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㉔ 생명은 모두 물음표, 세상은 민주주의 놀이터

아이들이 삶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놀이를 자꾸 바꾸고 이리저리 횡단하고 방황하는 아이처럼 『에티카』 후반부의 논증을 이끕니다. 그가 주장하는 내재성의 구도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아이라는 주체성처럼 삶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작동할 것입니다.

질문을 하는 아이들

아이 때 보여주었던 그런 상상력이 조카들에게 깊숙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Poodar Chu

몇 년 전 조카가 한 질문에 탄복한 적이 있습니다. “삼촌, 하늘의 비행기는 왜 아이구름을 낳을까?” “밤에는 왜 무지개가 없을까?” “바람은 왜 태양을 흔들지 못하지?” 이런 질문에 저는 늘 난처하고 군색했지요. “그건 말이지”라고 운을 떼면서도, 조카의 상상력을 지켜줘야겠기에 조금 엉뚱한 답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고정관념에 찌든 어른의 답은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생명은 물음표, 호기심, 문제 제기를 하는 존재라고 했던가요? 그래서 뻔한 답이 아닌 색다른 문제 제기를 하는 생명이 더 소중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 조카들이 다 커서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런 신기한 문제 제기의 능력이 돌연 사라졌습니다. 대신 오랜만에 만나도 스마트폰만 열심히 들여다보죠. 그러나 저는 아이 때 보여주었던 그런 상상력이 조카들에게 깊숙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유치원 다닐 즈음 내 직업을 궁금해했던 조카에게 “삼촌은 유치원 선생님이야”라고 거짓말을 했던 때가 어제 같은데 말이지요.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스피노자 강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과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담은 참신한 문제 제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날은 밤늦게까지 『에티카』를 읽었지만, 스피노자는 “~은 ~이다”라고 정확히 의미를 적시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은 저를 더욱 강박시켰고, 저는 학생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기보다 각각의 문제 제기에 명확한 대답을 일대일로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렸지요.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제가 깨달은 것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스피노자가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 제기를 던지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요. 저의 대답들은 스피노자를 “그건 이거다”라고 확실히 의미화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의구심과 모호함, 미적지근한 대답이 주는 혼란만 일어났지요. 그렇게 한 한기 동안의 스피노자 강의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스피노자가 현학적이고 화려한 논증 구조를 갖추어 대답하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리, 공리, 증명 등의 기하학적 구도는 마치 그럴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인류가 밟아온 지식의 패러다임은 ‘은유와 비유의 시대’에서 ‘대답의 시대’로 이행했고, 다시 대답의 시대에서 ‘문제 제기의 시대’로 이행했다고, 가타리는 평가합니다. 은유와 비유의 시대는, 의미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던 생태적 지혜의 시대였고, 이에 따라 의미의 본질을 적시하는 대답, 즉 탈주술화와 합리화가 근대 담론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대답을 내놓는 철학이 아닌, 아이처럼 호기심, 상상력, 질문을 던지는 탈근대의 상황으로 지평을 가로질러 주파합니다. 무의식, 욕망, 신체 변용의 주체성이 아이이기 때문이겠지요. 이에 따라 스피노자의 철학 속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아이들의 상상력이나 호기심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마도 스피노자를 ‘탈근대의 예수’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놀이하는 아이들, 공부에 지친 아이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책만 파느라 공부에 지쳐 있던 요령 없는 공부벌레였지만, 늘 인생이 가야 할 미지의 항로를 탐색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수업 시간에 갑자기 윤리 선생님이 책을 덮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고는 느닷없이 철학자 스피노자에 대해서 얘기해주셨습니다. 한 시간의 짧은 수업이었지만, 제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스피노자를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철학과에 진학해야 하는 직접적인 동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윤리 선생님의 수업은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범신론에 대한 개괄이었지요.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는 식의 얘기였는데, 새로운 공부의 방법론이라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범신론은 몇 년 동안 나의 화두가 되었고, 철학과에 진학한 후에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끼고 다녔지요.

아이들은 ‘놀이하는 주체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사진: Markus Spiske

후배 중에 놀이 연구자 J가 있습니다. 그는 놀이 수업 때 아이들과 만나면 일부러 놀이를 시작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행정 일을 보는 척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느낄 때까지 말이지요.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거리고 왔다 갔다 하다가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스스로 놀이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들뢰즈가 재료가 살아 움직인다고 표현했던가요? 공, 종잇조각, 줄 같은 것이 모두 놀이 도구로 변신합니다. 보조 선생님은 아이들을 말리는 척합니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신나며 놉니다. 뛰는 아이, 구르는 아이, 뒹구는 아이… 돌연 난리가 벌어집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대목은, 지루함과 심심함이 놀이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놀이 프로그램의 일부입니다. 아이들은 ‘놀이하는 주체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증명, 공리, 정리 등으로 구성된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논증은 의미와 일 모델, 즉 하나의 의미에 집중하고 수렴되는 모델과 같은 형태를 띤다고 판단될 수도 있습니다. 명확하게 합리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근대적 모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티카』 후반부의 정동의 기하학을 통해 보여주는 스피노자의 논증 방식에서,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재미와 놀이 모델, 즉 여러 의미를 횡단하고 이행하는 모델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놀이를 자꾸 바꾸고 이리저리 횡단하고 방황하는 아이처럼 『에티카』 후반부의 논증을 이끕니다. 그래서인지 답을 해주는 스피노자보다, 질문을 던지는 스피노자가 더 먼저 떠오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성과 욕망이 평행선을 달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의미 모델과 재미 모델의 평행선이라고 해석될 수 있겠지요. 차가운 이성의 의미와 함께 뜨거운 열정을 가진 욕망의 재미가 함께 움직인다고 얘기하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스피노자를 지극히 오독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사랑, 신체변용, 욕망, 무의식 등의 개념들에서 바로 아이들의 재미와 놀이 모델을 재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구성주의 세대인 아이들에게

최근 교육 현장에서 구성주의가 전면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는 적잖은 감격이 밀려들었습니다. 비록 초창기 구성주의 학습법이 자기주도학습이라는 이상한 개념으로 오독되어 소개되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그 이름에서도 금세 알 수 있듯이 기존의 교육방식과는 정말 다른 방법론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기존의 객관적 진리론에 입각한 교육은, 교육자가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피교육자인 학생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완전히 배제한 교육 방법론인 셈입니다. 반면 구성주의적 교육 방법론은,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에 필적하는 위치를 갖는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스피노자의 특이성(singularity) 개념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신만이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도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건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대답이 있을 수 있고 혹은 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누구나 구성주의의 지평으로 튕겨 나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사지선다형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하나여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이에 따라 알 수 없는 문제에는 찍기나 연필 굴리기를 통해서 답을 정하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저는 뉴턴의 세계관이었던 인과론을 당연히 진리라고 여기며 객관적 진리론을 바탕으로 그 외부는 없다고 반복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던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도 인과론의 일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당연히 스피노자 역시 뉴턴적 세계관의 범위 내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아주 순식간에 그 지평을 주파해버렸고, 대신 정동의 기하학 장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구성하는 색다른 방법론을 구사했습니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스피노자라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그려낸 구성주의적 세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은 구성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입니다. 즉 진리가 객관적인 표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변용을 거쳐야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체변용과 평행을 달리는 공통관념의 개념을 접한 사람이라면 스피노자가 이미 근대를 넘어서 탈근대의 지평, 구성주의의 지평으로 향해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신체변용인 셈이지요. 스피노자의 신체변용에 따른 앎의 구도는 바렐라의 ‘앎=함=삶’이라는 구도를 선취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미 몇 세기 전에 구성주의는 스피노자에 의해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성주의적 교육을 받은 20대의 등장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인식에 대한 사유를 하는 세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구성주의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체변용을 거쳐야 앎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되기의 진실

저는 아내 앞에서 아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아이처럼 떼쓰고, 칭얼대고, 춤추고, 노래하니까요.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유치하다거나 닭살 돋는다고 할 테지요. 하지만 저는 이것을 감히 아이 되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혹은 신혼부부에게서도 아이 되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리광을 부리고 혀가 짧아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단지 유치해지는 것이 아이 되기는 아닐 것 같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바라본 아이 되기는 스피노자의 노선을 발전시킨 개념입니다. 아이 되기는 고정관념 없이 흐름의 사유, 신체변용의 사유가 활성화되었을 때 보여주는 모습을 지칭합니다. 이를테면 스피노자의 자유인이라는 개념을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해석하자면 ‘아이 되기가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 되기는 자유 정신을 향한 신체변용의 양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아이 되기는 공동체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공동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능을 갖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를 준엄하고 근엄한 어른인 변호사, 판사, 경찰 등에게 해결하도록 맡기지요. 그러나 이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표상되는 초월적 권력에 문제를 맡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공동체의 내재적 민주주의의 능력, 다중과 삶의 내재적인 능력은 사랑과 욕망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관념 없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 되기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의 『오래된 미래』(2007)에 등장하는, 공동체의 갈등 중재자 역할을 하는 아이의 사례가 그것입니다. 이에 따라 삶의 내재성에 근거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등장하는 주체성이 바로 아이 되기를 한 주체성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갈등 상황에 직면하면 분노하고 목소리가 높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언쟁하면서 찬찬히 ‘1인칭의 나’ 속의 ‘3인칭의 나’를 통해 바라보면, 얼굴이 빨개진 상대방의 얼굴 뒤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작은 아이를 발견합니다. 그러면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사태는 곧 진정됩니다. 서로 쑥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금방 자리를 피하게 되지요. 합리적이고 세련된 개념을 말하는 전문가를 만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런 전문가에게서 자신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떼를 쓰는 아이를 종종 발견합니다. 결국 그가 정의를 내리게 된 근거라는 것도, 사실은 생활연관, 즉 삶의 내재성에 접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이 금방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전문가들만이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아이 되기는 스피노자가 말한 삶의 내재성의 의미를 살짝 엿볼 수 있도록 들뢰즈와 가타리가 창안한 개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단순하게 유치해지기는 아이 되기의 야성적인 능력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 되기는 스피노자와 같이 야만적 별종들이 취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 중 하나입니다.

아이들이 삶의 진실을 알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삶의 내재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가 진리를 알고 있다면, 아이들은 어떨까요? 아이들은 내재성 개념을 잘 보여주는 주체성입니다. 어떤 논증과 추론 능력의 결과물만이 진리인 것은 아니지요. 삶에서 경험을 통해 슬며시 마음을 두드리는 그 어떤 것도 진리입니다. 그것을 하게끔 만들고 생각을 만들고 삶의 의지를 만들어내는 것도 진리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치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고 삶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이거든요.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구도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아이라는 주체성처럼 삶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작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어른들과 전문가들의 제도로 고정될 때, 단 한 번만의 선거라는 위임절차에서 아이와 같은 주체성을 동원한 후 당선되자마자 초월적 권력을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신념은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절대적 민주주의는 공동체 내에서 작동하는 삶의 내재성의 평면을 펼쳐 보이는 과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모두가 스피노자주의자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삶이 전제되어야 하고, 신체변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삶을 통해서만 알 수 있지,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진리를 달달 외운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 되기를 위해서, 즉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이야말로 삶의 진실, 신체변용의 진실에 가장 능통한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의 능력을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의 신체변용이라는 개념에서 아이 되기의 능력을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신체가 갖고 있는 놀라운 능력을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정말 아이가 되어 젖병을 물고, 유치한 행동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아이 되기는 신체에 내재된 놀라운 야성적인 능력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처음으로 응시했던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입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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