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⑧ 사랑으로 하나되는 대화

공감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상대방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며 그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우리 삶이 가진 다채로움과 충만함을 깊이를 응시한다면 서로를 꼭 껴안을 수밖에 없는 사랑으로 합일될 것입니다.

공동체, 열정과 상상력의 배치

‘초록정치연대’라는 공동체의 문을 처음 두드린 것은 2007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상석이나 말석 구분 없이 빙 둘러앉은 자리에 익숙지 않았지요. 특히 비폭력 공감대화라는 대화법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이전까지의 모임에서는 주인공과 관객, 혹은 발표자와 청중으로 구분된 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공동체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포지션과 배치를 잡고 서로 다른 입장들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대화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이채로웠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요.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꼬리 잇기 방식으로 수평적으로 이어갔으니까요. 특히 상대방의 이야기에 계속 반응하고 공감하면서 진행하는 대화법은 저에게는 익숙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비판적 대화법에 따라 상대방의 입장을 공격하거나 평가하는 자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공감대화라는 것이 마치 수다, 뒷담화, 잡담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에 저는 경청하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정한 강도, 온도, 밀도, 속도가 대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면, 저도 덩달아 대화에 참여하게 되고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갑자기 끼어들어 부연하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족과 같은 말을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예전에는 진행자가 있어 대화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 끊고 맺는 역할을 했지만, 공동체의 배치와 관계망은 무한상상력처럼 우주까지 뻗어나가는 아이디어의 공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의와 토론, 아이디어 회의가 기다려지고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는 급기야 일을 크게 벌입니다. 곧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도롱뇽과 자전거와 동물, 어린이, 농민 등을 출마시키자는 아이디어에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매료되어버린 것입니다. 무모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라인 투표를 조직해서 현황판을 만들고, 홍대 거리에서 홍보하고, 거리를 행진하며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모든 일이 벌어졌지요. 당시에 녹색당이나 생태주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은 커졌고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저는 당시 동물선거운동본부를 맡아서 동물보호단체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마침내 동물선본이 최종적인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대선후보 등록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러한 일련의 이벤트도 막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리의 배치와 자리가 만든 아이디어 덕분이었고, 모두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스피노자와 브레인스토밍하기

스피노자가 친구들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기록에 많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밝혀진 내용만 종합하면 스피노자는 헤이그의 작은 인근 마을에서 서너 명의 이웃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루었고, 서신 교환을 통해 많은 사상가들과 교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와의 서신 교환에서 짐작해보건대, 전혀 맥락에 닿지 않으면서도 공감하려 하고 사상과 철학에서의 차이와 편차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려 했다는 점이 주목이 됩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지적 배경도 달랐고, 전개한 사상도 달랐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당대의 특이한 사상가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딱 한 번 만났나고 합니다. 드디어 편지가 아닌 현실에서 사상적 대화를 나눴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공통되게 데카르트의 근대성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지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개방한 근대성은 데카르트와는 아주 색다른 구도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색다른 구도에는, 후대에 이를 연결했던 프랑스 철학자 쥘 들뢰즈의 사유가 탄생할 수 있었던 희미한 스케치와 단서가 작은 얼룩처럼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스피노자와 함께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회의를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아무리 엉뚱한 생각도 허용하는 회의 말입니다. 특이한 것, 우발적인 것, 별난 것을 스피노자는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후대의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합리론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스피노자가 욕망, 사랑, 정동의 자기원인에 따라 사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단지 원인과 결과 같은 인과론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주 우연한 계기로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합리론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 무색하게도 그에게는 엉뚱한 상상력이나 별난 아이디어가 욕망의 이름으로 나타날 소지가 다분합니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에 순식간에 자리 잡게 되는 욕망을 허구나 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구성하는 원천이자 자기원인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대화법이 어땠을지를 한번 상상하게 됩니다.

일관된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부부는 우연한 계기로 영등포에 있는 서로살림생활협동조합과 접속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밥을 먹으러 오라는 친구의 권유로 저녁 한 끼 맛있게 해결할 요량으로 참여했지요. 그런데 그냥 밥만 먹는 게 아니라, 빙 둘러앉아서 자기소개도 하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밥 먹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순식간에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함께 생각하고, 함께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따금 생협에 들러 장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합원들과 인문학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인문학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도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책의 내용이 마치 어떤 선승의 화두나 간화선(看話禪) 같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처음 도전한 책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었습니다. 그것도 공동체의 시각에서 읽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출발했습니다. 꽤 어려운 책이고 두께만 보면 쉽게 도전하기 힘든 책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에 나오는 ‘일관성의 구도(plan of consistence)’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많은 힌트를 주었지요. 그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공감대가 깊기 때문에 중언부언하면서도 일관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청소를 주제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중간에 날씨나 연예, 가족 등 딴 방향으로 흘러도 결국 딴소리를 통해 뜻과 지혜와 실천의지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그 개념은 마치 우리 자신을 얘기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 모임도 사실 서로 딴소리를 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동체를 재건하고 구성해야 한다는 뜻과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관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살림 인문학 모임은 벌써 6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구성원들 대부분이 평범한 주부이지만 대학원생이나 전문 철학자 이상의 수준 높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철학책에서 삶의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선생이자 옵서버로 참여하는 저로서는 예습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번 책을 여러 차례 읽고 발제를 마친 다음 세미나 장소로 향합니다. 오히려 제가 더 공부하고 배우는 시간이었지요. 지난 6년은 세미나마다 포트럭파티와도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구성원들이 가지고 온 과자며 음식이며 과일을 먹다 보면 슬며시 체중 걱정이 들곤 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안한 일관성의 구도라는 대화법은 이미 우리의 대화법으로 정착했습니다.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삶으로 공동체를 느꼈지요. 그리고 공동체의 시선으로 『천 개의 고원』을 읽는다는 그 기획은 아직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비폭력 공감대화는 공동체에서의 사랑의 대화법이다.

우리 일상 속에서 아이, 동물, 소수자라는 특이점으로 드러나며, 우리가 꼭 껴안아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사진 출처 : xaviermouton

공동체에서는 상대방을 타자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되도록 경청하고 품고 감싸 안으려고 합니다. 저 역시 여러 공동체와 접속하면서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려는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태도나 자세만으로는 안 되고 배치와 관계망이 그렇게 사랑, 정동, 욕망에 적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맨 처음 접속한 공동체에서는 비판, 인정투쟁, 논쟁이 거의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 학생운동을 하면서 그런 인정투쟁 방식의 대화법에 익숙했던 저로서는 비폭력 공감대화가 무척 생소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대화기술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밥을 함께 해먹고 함께 놀고 함께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성숙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활동가들 모두 친구였던 셈이지요.

한 번은 그즈음 유난히 딴 데 정신이 팔려 일을 하지 않던 활동가를 불러 세워놓고 비판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곧 후회가 밀려들어 그의 손을 잡고 꽉 악수를 한 후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 활동가에게서 작은 아이와 같이 주저하는 마음을 발견했고, 그에게 상처가 되었으면 어쩌나 미안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스피노자가 바라보았던 욕망, 무의식, 정동,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일상 속에서 아이, 동물, 소수자라는 특이점으로 드러나며, 우리가 꼭 껴안아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껴안으면서 저는 온몸으로 그 사람에 대해 느꼈습니다. 우리 둘 사이에 따뜻함이 싹트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실 상대방에게서 사랑, 욕망, 무의식, 정동 등을 발견하게 된다면, 비판이나 인정투쟁을 할 여지는 거의 없지요. 그러한 상대방의 욕망을 감싸고 북돋우며 끌어안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피노자의 구도가 비폭력 공감 대화의 방법론을 이미 선취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보면 종교의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들이 아주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땐 비폭력 공감대화는 커녕 아예 딴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피노자의 비판은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권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의미를 갖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으로 모든 것의 해답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스피노자는 너무나 뜨거웠던 사람이었고, 매사에 열정이 넘쳤고, 그러면서도 아주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 우주, 자연, 인간을 아이처럼 행동하는 욕망의 눈으로 보자고 제안합니다. 그것은 비폭력 공감 대화가 보여주는 상대방을 타자화하지 않고 공감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스피노자의 뜨거운 열정과 함께 따뜻함과 부드러움도 느끼게 됩니다.

최선은 비판이 아니라 공감이다

특이점들이 모여서 이제 삶의 내재성의 풍부함과 다양함을 이루는 경우의 수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 출처 : andrews

스피노자는 ‘삶의 내재성(immanence)’이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갖고 있는 깊이와 잠재성, 능력으로 충만한 영역, 생활세계의 풍부함과 일상의 새로움에 주목하자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일면만 보고 쉽게 단정하고 비판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만약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하나의 측면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쪽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영토에 있는 다채로움과 복잡함, 충만함 등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지요.

서로살림생활협동조합의 인문학 모임에는 6년째 엄마와 함께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하려는 태도로 아이를 대했습니다. 초기에는 발제를 하는 도중에 울음을 터뜨린 갓난아기를 달래느라 아이를 업은 채 방 안을 걸어 다니면서 한 손에 든 발제문을 읽기도 했지요. 그 아이의 울음, 웃음, 기쁨, 슬픔 등에 대해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비폭력 공감 대화의 잠재성과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방에게서 작은 아이, 열정과 욕망을 가진 아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발견하는 것이 공감 대화입니다. 이를 통해 상대방의 존재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공감 대화가 갖고 있는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판 담론이 잘못 사용된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상대방을 수용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일차원적인 측면을 파고 들어가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에는 저 역시 비판 담론에 익숙해져 있어서, 상대방에게 허점이 발견되면 그 즉시 상처를 후벼 파는 식으로 대화를 진행했지요. 생각해 보면 그런 방식의 대화에 저도 꽤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대화라기보다는 인정투쟁이나 도장 깨기와 같았고 그 자리에서 저는 우위를 점하거나 헤게모니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끝나면 사람들은 황급히 흩어져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저는 무척 외로웠고 고독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갔고, 저는 홀로 이론과 사상의 아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스피노자를 공부했고,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고 있다고 느끼긴 했습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삶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창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이론마저도 저는 비판담론의 무기나 연장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삶의 척박함, 빈곤, 황폐함에 빠져 있던 저로서는 스피노자의 삶의 내재성이라는 개념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비루하고 똑딱거리는 일상이 어떻게 풍부하고 다양할 수 있다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지요. 그러나 삶의 재건은 공동체의 재건이고 일상의 구성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깨달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고, 저는 작은 생명, 한때 길냥이였던 고양이와의 교감과 우정 속에서 삶과 일상의 특이점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공동체를 만들어 세미나를 하면서 일상의 특이점 하나를 더 마련했습니다. 아내와 대화하고 공감하고 교감하는 과정에서 일상의 특이점 하나를 또 마련했습니다. 그 특이점들이 모여서 이제 삶의 내재성의 풍부함과 다양함을 이루는 경우의 수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저의 삶에도 공감하고 수용하고 대화할 생명과 가족, 연인이 있다는 것이 큰 활력소와 촉매제가 됩니다. 그렇게 저는 삶의 내재성이라는 스피노자의 개념을 비로소 직접 느끼고 안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합일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대화법은 비폭력 공감 대화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저에게는 책상 앞의 고양이가 잠들면 이성이 눈을 뜨고, 고양이가 수선스럽게 움직이면 욕망과 정동이 눈을 뜨는 평행선을 오가며, 색다른 공감과 교감의 삶을 사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물론 지금 제 앞에서는 고양이가 잠들어 있지요.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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