾다 보니 어쩜 이리 한국과 반대인 게 많은가. 나라 역사상 징병제를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들은 어쩜 그리도 군역이니 뭐니 해서 서민들 등골 휘게 했었는데 말이다.

저자의 경험과 가족의 이야기가 이 책을 채운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 그들의 과거 이야기는 이 글에서 시간을 담당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빙하를 연구하는 팀에 합류해 빙하 위를 누비고 다니며 깊이도 모르는 크레바스 옆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한다. 그리고 그들의 기록은 영상으로도 남아있다. 저자는 그의 조부모가 찍힌 영상에서 눈과 빙하를 본다. 지금은 남아있을지 모르는 빙하를.

빙하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저(노승영 역) 「시간과 물에 대하여」 (북하우스, 2019)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저(노승영 역) 「시간과 물에 대하여」 (북하우스, 2019)

빙하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난 없다. 강 위에 큰 얼음들이 떠다니는 것을 본 것이 그것과 유사한 경험이라고나 해야 할까. 북극권에 근접한 나라이거나 북극권 안에 영토를 보유한 나라를 여행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 나라를 여행할 때 난 단 한 번도 빙하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기 공룡 둘리는 빙하를 타고 한반도까지 여행을 했다. 둘리의 나이는 우리가 인간의 생애에서 경험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둘리가 얼어 있던 빙하도 둘리만큼은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아온 빙하가 녹고 있다. 둘리처럼 빙하도 곧 멸종되지는 않을까.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 그런데 그 변화를 한 개인이 딱 잘라서 확정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경험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친구들한테 최근 몇 년간 많이 지구가 더워졌냐고 기후가 바뀌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물론 요즘 아이들은 거의 모두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므로 궁금한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년 여름 그 전년도, 10년 전, 20년 전을 물어보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마찬가지 질문을 20대, 30~40대, 70~80대 사람들에게 모두 물어본다면 답변이 궁금하지 않은가.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이런 질문에 대한 간접 답변이지 않을까. 물론 이 책에도 과학적 데이터를 인용하며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만으로 되어있지 않다. 외우기는커녕 발음하기조차 힘든 저자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지구가 변해온 과정을 그들의 경험에서 말해준다. 경험 수준 말이다.

415ppm

“와트가 증기기관에 처음 시동을 걸었을 때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280ppm이었다. 이제 그 수치는 300만 년을 통틀어 최고치인 415ppm에 이르렀다.”(p.220) 공기 중 이산화탄소가 높아지면 바다도 문제가 많이 생긴다. 바다는 그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면 바닷물은 산성화된다. 그러면 플랑크톤의 한살이가 교란돼 먹이사슬의 최하층이 붕괴한다. 그리고 순서대로 먹이사슬은 붕괴한다. 온난화도 그렇고 산성화도 그렇고,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이며 기술적 서술은 이 책이 아니더라도 충분하며 넘쳐난다.

나는 이 책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를 다룬 글에서 근거로 제시하는 과학적 연구와 수치에 대해 민감성이 풍부한 편이 아니다. 과학적 사실에 충분히 접근하기에 아는 것이 너무 적다. 때문에 환경 문제와 관련된 글과 다큐멘터리에서 숫자로 나온 것들은 대충 나의 귀와 머리를 지나간다. 평범한 독자들은 반복해서 저 수치를 외우거나 과학적 실험과 관찰, 결과를 머릿속에 넣고 다니지 않는다. 아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과학적 데이터가 주는 신뢰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기후위기에 대한 증거들은 그들의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킬 강력한 촉매제다. 하지만 나 같은 과학적 것들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415ppm.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이산화탄소 농도. 음 그래. 낮춰야지. 아 잠깐. 저녁거리가 없네. 마트 좀 다녀올게.” 우리는 그렇게 자동차 시동을 건다. 지금의 팬데믹을 탈출하면, 다시 공항에서 즐거운 여행을 할 상상을 한다. 하늘에 기름을 뿌리며.

슬픈 경험

저자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빙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그 무엇이었다. 그들의 조상에게도 그랬으며, 그 조상의 조상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인간에게 이런 존재들은 신화와 전설에 대상이었다. 너무 높아서, 너무 추워서 접근하기도 힘든 아주 커다랗고, 너무 커다래서 우리의 시야를 넘어버리는 것들. 혹자들은 그런 것들은 경외의 대상이라고도 한다. 그들에게 빙하는 그런 존재이었으리라. 그랬던 것들이 인간의 생애주기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사라짐을 경험하는 것.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누구에겐 늘 있었던 존재이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 태어난 이들에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존재가 사라지고 있는 순간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렇다. 그들의 신혼 때를 담았던 영상과 사진 속의 주인공은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하지만 저자에게 그 영상과 사진 속에 담긴 주인공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사라진 빙하다.

저자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친근하고 경외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 빙하가 더 빨리 급속히 사라지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아닌 노년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들은 세상이 변하는 것을 정말 많이 경험해 왔다. 자연의 순환과 패턴은 그들에게 삶의 규칙이었다. 그전에 살던 조상들에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반복과 패턴이 깨지고 있다. 오늘날의 노년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지구가 변하는 것, 익숙한 존재의 사라짐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는 그 변화와 사라짐에 대한 슬픈 기록이 쓰여 있다.

때때로 건조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보다 슬픈 경험이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 될 때가 있다. 공감은 연대의 시작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들의 슬픈 경험을 공감해 보지 않으련가.

김영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만 하다가 2, 30대가 지나가 버린 아저씨. 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옆에 있는 경기도에 사는 지구인. 행복을 찾아 아직도 고민 중인 호기심 많은 호모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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