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설화
문예학에는 ‘백두산 설화’를 연구한다. 백두산과 관련된 설화 혹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세계에 연결된 사람들이 공유하였던 이야기다. 현재의 남한 사람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세계 속에 있을까? 왠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남한 사람에게 백두산 이야기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사실 남한 역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세계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국가인 〈애국가〉의 ‘동해물과 백두산’만 보아도 그렇다.

사진출처: sherisetj
남한에서는 흔하지 않은 <창세가> 등 함경북도 무가(巫歌)가 일찍이 20세기 초부터 채록되고 20세기 내내 꾸준히 연구된 것에 비하여, ‘백두산 설화’ 같은 이야기들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야 남한 사회에 유포되었다. 그런 이야기의 대표 격으로 ‘하늘못 백장군(천지수)’이라는 이야기가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에 실려 있다.1 이는 연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재중교포 학자들이 현장 조사를 통하여 채록한 이야기들을 정리, 요약한 것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좀 더 압축할 수 있다.
“백두산에 흑룡(黑龍)이 나타나 물 골들을 지져 버리니. 식물들이 시들고 동물들과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다. 백두산 사람들이 백씨 성을 가진 힘센 총각을 장군으로 삼고서 흑룡의 조화에 맞서 물길을 찾기 시작하자 흑룡은 이를 번번이 방해하였고, 사람들이 낙망해서 떠나갔지만 백장군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백두산 마을을 다스리는 봉왕의 외동딸 공주가 청석봉 옥장천의 물을 석달 열흘간 마시고 천하무적이 될 것을 백장군에게 권하였다. 공주의 권고를 따라 힘이 세진 백장군은 흑룡의 불칼에 가슴을 찔리고, 공주의 보살핌을 받아 회생하고, 공주와 함께 다시 땅을 파고 물줄기를 찾아 백두산 상상봉의 거대한 구덩이를 물로 가득 채웠다. 하늘못 천지(天地)의 탄생이었다. 다시 흑룡이 나타났다. 백장군과 싸우던 흑룡은 천지를 향해 불칼을 내리찍었고 백장군이 이를 받아치자 불칼은 끊어져 날아가 백두산 북쪽 벼랑 바위에 부딪쳤다. 그 힘으로 벼랑 한쪽이 쪼개지면서 물길이 났으니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나가게 된 시초였다. 불칼을 잃은 흑룡은 어디론가 달아나 숨어 버렸다. 백장군과 공주는 부부가 되어 천지 맑은 물속에 수정궁을 짓고 함께 살면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흑룡으로부터 천지를 지키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백두산을 이루는 여러 장소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한다. 이야기 속에서 흑룡·백장군은 언젠가 오래전에 실재하면서 강렬하게 대립하였던 두 세력의 강력한 우두머리의 대유(代喩) 같이도 보인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세계에서 두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이 활성화되거나 누군가가 그런 갈등을 활성화하고자 할 때, 이 이야기가 소환(召喚)되었으리라는 상상도 해볼 만하다.
대자연에 얽힌 대륙적 상상력
신동흔은 이 이야기를 “영웅적 투쟁과 사랑”2이 담겨 있는, “신화의 자취를 짙게 가지고 있는 민담”3이라고 보았다. 얼핏 보면 지나치게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평가 같기도 하다. 그냥 평범한 설화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의 논리를 한번 따라가 보자. 신동흔은 이 이야기를 논하면서 먼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인공이 신(神)이 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들을 받드는 제의가 확인되지 않지만 …… 백두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사람들에게 그들은 신 이상의 신이었을 터이다.”4
달리 말하자면 그들을 자기 몸의 주인으로 모시는 무당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속의 그들은 신적인 존재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신동흔은 이런 신적인 존재들이 보여주는 “물길을 지져버리는 흑룡의 불칼, 그에 맞서 인간이 파낸 거대한 연못, 흑구름과 백구름이 맞부딪치는 한판 승부, 쓰러진 영웅을 되살려내는 여인의 가없는 눈물”5 등등이 “대자연에 얽힌 놀라운 상상력”6이며, “대륙적 상상력”7이라고 하였다. 다소 과장하는 감은 있으나, ‘흑룡’을 자연의 의인화로 본다면, 그리고 기존의 한국 신화들이 한반도라는 세계에 국한된 이야기였던 것에 비교한다면, 백두산 북쪽까지 무대가 확장된 이야기의 동력이 대자연에 얽힌 대륙적 상상력이라는 규정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신동흔은 이 이야기가 대자연에 얽힌 상상력의 소산임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인간이 맞서 싸우는 흑룡이란 어떤 존재일까. …… 그것은 무엇보다 화산의 폭발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르는 검은 불꽃 …… 백두산은 본래 화산(火山)이 아니던가(이 놀라운 해석은 서대석 선생의 몫이다. 서대석, 〈백두산과 민족신화〉, 《백두산설화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1992).”8
신동흔은 서대석의 연구를 인용하여, 흑룡이 실제로 발생하였던 백두산의 폭발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가 후대에 전하여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존재일 수 있음을 논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화산 폭발이라는 대자연의 현상에 얽힌 상상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동흔은 이 이야기가 대륙적 상상력의 소산임을 뒷받침하는 방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실제로 이 신화는 한민족의 경계를 넘어 동아시아를 향해 열려 있다. 백두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또 다른 민족인 만주족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신화가 전해져왔다. 완달(完達)이라는 영웅과 여진(女眞)이라는 여인이 악룡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 천지가 생겨났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백두산이 한겨레의 영산을 넘어서 동아시아의 영산임에 백두산 신화 또한 이렇게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는 터다. 우리 민간신화가 지니는 세계적 보편성의 한 단면이다.”9
이 이야기에서, ‘세계적 보편성의 한 단면’을 엿보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한민족과 만주족이 신화소를 공유하고 있음은 감지할 수 있을 듯하다.
신화에 대한 상상을 제약하는 관성적 사고

백두산 설화가 대자연에 얽힌 대륙적 상상력의 소산일 수 있음은 백두산에 대한 초보적인 지리학적으로 고찰만으로도 뒷받침할 수 있을 듯했다. 산에 관한 고찰이니만치 우선 높이만을 가지고 보니, 해발 8,848m로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인 사가르마타/초모랑마[에베레스트산]10에 비하여, 해발 2,744m인 백두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시와 산문에서 산의 기준처럼 일컬어졌던 태산11과 백두산을 비교하려다보니, 중국의 이른바 본토의 이른바 5대 명산인 오악(五岳)의 높이가 다음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쪽: 동악 태산(東嶽泰山, 산둥성, 1,545m)
서쪽: 서악 화산(西嶽華山, 산시성 (섬서성), 1,997m)
남쪽: 남악 형산(南嶽衡山, 후난성, 1,290m)
북쪽: 북악 항산(北嶽恒山, 산시성 (산서성), 2,017m)
중앙: 중악 숭산(中嶽嵩山, 허난성, 1,494m)12
이들은 모두 해발 2,744m인 백두산보다 높이가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두산 남쪽으로 이어지는 해발 700~2,000m인 개마고원(蓋馬高原)과 비교하여 보아도 오악은 규모 면에서 ‘큰 산’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남쪽으로 개마고원과 한 덩어리를 이루는 백두산은 남서쪽으로 열려있는 350,000㎢의 동북평원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동쪽에 서 있는 세 개의 산맥과 마주보고있다. 다싱안링 산맥·샤오싱안링 산맥·시호테알린 산맥이 이 산맥들인데, 지도상으로 보면 이 산맥들이 백두산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백두산 북서쪽 동북평원 너머에 서 있는 다싱안링(大興安嶺)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2,035m이다.13 백두산 북동쪽에 있으면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샤오싱안링(小興安嶺)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1,429m 평정산(平頂山)이다.14 샤오싱안링 산맥 북동쪽,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에 동쪽의 바다와 나란히 남북으로 놓여 한-러 접경지역까지 뻗어있는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1,933m 아닉산이다.15 이렇게 보면 백두산은, 두만강와 압록강 사이에 끼어있는 산이며, 한반도의 백두대간의 최북단에 있는 산이며, 만주벌판의 남쪽 변방에 있는 산이며, 다싱안링산맥·샤오싱안링산맥·시호테알린산맥을 북쪽과 동쪽의 경계로 하는 동북평원과 요하 유역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세계의 중심에 자리한 가장 높은 ‘큰 산’이다.
한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국의 신화 속에서보다는 만주족의 문화 속에 더 또렷이 나타나 있다고도 한다. 만주족 기원신화의 중심지가 백두산이다.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써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부르는 이름 ‘장백산(長白山)’은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의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을 의역한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요·금 시기부터 쓴 것이라고 한다.16 요는 거란이 요하 유역에서 세운 왕조고, 금은 여진이 만주 동부와 연해주에서 세운 왕조로, 모두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와 무관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굳이 한국이나 만주족 등 여러 정치체들의 신화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동북평원과 요하 유역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세계의 중심에 자리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지정학적 특성만 보더라도, 백두산에는 신화가 서려 있을 법하다. 오히려 동북아시아 여러 정치체들 사이의 오래된 정치적 역학관계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의 냉전과 남북 분단이 백두산신화를 재구성하고 그것을 실마리로 신화적 상상을 펼지는 것을 제약한 것 같다.
〈하늘못 백장군(천지수)〉를 통한 백두산설화 읽기는, 상상을 제약하는 관성적 사고를 다시금 뒤집어 보게 하였다. 20세기 후반 이후의 냉전과 남북 분단이, 적어도 나에게는, 세계와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도록 작용하였다. 처음 백두산 설화를 접하였을 때, 나는 백두산을 한반도 안에 놓고 생각하는 관성적 사고에 갇혀있었다. 그와 같은 사고 관성은 분단과 냉전 양자와 무관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세계 지리에 좀 더 일찍 관심을 가지고 백두산과 만주의 산들의 높이라는 단순한 정보들을 비교하여 볼 기회를 가졌다면, 처음 백두산 설화를 접하는 태도가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산 높이라는 단순한 정보가 사고 관성에 사로잡혀있지 않고 문화를 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에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에서도 빚어질 것이며, 정치의 연장인 전쟁에서도 빚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세상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운동이나 대안의 추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념과 가치는 행동의 대체적인 방향을 정하여 줄 것이기에 소중하다. 이에 더하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산 높이와 같은 단순한 정보가 행동의 방향에 미세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영향에 따라 벌어지는 미세한 차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큰 차이의 결정적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늘못 백장군(천지수)’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이 요약과 같은 요약이 다음 자료에도 들어있다;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5~170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4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4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9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9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9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9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69쪽. ↩
신동흔, 〈백두의 영웅들〉,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주), 2004, 170쪽. ↩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조지 에버리스트 경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사가르마타[산스크리트어: सगरमाथा] 초모랑마[티베트어: [t͡ɕʰo˩˧.mo˥˥ laŋ˥˥.ma˥˥]] 주무랑마봉[중국어: 珠穆朗瑪峰] 에베레스트산[영어:mount Everest] 위키백과 ‘에베레스트’ 참조. ↩
중국어: 泰山, 병음: Tài Shān, 표준어: 타이산산. 위키백과 ‘태산’ 참조. ↩
위키백과 ‘오악’ 참조. ↩
위키백과 ‘다싱안링산맥’ 참조. ↩
위키백과 ‘샤오싱안링산맥’ 참조. ↩
위키백과 ‘시호테알린산맥’ 참조. ↩
위키백과 ‘백두산’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