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 2주기 추모(축)제 특집] ① 슬픔보다 기쁨을, 죽음보다 삶을, 분노보다 사랑을 노래하라

신승철 소장님은 저의 마음 안에서 슬픔보다 기쁨을, 죽음보다 삶을, 분노보다 사랑을 노래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는 삶과 생명을 사랑하자고, 늘 서로에게 스며드는 함께 되기의 과정 속에서 사랑하자고, 가깝고 익숙한 것보다 멀고 이질적인 것을, 지배적인 것보다 소수적인 것을 늘 더 사랑하자고 속삭입니다. 저는 이러한 은밀한 속삭임에 응답하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노력을 하고자 합니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조합원 여러분! 신승철 소장님을 기억하기 위해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故 신승철 소장님과 저는 학생운동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자(그리고 스피노자주의자)로서 국가와 자본에 맞서는 저항 공동체들에 참여해 왔으며, 대의나 재현의 정치보다는 직접적이고 표현적인 절대 민주주의의 관점을 견지하고자 했습니다. 우리에게 코뮤니즘과 절대 민주주의는 다중들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두 가지 양태였죠. 우리는 소수자들이 벌이는 여러 형태의 사회운동들, 즉 여성운동, 퀴어 운동, 장애인 운동, 노동운동, 마을 자치 운동, 예술가들의 연합활동, 교육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에 대해 참여 및 지지하는 입장에 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기후위기와 생물멸종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생태적지혜연구소’ 설립에 함께 참여했고 이후 마음생태, 사회생태, 자연생태 각 영역을 연결시키는 생태적지혜를 생산하면서 여러 생태·환경운동들과 접속 및 연대하고자 했습니다.

근래에는 성장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맞서 탈성장론과 탈인간중심주의에 중점을 두는 논의들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경제적 성장주의는 생명보다 이윤을, 공유보다 소유를, 공동체보다 개인을, 수평적 관계맺기보다 경쟁적 성공주의를 우위에 두면서 전자(생명, 공유, 공동체, 관계맺기)를 효율과 속도에 방해되는 요소로 바라봅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을 지배해 ‘성장은 좋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이윤을 축적하거나 권력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 이들, 신체적 성장이 불가능한 노인과 장애인, 사회적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하는 이주민들의 삶을 패배하고 실패한 삶, ‘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만듭니다. 성장주의 시대의 정언명령은 이렇습니다. ‘버려지고 폐기되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말라!’ ‘식사시간과 수면시간, 놀이와 여가의 시간을 줄여서라도 성공하라!’ 하지만 밥과 잠과 쉼이 없다면 누구든 어떤 생명이든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아세우는 권력과 체제와 그런 시대에 맞서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인간존재들은 이제 이 말없는 비인간존재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할 새로운 언어, 새로운 문화를 습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진출처 : Joppe Spaa

우리는 ‘탈성장론’이 이러한 죽음과 고통의 문화를 역전시키는 첫걸음으로 생각했으며,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삶과 즐거움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역동적 과정을 ‘생태민주주의’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중심주의가 만연된 세계 속에서 새, 풀, 바다, 숲, 흙, 바위, 꽃, 하늘은 늘 어떤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전면에 세워지지 못하고 뒷전의 배경으로 밀려납니다. 그들은 인간이 활용해야 할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문명사회를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도달한 기후위기와 생물멸종은 이제 인간만이 아닌 전체 세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말 못하는 이들의 조용한 반격인 것일까요?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인간존재들은 이제 이 말없는 비인간존재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할 새로운 언어, 새로운 문화를 습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비인간 존재들을 지구에 함께 거주하는 공동의 이웃으로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삶의 중요한 선택들을 만들어내는 습관을 형성합시다.

어떤 존재를 이 세상 속에서 삭제 및 무화(無化)시킬 수 있다는 관점을 버리고 존재는 무(無)일 수 없으며, 늘 되기와 변신 속에 놓여있다는 관점을 견지하면서 모든 존재들의 공생과 공존을 향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만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시적 언어, 감성적 몸짓, 비규칙적 선율, 차이나는 반복의 리듬, 비표상적 기호들, 인류가 어렴풋하게나마 익혀왔던 낯선 언어들을 활용하되, 그조차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정동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쓴(쓰고자 했던) 책들은 바로 이 새로운 정동생산을 위한 작은 노력일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쓴 『기후 협치』의 초고를 마무리하고 3일 뒤, 신승철 소장은 영면에 들었습니다. 그 뒤로 2년이 흐른 지금에야 저는 책의 마지막 문장들을 쓸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아서, 때로는 너무 깊은 우울과 무력감이 이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게 만든 이유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승철 소장은 그만큼 제가 뭔가를 행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동아리방 구석에서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같이 마시면서 시작된 신승철 소장과의 첫 만남은 제 삶의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신승철 소장님은 스피노자와 맑스, 네그리,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일깨워준 스승이었으며, ‘다중문화공간 왑’(WAB)과 자율평론, 한철연 등과 접속하게 도와준 선배였고, 여러 형태의 시위와 투쟁을 함께 한 동지였으며, 연애든, 건강이든, 인간관계든 어리숙하고 서툰 저의 일상적 삶의 고민을 들어주고 돌봐준 형이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울고 웃고 말다툼하고 화해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사유하면서 30년이 흐른 지금, 여러 모습이 눈앞에 선한 그는 이제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체는 해체되어 무수한 입자들로 쪼개지고, 이제는 자신이 사랑했던 세계 내 저 무수한 인간적·비인간적 존재들 속으로 스며들고 새겨져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세상을 이해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존재들은 늘 흐르며, 그러한 흐름과 되기를 벗어나 초월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모든 존재는 내재적이면서 구성적이고, 그러한 구성적 운동이 일시적으로 결합된 형태가 특이한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특이성이 새로운 재특이화를 생산하고, 다시 차이나는 새로운 반복을 이뤄낸다고 말입니다. 그는 저의 마음 안에서 슬픔보다 기쁨을, 죽음보다 삶을, 분노보다 사랑을 노래하라고 재촉합니다. 신 소장님은 삶과 생명을 사랑하자고, 늘 서로에게 스며드는 함께 되기의 과정 속에서 사랑하자고, 가깝고 익숙한 것보다 멀고 이질적인 것을, 지배적인 것보다 소수적인 것을 늘 더 사랑하자고 속삭입니다. 저는 이러한 은밀한 속삭임에 응답하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노력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소장님을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모두 그를 기억하되 슬픔보다는 기쁨으로 그렇게 기억하길 바랍니다.

이 글은 2025년 6월 28일 故신승철 2주기 추모(축)제 〈생태적 지혜〉의 발표문 중 하나입니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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