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기후 운동 퍼포먼스와 동조, 전염, 바람의 네트워크’(생태적지혜, 2022년 11월 11일 발행)와 이어져 있습니다.
어느 덴마크 안무가가 나에게 무용공연 작업과 기후 퍼포먼스 작업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있다. 근래에는 또 다른 작가로부터 내가 속한 기후 운동 퍼포먼스 그룹, 비커밍 스피시스(Becoming Species)의 예술적 방법론(Artistic methdology)을 예술가의 저작권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오픈 소스로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기도 했다. 두 질문을 통해 개인 안무 작업과 비커밍 스피시스의 기후운동 퍼포먼스에 참여하며, 그 중간에서 느꼈던 차이와 중첩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글은 그 생각을 정리한 것이고(수없이 많은 종류의 안무 환경과 기후 운동 환경 중) 내가 발을 딛고 있었던 어느 특수하고 제한적인 안무환경과 기후 운동 환경에서 나온 비교이다.
극장과 공공장소 사이에서

사진 제공 : Becoming Specie
예술가와 그의 가족을 모두 레지던시에 초대해 예술가가 아이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BIRCA 키즈 레지던시의 첫 미팅이었다. 이 레지던시를 기획한 덴마크 안무가 무(My)에게서 위의 질문을 받았다. 직관적으로 내뱉은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기후 운동 퍼포먼스는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 아기를 데려가기도 편했고, 누구나 지나가면서 볼 수 있었어.’. 정말 그러했다. 기후 퍼포먼스는 주로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령이나 경제적 조건과 관계없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이는 내가 2~5세 유아를 데리고 기후운동을 다녔던 어머니라는 특성 때문에 더 잘 느꼈다.
그러나 아이를 데리고 내가 보고 싶었던 극장 공연을 보러 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서울에서는 아기나 유아를 데리고 어른들을 위한 공연에 들어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나마 함부르크 여름 페스티벌 공연에 아이를 데리고 (아이는 티켓 없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하는 다른 부모들이 여럿 있기도 했지만, 내 아이가 소리를 낼 때마다 주변에서 돌아보는 시선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 엄마가 된 이후에야 근현대 극장 공간의 배제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신체 조건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건축적인 벽, 어떤 경제적 위치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금전적인 벽, 연령에 의해 제한되는 벽 등.

근래에는 감사하게도 다양한 배리어 프리1를 시도한 공연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기, 유아 등의 특수한 연령층을 고려한 공연이나 어른들이 공연을 보는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공연을 볼 수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어른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을 수 있고, 함께 있기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은 또 없을까? 질문하게 되었다. 지난해 완도에서 미역과 다시마 양식을 하는 할머니들을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른들이 다시마 수확해서 일하고 있으면 아이들은 그 옆에서 놀았지. 나중에는 도와주기도 하고.”

마을 어른들의 노동 공간 옆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예의와 공동체 속 역할을 배워나갔다. 그런데 지금은 점점 그러한 공동공간이 사라져간다. 키즈존, 어린이 공간으로 따로 분리될수록 개별 가족이 돈을 부담해야 하는 사유화가 일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있을 수 있는 공간도 점점 없어진다.
그런데 이와 달리 기후 운동 퍼포먼스는 누구나 오고 가는 공공장소에 내 아이를 데려갈 수 있었다. 퍼포먼스 도중에 아이도 오고 갈 수 있다. 만약 어느 아이가 소리를 지르거나 우는 행위들이 퍼포먼스와 동시에 일어난다면, 이 역시 현장성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고령자나 장애인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물리적이며 제도적인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 〔출처: korean.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