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유의 힘을 찾아서-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읽고

20세기 가장 비운의 삶을 산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 그는 비록 나약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지식인으로서 깊이 고뇌한 철학자였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저자의 아포리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포리즘 속에서 저자는 반세기도 전에 자본주의와 과학 물질 만능주의를 강하게 그리고 독창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비판을, 오늘날 우리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깊은 사유의 밑거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표지, (조형준 역, 새물결, 2007)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표지, (조형준 역, 새물결, 2007)

이번에는 조금은 오래 전에 출판된 철학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성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지식만이 난무하는 혼탁한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철학자가 있으니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독일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파리마저 나치에 점령당하자 미국으로 도피하던 중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철학자이다. 비록 나약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지식인으로서 깊이 고뇌한 철학자였다.

『일방통행로』(조형준 역, 새물결, 2007)는 벤야민의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책 표지에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이라고 실린 것처럼, 벤야민의 작품은 조금은 난해하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이 사유하게 한다.

벤야민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는 책과 언론이 상업 물신주의에 포섭되어버린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한다.

“문학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행동과 글쓰기가 엄격하게 교대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려면 괜히 젠체하기만 하며 일반적인 제스처만 취하고 마는 저서보다 현재 활동 중인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기에 훨씬 더 적합한, 언뜻 싸구려처럼 보이는 형식들, 즉 전단지, 팸플릿, 신문 기사와 플래카드 등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처럼 기민한 언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걸어가느냐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위를 날아가느냐에 따라 시골길이 발휘하는 힘은 전혀 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텍스트도 그것을 읽느냐 아니면 베껴 쓰느냐에 따라 발휘하는 힘이 전혀 다르다. 비행기로 여행하는 사람은 오직 길들이 풍경 속을 뚫고 나가는 모습만을 볼 뿐으로 그의 눈에 길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지세와 동일한 법칙에 따라 펼쳐진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길의 지배력을 알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저 쭉 펼쳐져 있는 평야에 불과한 지형으로부터 마치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하는 지휘관의 호령처럼 원경들, 전망대, 숲 속의 공터, 굽이굽이 길목마다 펼쳐진 멋진 조망을 불러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그것에 몰두한 사람의 영혼에 호령할 수 있지만 단순한 독자는 자기 내면의 새로운 광경들, 계속 다시 빽빽해지는 내면의 원시림들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저 읽기만 하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하늘을 떠돌며 자아의 움직임에 따르지만 베껴 적는 사람은 그러한 움직임에 호령하기 때문이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길의 지배력을 안다” by Chris Leggat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XNrfBDsak2k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길의 지배력을 안다”
사진 출처 : Chris Leggat

“바보들이나 비평의 쇠퇴를 애석해한다. 비평의 명맥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도 말이다. 비평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비평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중요한 세계, 특정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직도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 지금 온갖 사물들이 너무 긴박하게 인간 사회를 짓누르며 다가오고 있다. ‘편견 없는’, ‘자유로운 시선’ 같은 것은 거짓말이 되었다. 오늘날 사물의 핵심에 가장 본질적으로 가 닿는 시선은 광고라고 불리는 상업적 시선이다.”

각종 출판물이 물밀 듯이 몰려오는 요즈음,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당위가 아닌 이윤만을 생각하는 자본이 자연과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통찰하고 있다.

“이윤 추구욕을 가진 지배 계급이 기술을 통해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기술은 인류를 배신하고, 초야의 침대를 피바다로 바꾸어버리고 말았다.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모든 기술의 의미라고 제국주의자들은 가르친다. 하지만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의미라고 공언하며 채찍을 휘두르는 교사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교육이란 무엇보다 세대와 세대 사이의 관계에 필요 불가결한 질서 잡기이며, 따라서 지배라는 말을 사용하면 아이들이 아니라 세대들 간의 관계에 대해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기술이라는 것 역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류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생활하여야 할까?

“은둔자들은 검약한 생활을 했다. 먹는다는 것은 공동생활 속에서만 정당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음식은 나누고 함께할 때만이 비로소 음식다워진다.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옛날에는 식사할 때마다 걸인이 하나 합류해 식탁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한자리에 둘러앉아 나누는 사교 상의 대화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 대접은 사람들을 비슷하게 만들어주고 결속시켜준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저자의 아포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읽기에 조금은 난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포리즘 속에서 저자가 반세기도 전에 자본주의와 과학 물질 만능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저자의 비판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깊은 사유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환성

공학계 앤지니어로 10여년간 인간중심주의가 지배하는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인문학에 목말라했다. 지금은 현장을 떠나 자유로이 독서와 함께 인문학에 빠져 있으며 철학과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다른 삶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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