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적 활동으로 자본의 세계 관리를 가로지르려 하는 개체의 애환 –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1장 「정동의 자율」 독후기

무상(無常).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기원전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한다. 변화가 가속화하는 세계에서 이 말은 새삼 주목받을 수 있다. 긴장[서스펜스]이란 무엇일까? 건강에 나쁜 걸까? 그럴 런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하다. 그러나 번득이는 욕망들, 무수한 광고판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이 긴장을 놓을 때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Y2K가 과잉대표한 세기말로 돌아가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가상계』는 2002년에 출판된 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 그것의 출판년도를 확인한 사람 중에는 이 책에 마수미가 겪은 20세기의 세기말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Y2K에 의하여 과잉대표된 20세기의 세기말은 19세기의 세기말보다 심심한 시기였을까? 『가상계』 1장 「정동의 자율」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수미가 제시하는 논리를 따라가는 노력뿐만 아니라, 수시로 그가 겪은 20세기의 세기말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 수용에 있어서 정동이 가장 우선한다

브라이언 마수미 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갈무리, 2011)
브라이언 마수미 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갈무리, 2011)

20세기 말,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영미권의 사상가 브라이언 마수미는 “이미지 수용에 있어서 정동이 가장 우선한다(theprimacy of the affective)”[48쪽]고 주장하였다. 그는 헤르타 슈튀룸(Hertha Sturm)의 이미지 수용 관련 연구를 예로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마수미는 질/내용과 강렬도/효과를 대비시키면서, 이미지에는 다양한 강렬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강렬도의 수준은 배중률(the excluded middle)을 인정하지 않는 논리에 따라 조직된다”[48쪽]고 한다. 이미지를 확정된 하나의 질로 설명한다는 것 즉 ‘중간지대’들을 전부 배제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인식 주체들이 이미지를 접하고 ‘느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서로 다른 강렬도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치부하는 것이라고 마수미는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인식 주체라는 말은, 수많은 변수들이 끼어드는 가운데 불확정적인 이미지와 긴장관계[suspense]를 이루고 있는, 생로병사의 과정 중에 있는 생물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듯하다.

마수미는 언어와 구조가 세계 즉 사건(event)들을 고착된 질/내용을 가진 것으로 만들어왔음을 경계하는 듯하다. 언어나 구조는, 나름의 기준에 입각하여 계속 변화하는 세계에서 부차적인 부분을 깎아내고, 나름의 틀을 들이대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다듬어주므로, 유용한 기준과 틀을 제공하지만 [52쪽 참조], “사건 속에서는 그 무엇도 예측되지 않는다” [52쪽] 는 것이 마수미의 생각인 듯하다. 마수미는 자기의 발상이 “우리의 정보-기반 및 이미지-기반 후기 자본주의 문화(소위 지배 내러티브가 무너져버린 것으로 파악되는)” [53쪽] 속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였다. 예측을 통하여 불안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여 왔던 과학이,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여 왔다는 것을 마수미가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인지는 정신 안에서가 아니라 육체 안에서 발견된다

나아가 마수미는 치료를 목적으로 대뇌피질에 전극을 삽입한 환자들에게 행한 실험을 예로 든다. 이 실험에서 전기 파동이 주는 자극은 0.5초 이상 지속되어야만 느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감각이 “시간상 소급된 전송”(backward referral in time)을 수반한다고 추측하였다고 한다. [55쪽] 자극이 주어지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내부’에 전달되는 것 같은데 정작 피부는 그 자극을 0.5초가 지난 후에 느끼는 현상을 발견한 것 같다. 또 다른 실험은, 육체적 사건이 시작된 후 0.5초가 지난 후에야 외부로 정향된 능동적 표현이 완성되었음을 보고하였다고 한다. “0.5초 동안, 우리가 “자유”라고 믿고 있는 것, 즉 의지(volition) 같은 “보다 상위의”(higher) 기능들이, …… 두뇌와 손가락 사이에서 그러나 행위와 표현보다는 먼저 일어나는 자율적·육체적 반응들에 의해서 뚜렷하게 수행된다는 것이다.” [57쪽]

몸은 피부라는 자루에 담겨 있는데, 이 자루는 아무것도 안 새는 밀봉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드나드는 막이다. 이 자루 안에서는 대사 현상이 끊이지 않으며 염증이 일어난다. 이러한 몸을 마수미는 가상계로 설명한다. “무엇인가가 너무 빨리 일어나서, 실제로, 나타날 수 없다면, 그것은 가상적이다. 육체는 실제적인 것만큼이나 곧 가상적이다. 가상적인 것은, 초기발생과 경향성이 밀려드는 무리로서, 잠재의 왕국이다. …… 가상계는 살아 있는 역설로, 그곳에서는 대립하는 것이 공존하고, 연합하고, 연결된다.” [59쪽] 무상(無常) 즉 일정한 실체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몸과 가상계는 같다. 그렇다고 그것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면에서도 몸과 가상계는 같다. 마수미는 베르그송의 저술을 인용하여 몸=가상계 발상을 정당화한다. “머잖아 모든 것이 돌아가게 될 바다 위의 파도처럼 반-현실화된 행위와 표현이 솟아오르는, 발생이라고 하는 식역 한계(liminal)의 왕국에 이르는 잠재성” [60쪽] 이 인용문 속의 식역(識閾) 혹은 식역 한계는 문자 그대로 읽으면 ‘문지방’이다. 이는 두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DMZ처럼 경비가 삼엄한 경계선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수미는 스피노자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육체” [60쪽]를 “정념의 긴장상태(passional suspention)” [60쪽]에 있는 존재로 묘사하였다고 보았다. 그 긴장상태 안에서 “육체는 그 자신 내부보다는 자신의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사물의 추상적 작용 속에 그리고 그 작용의 추상적 맥락 속에 존재” [60쪽]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라고 해설한다.

마수미는 정동에 관한 스피노자의 기본적인 정의의 하나를 소개한다. : “육체의 정감(다시 말해 육체에 미치는 영향), 또한 동시에 정감의 관념(강조는 지은이)” [60쪽] 이 정감의 관념이 의식의 반영은 아니라고 마수미는 설명한다. 정감의 관념이 “정감의 관념에 대한 관념에 의해 중첩될 때” [60쪽]만 정감의 관념은 의식의 수준을 획득하게 된다고 마수미는 설명한다. 이때의 ‘중첩’의 영향을 받으면서 “육체는 그 영향을 주는 사물은 빼고 그 영향을 보존한다. 즉 그 영향을 일으키는 실제적 행위와 그 행위의 실제적 맥락으로부터 추상된 영향 그 자체를 보존한다.” [61쪽] 고 마수미는 설명한다. 중첩과 추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마수미는 이 설명에서 중첩과 아울러 맥락의 포개짐 혹은 수축, 자동반복과 변주 등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는 세계가 일체적 일회적 일면적이지 않고 사건들이 반복 중첩되면서 전개되어 나간다는 생각을 부연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추상은 ‘사물을 빼기’일 것이다. 사물을 빼고 남은 영향 속에서 이미지가 큰 비중을 차지할 듯하다. 그것이 항구적이든 변동하는 것이든, 빼고 남기는 데에는 기준도 필요할 것이다. 마수미는 “역동적 추상이 특이한 수준으로 연결되는 질서” [61쪽]를 정신이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마수미는 “육체로부터 간접으로 수용된 자율적 경향성” [61쪽]이 보다 상위의 힘으로 길러지면 “정신의 활동” [61쪽]이 된다고 한다. 마수미는 헤르타 슈튀룸(Hertha Sturm)의 이미지 수용 관련 연구가 정신의 차원에서 인식을 생각하였기에 한계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치료를 목적으로 대뇌피질 전극을 삽입한 환자들에게 행한 실험을 대비시켜, 육체의 차원으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인식을 생각하여 볼 것을 권하였다. 마수미는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이미지/표현 사건을 서로 다르게 그러나 평행하게 되풀이하고, 구체적인 것에서 비물형적인 것으로 점차 상향하고, 마찬가지로 이제 유령의 –그리고 잠재화된(potentialized) – 접촉 같은 부재하는 중심을 고수하는 두 개의 수준” [61쪽] 정신과 육체는 사건을 되풀이한다, 구체적인 것에서 비물형적인 것으로 전개하는 것은 향상이다. 정신과 육체는 잠재화된 접촉 같은 중심을 고수하는 두 개의 수준인데 그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수미는 말한 셈이다. 마수미의 글에는 정신-육체를 이원론적으로 조망하는 관습을 경계하고 인식을 몸 담론으로 가져가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할 수 있겠다.

수행성(遂行性 performativity)을 바탕으로 하는 되기[becoming]의 윤리학

이어서 마수미는 자신의 이미지 인식 논의를 스피노자 윤리학에 잇댄다. 마수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정동으로부터 나온, 정신과 육체의 서로 평행하는 생성-능동(becoming-active)의 철학” [61쪽]으로 설명한다. 여기에서 되기[becoming]는 이기[being]와 대비될 때 의미가 더 명료하여질 듯하다. 마수미는 스피노자의 정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념 안에 있는, 영향 안에 있는, 능동성과 수동성의 구별에 앞서는, 세 번째 상태, 배제된 중간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 순수하고 생산적인 수용성 안에 있는 하나의 기원.” [61쪽] 여기에서 눈이 뜨이는 것은 ‘배제된 중간으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배중률을 논리로 채택하지 않고, 오히려 배중률이 배제한 중간지대가 정동 생성의 장이라고 한 셈이다. 마수미는 이 “기원” 즉 정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면서도 지각을 두 배로 증폭시킨다고 설명한다. 마수미는 과거 이원적 대립이나 모순으로 규정되던 것을 더이상 그렇게 볼 이유가 없으며 그것은 공명하는 수준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수미는 스피노자 윤리학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발화(發話)하는데, 마수미가 이해한 스피노자 윤리학은 ‘배제된 중간으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인 세계상 속에서의 윤리학인 것 같다. 그 속에서 어떤 존재는 이기[being]가 아닌 되기[becoming]의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마수미는 생각하는 것 같다. 마수미는 그런 세계상 속에서 그런 존재들 가운데 일부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가운데에 머무르지도 않는 태도 [이변비중(離邊非中)]를 유지할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그런 존재에 대한 선망(羨望)을 드러낸 듯하다.

마수미가 지적인 성장기에 겪었던 20세기 말, 레이건과 대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런 세계에서 마수미는 데리다, 들뢰즈, 베르그송 그리고 스피노자(1632~1677)를 기원으로 하는 세계관과 윤리학을 선택한 듯하다. 그것은 규범을 중심으로 한 윤리학이 아니라 태도를 중심으로 한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마수미는 보통 사람들의 내면에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의 규범들이 철저하게 의식화되어있음에 주목하였던 것 같다. 마수미는 이미지가 의식화의 도구라는 점에도 주목하였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존재론의 차원에서 세계가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론은 이미 데카르트(1596~1650)의 단계에서 무너졌지만 19세기 말에 이미 조밀하여지고 있었던 자본주의의 세계 관리는 철학자들이 17세기에 폐기한 세계관을 관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수미의 사상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세계 관리 도구에 맞서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마수미는, 스피노자에게로 돌아가서, 20세기의 자본주의가 세계 관리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세계관이 17세기에 폐기되는 모습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윤리학의 단서를 찾아내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가 17세기에 폐기된 세계관만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세계 관리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미지도 그렇다. 이미지 조작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사회의 핵심이라 할만하다. 소박실재론에 가까운 자본주의의 세계관이 ‘도구적 이성’에 의하여 옹호되고 유지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지 조작은 ‘도구적 감성’을 부추김으로써 보통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을 자본주의 안에 붙들어 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행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한 개체를 포함한 세계 전체의 도처에 나있는 틈과 주름을 행위하는 개체의 다짐과 그에 따른 행위로 메우면서 가로지르는 동시에, 그 개체 자신을 이루는 틈과 주름에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by Monstera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7794355/
수행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한 개체를 포함한 세계 전체의 도처에 나있는 틈과 주름을 행위하는 개체의 다짐과 그에 따른 행위로 메우면서 가로지르는 동시에, 그 개체 자신을 이루는 틈과 주름에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사진 출처 : Monstera

이런 와중에 마수미는, 스피노자에게로 돌아가서, 철학자들이 17세기에 폐기한 세계관을 붙들고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을 따라가는 길을 택하는 대신, 일단 사람의 말과 행위가 가지는 수행성(遂行性 performativity)을 바탕으로 다른 길을 개척하려고 하는 듯하다. 수행성이란 사람을 행위하도록 만드는 말의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다짐, 사람들 앞에서 다짐을 밝히는 것으로써의 선언, 격려 등을 수행적 발언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모든 발화가 수행성을 가진다고 볼 수도 있다. 수행성 중시의 결과는 양면적일 것이다. 사람을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로 보는 입장에 서면 수행성은 사람을 특정한 방향으로 노동하고 소비하도록 조종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수행성을 발휘한다면 그는 자본주의의 세계 관리와 무관한 삶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수행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한 개체를 포함한 세계 전체의 도처에 나있는 틈과 주름을 행위하는 개체의 다짐과 그에 따른 행위로 메우면서 가로지르는 동시에, 그 개체 자신을 이루는 틈과 주름에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시간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선형적[직선적]일 수 없을 것이다. 마수미가 윤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세계상 속에서 양극단 혹은 자본의 세계 관리가 가설(假設)한 선형적 움직임에 포섭되지 않을 수 있는 태도를 체화하기 위한 수양(修養)의 지침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여볼 수 있을 듯하다.

마수미가 생각하는 윤리학은, 『대승기신론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에서 원효(617~686)가 학인과 수행자들에게 권고했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가운데에 머무르지도 않는 태도[이변비중(離邊非中)]’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또한 주자학의 수양론에 지향하는 목표인 ‘상황[時]과 장소에 맞게[中] 상대를 대하는 것[시중(時中)]’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항상 가지고 있는 것[중용(中庸)]을 연상시켰다. 주자학의 수양론을 탈-맥락하여 재-맥락화하면 마수미가 말하는 수행성의 발휘를 설명할수 있을 듯 하였다.

정동, 조직화된 세계를 가로지르며 자율과 포획 사이를 오가기

마수미가 정동에 관하여 펼친 주장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5~69쪽 참조]

정동

특정 사물들(정동을 육화하는) 안에 정박된 (기능적으로 제한된) 가상적 공감각 원근

정동의 자율/참여/빠져나감escape

가상적인 것 안에서, 개방적으로, 육체에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정동의 포획/폐쇄

형태가 주어지고, 자격이 부여되고, 위치가 정해진 지각과 인식
예) 선형적 운동[불통], 의미의 양식화된 진행[불통]

정서

포획/폐쇄의 가장 강렬한(가장 수축된) 표현
예) 음성의 분위기[긍정적 호소력], 음성의 떨림[긍정적 호소력]

현실

무엇인가가 항상 빠져나가는 (상황)

마수미에게 정동, 정동의 자율, 현실은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다. 반면, 정동의 포획은 어느 정도 뭔가가 정해진 상태[□]이다. 마수미는 이 상태에서 형태가 주어지고, 자격이 부여되고, 위치가 정해진 지각과 인식이 발생한다고 보는 듯하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간 것이 정서인데, 이는 포획/폐쇄의 가장 강렬한(가장 수축된) 표현이며 고착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수미는 이 고착된 상태에서 긍정적 호소력을 가지는 음성의 분위기와 음성의 떨림 등이 발생한다고 보는 듯하다. 마수미는 이것이 ‘성공한 정동 참칭’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는 듯하다.

마수미는 사람이 이미지로 세계와 만나는 활동에는 도처에 구멍/틈이 숭숭 뚫려있다고 보는 듯하다. 또한 마수미는 어떤 존재이든 ‘양태’를 가지면 한계가 있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그 양태를 해체해야 한다거나 각각의 양태를 그 존재와 동일시하는 것을 인식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다만 그는 그 양태가 유지되는 것[常]은 아니라는 생각에 가담한 듯하다. [71~72쪽 참조] 마수미는 자연이 담론에 의하여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담론이 인간 비인간을 나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연이 담론으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담론 안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72쪽]라고 토를 단다. 마수미는 시나브로 인본주의에 안주하게 되어 자연을 대상화해버리는 것도 경계하고, 자연에 이법이 깃들어 있다던가 신즉자연 관념을 정교한 맥락에서 떼어내서 지나치게 소박하게 해석하여 자연을 불변의 질서로서 숭배하는 것도 경계하는 등, 나의 몸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나에게 자극을 주고 있는 모든 것으로써의 자연을 향하여 날선 긴장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말해 온 셈이기 때문이다. 이는 몸이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긴장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성공한 정동 참칭

마수미는 정서가 고착된 상태이면서도 호소력을 가져서, 비이데올로기적인 수단이면서도 이데올로기 효과를 창출한 예로 레이건의 경우를 제시한다. [77~78쪽 참조] 그리고 그 경우를 ‘성공한 정동 참칭’으로 규정한다. [79쪽 참조] 마수미는 레이건의 언행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틈이 쩍쩍 벌어져 있었으나, 그 구멍과 틈을 메울 수 있는 신뢰 축적 기술과 산업이 이미 1980년대에 완비 되었다고 본다. 매스 미디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마수미는 레이건 이후의 세계를 “후기-자본주의, 이미지-기반 그리고 정보-기반 경제” [80쪽]로 보면서 그러한 세계 속에서 보편화 되어버린 현상을 가지고 가상성을 예증한다. “…… 일상생활에서 걸어다닐 때마다, 외화면의 상업 광고 이미지가 해대는 폭격을 생각해보라. 스타일이 재활용될 수 있을 만큼 회전시간이 빠르게 감소할 때 심상위주(imagistic)로 작동하는 소비자 객체를 생각해보라. 그 컷이 있는 어디에서든, 서스펜스-태동(the suspense-incipience)이 있다. 이것이 가상성 아닐까?” [81쪽] 이는 지금 메트로폴리스의 시가 풍경과 시민의 내면 풍경에 다름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상의 끄트머리(the edge of virtual)이다. 그곳은 가상이 현실적인 쪽으로 새어 들어가는 곳이다. 왜냐하면 서서히 스며드는 그 끄트머리는 잠재가 실제적으로 발견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83쪽] 마치 사람의 세포막이 그 막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리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쉴 새 없이 어떤 물질을 통과시키거나 통과시키지 않으면서 생명이 유지되거나 쇠약해지는 것에 비유하여 보면, 정동의 포획/폐쇄와 자율/참여/빠져나감이 엄밀히 양분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듯하다.

마수미는 이러한 상황을 “포스트모던 육체의 심상주의적 잠재(the imagistic potential)” [84쪽]라고 하면서, 적어도 북미에서는 극우세력이 기존의 좌파보다도 이 상황에 훨씬 더 적응이 잘되어 있음을 우려한다. [84쪽 참조] 마수미는 정동이 일종의 ‘도구적 감성’임을 재확인하며 그 도구의 활용 현황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내린 것 같다.

정동, 후기 자본주의의 실제적 조건

이어서 마수미는 클린턴 대통령이 건강-보험 개혁법을 제안했으나 개혁에 성공하지못한 상황을 떠올린다. 그때 언론은 대통령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신뢰를 잃었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느낌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 언론이 있었다. 비용이 많이 드는 개혁이 경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논평이 많았다. 결국 마수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정동적 동요(affective fluctuation)를 누가 어떻게 다루느냐가 세계의 모습을 결정하는 세태에 기대와 우려를 표한다. “경제학 자체보다도 더 빠르고 확실한 경제효과를 생산하는 정동의 능력이 의미하는 바는 정동이 후기 자본주의 체계의 실제적 조건이며, 내적인 변수라는 것이다.” [86쪽]

마수미는 이 단란한 세상을 몰랐을 것이다

대처와 레이건을 상징 인물로 하는 20세기 말의 신자유주의를 겪어야 했던 마수미는 갈수록 조밀해지는 자본의 세계 관리를 수행적 활동으로 가로질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마수미는 ‘성공적 정동 참칭’이라는 복병을 만나기도 하고, 정동적 동요의 주체적 관리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좌절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마수미의 행보에 모든 사람 모든 정치체가 보조를 맞출 수는 없다. 예컨대 남한 사회는 미국과 1위를 다툰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에 의하여 특화된 사회이지만, 이른바 정(情)이라는 것이 형식논리를 압도하는 지극히 ‘단란한’ 사회이다. 압도적 정에 맞서 남한의 사상가들은, 수행성의 발휘보다는, 형식논리의 복권을 외쳐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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