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선을 따라 흐름을 만들자!
서른 살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직장을 다닐 때였습니다. 직분, 기능, 역할로서의 직장인. 이외에 저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없었습니다. 비루하고 똑딱거리는 노동을 하고 나서 퇴근 후에 밀려드는 무료함, 지루함, 잉여현실들과 마주쳤습니다. 제 삶은 사회라는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건전지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분명 본질로서의 “나는 직장인이다”에 충실했지만, 다른 삶의 영역에서는 빈곤하고 초라하고 가난했습니다. 그때 슬며시 예속을 갈망하는 마조히즘적인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말이지요. 저는 무시무시한 일중독에 빠져들었고,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지 상상치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사냥꾼이나 스포츠맨과 같이 날렵하게 일처리를 하면서 저는 활력과 에너지로 넘쳤지요. 하지만 퇴근 후에는 텔레비전을 멍하니 보다가 잠을 청하는 1인 가구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일에서 벗어나는 순간 고독과 독백, 감정기복, 외로움이 밀려들었습니다. 특히 잠에 들 때 혼자서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의식의 흐름이 작은 닫힌 공간에서 끊임없이 속도를 내고 공회전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욕망과 사랑, 정동이 넌지시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일에 파묻혀 살던 제가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작은 계기였습니다. 사무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재잘거리듯 웃는 소리를 예사롭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저는 사무실을 빠져나와서 짐을 싸고 홀연히 여행길에 나섭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시골의 작은 찻집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풍경소리, 바람에 대나무 이파리가 흔들려 웅웅거리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닭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판단 정지의 시간 속에 있었습니다. 한 번도 삶의 기능이나 역할 말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던 제가 곁과 가장자리, 주변의 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그것은 소음이나 잡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욕망, 사랑, 정동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화음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삶이라는 것은 직분이나 역할, 기능이 대신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저는 사표를 던졌고, 직장생활로부터 완전히 벗어납니다. 펠릭스 가타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도주하는 자의 표현양식에 주목하자”라고. 저는 완벽하게 도주하면서, 그 과정에서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흐름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곁과 가장자리의 흐름에 주목하다
생활하다 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사랑과 정동, 욕망의 흐름이 갖는 따뜻함과 부드러움, 엄청난 상냥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연인의 달콤한 대화, 어머니의 정동노동, 따뜻하게 다가오는 공동체 사람들, 사랑으로부터 활력의 원천을 삼는 활동가들의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군인이다”, “나는 학생이다”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경우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직장인이다”라고 나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지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직장 명함을 내밀며 “○○회사 XX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나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부에 있는 사랑과 정동, 욕망의 흐름은 그저 부가적인 것, 군더더기, 잔여 이미지, 잉여현실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나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구다’라는 정체성이 아닌 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으로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나를 구성하는 원천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저는 그것 이외에 저를 설명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반백수가 된 저를, 누군가는 정상궤도에서 이탈한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삶의 결과 무늬, 색깔, 화음, 향기 등에 주목했던 저는 노동, 직업, 정체성, 직분, 기능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에 진학하고, 프리랜서로 글 쓰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과 신체를 감싸는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에 전념합니다. 물론 그 흐름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문명은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간주했지만, 어느덧 저의 삶에는 나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밥 먹는 것, 친구들과 만나는 것, 세미나 하는 것, 세탁을 하는 것, 여행을 떠나는 것,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등이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요.
이러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스피노자는 삶의 자기원인 혹은 삶의 내재성으로 설명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는 사랑, 욕망, 돌봄, 정동 이외에 다른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사랑, 욕망, 정동이니까요. 이상하지요. 부차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랑과 욕망이 바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이 말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전도되고 뒤집힌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능, 역할, 직분이라는 본질에 가려진, 삶의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서 서식하고 흐르는 사랑, 욕망, 정동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삶의 원인이었습니다.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던 것이지요.
이를테면 저는 오늘 아침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가사노동이라는 기능적인 측면이 아니라, 아내와 저의 사랑의 흐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성역할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기능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서, 아내에게 고마움과 기쁨, 사랑이 배가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식사 후 설거지와 뒷정리를 담당하면서도 그것을 성역할이나 기능분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저의 사랑의 흐름이 서로를 감싸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렇게 우리 곁에 있는 정동과 돌봄, 사랑,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이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감싸 안고, 북돋우고, 생명력과 활력을 주고, 세상과 함께 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흐름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 흐름(flux)을 거시적인 측면에서만 조명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인 흐름, 사회 변화의 흐름 등등. 그러나 저는 미시적인 내 삶에서 흐르는 사랑과 욕망에 주목하게 됩니다. 내가 신은 반질반질한 구두, 내가 입은 잘 다려진 옷, 내가 먹는 음식 등에 사랑과 욕망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게 나를 구성하는 흐름에 주목하게 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같은 것보다 눈에 보이는 자원-부-에너지-화폐의 흐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확실하고, 계산 가능하고, 쓸모 있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자원-부-에너지-화폐의 흐름에 사람들이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하지만 공동체는 보이지 않는 사랑과 정동, 욕망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랑과 정동, 욕망의 흐름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원-부-화폐-에너지의 흐름을 함께 실어 보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돈과 선물과 자원이 움직이지만, 사랑과 욕망이 숨어 있지요. 이것은 공동체가 가진 자원과 부를,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노인을 돌보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흐름이 저를 키웠고, 여러분을 키웠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이 공동체의 순환과 재생의 흐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있게 한 공동체의 돌봄, 사랑, 정동의 흐름을 빼놓고 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흐름과 횡단의 공동체
펠릭스 가타리는 정동, 사랑, 욕망의 흐름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를테면 공동체에서 ‘~도 맞고, ~도 맞다’라는 논리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논리를 흐름의 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의 논리는 상대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합리주의자들에게서 배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흐름의 논리는 ‘진리는 하나’라는 점을 부정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에 다 존재의 이유가 있고,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좀 더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자유로운 흐름과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공동체의 흐름의 논리는 진리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각각의 사람들 모두가 각기 다른 진리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쯤 되면 ‘진리는 단 하나뿐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발끈할 수도 있겠군요.
공동체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서로 양립 가능한 논리가 함께 제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공동체에서 A가 우선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아서 그럴 듯하다고 여기는 순간, 다른 사람이 “공동체에서는 B가 우선이다”라고 그럴듯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참여했던 공동체는 논쟁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다수결이라는 해묵은 해법으로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기나긴 토론을 하는데, 이번에는 C, D, E… 등이 우선이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저는 회의 시간이 길어지는 상황이 짜증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솔직히 졸리기도 했지요. 결국 그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저는 공동체 선배에게 투덜대며 물었습니다. “결론이 없는 회의를 왜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선배는 “우리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고, 저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늘어난 것이니, 그만큼 우리가 다양해진 거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비효율과 느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논리를 모호함, 막연함, 희미함, 주저함으로 독해하고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지요.
주저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협착의 비밀
그 당시 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라는 흐름이 주는 자유, 다양성, 선택의 경우의 수 등을 모호함이나 주저함으로 독해했습니다. 즉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논리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협착의 논리들은 어딘가에 사로잡히거나 예속된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거나 주저하거나 모호한 양가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이중구속(double bind)의 논리’라고 말합니다.
베이트슨은 아버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흔히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넘어서라! 나처럼 되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렇게 쿨하게 얘기하는 자신을 존경해주기를 은근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를 넘어서지도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못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협착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협착의 논리를 베이트슨은 선문답을 하는 노승의 사례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떤 노선사가 제자들 앞에서 지팡이를 들고 불호령을 합니다. “움직이지 마라. 꼼짝하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때릴 것이야!” 그런 다음 “꼼짝 안 하고 있으면 내가 때릴 것이야!”라고 말합니다. 꼼짝하지 말라더니 이번에는 꼼짝 안 하는 사람을 때린다니, 도대체 어느 말을 따라야 하는 걸까요? 이렇듯 두 개의 모순된 발신음이 동시에 수신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게 되는 상황이 선승들에게 화두로 던져집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맞는 답일까요? 답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이중구속은 자신이 협착되어 역능이 무력화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도록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착된 사람은 예속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중구속 논리에 쩔쩔매게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해도 안 되고, 그렇게 안 해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무력감과 좌절감, 멘붕이 찾아오지요.
스피노자는 ‘자유인’과 ‘예속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흐름의 논리를 가진 자유인과 협착의 논리를 가진 예속인을 구분합니다. 자유인은 신체와 정신의 능력이 상승하여 기쁨의 정동을 갖게 되고, 예속인은 협착과 무능력으로 인해 신체와 정신의 능력이 감소하여 슬픔의 정동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라는 흐름의 논리를 갖는 것과, 예속집단이 금기와 터부 앞에 협착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예속의 논리를 갖는 것 사이의 간극은 큽니다. 결국 공동체가 상대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흐름의 논리가 갖는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를 포기하고 이중구속에 따라 사로잡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명에 예속된 사람들과 자유인의 해방전략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심원합니다. 즉 우리는 “예속인이 될 것인가? 자유인이 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스피노자는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의 진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한동안 일중독이나 강박적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보고서를 쓰듯이 죽을힘을 다해 발제문을 썼고, 대학원 지도교수를 회사 사장처럼 대하기도 했지요. 직장에 다닐 때의 습성을 어떻게 버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직장인들의 보고서나 기획서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저의 마음은 여전히 직장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스피노자는 거짓된 관념의 힘에 사로잡힌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참된 관념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즉 슬픔을 기쁨이 이기기 위해서는 슬픔보다 더 강렬한 기쁨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저는 직장에서 생긴 해묵은 관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좋아하는 철학책들을 미친 듯이 읽고 새벽까지 온라인 채팅방에서 난상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땐 날을 새며 공부를 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직장에 대한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지요.
그 후 20세기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리는 펠릭스 가타리의 치유의 방법론을 공부하고 나서야 저의 방법론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가타리는 정신분열증이라는 협착되고 이중구속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이중구속의 논리에 얽매인 협착분열,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논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삶의 자기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정신분열증자가 무언가에 협착되어 정신이 온통 옭아맨 상태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들, 예를 들면 가게에 가거나, 손을 씻는다거나, 머리를 깎는다거나,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하는 전혀 다른 활동에 도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소한 재활의 노력이 이중구속의 논리로부터 벗어난 삶의 자기원인을 구축하고 자기결정력을 높이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두 번째 방법은 협착되고 사로잡힌 나머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훨씬 뛰어넘어서 예술, 과학, 혁명에 미치는 에너지와 힘을 통해 스스로 치유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에너지와 힘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음악, 미술, 춤, 맛, 표정, 향기 등에서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는 소재를 찾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며, 이에 따라 훨씬 강렬한 에너지와 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펠릭스 가타리는 분열생성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미친 사람보다 더 미쳐야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자의 미침이 협착분열이라면, 후자의 미침은 창조와 생성의 미침, 즉 분열생성입니다.
삶의 배치를 재배치할 정도의 강렬한 에너지와 역능을 찾아야 하고, 그 에너지를 예술, 과학, 혁명의 창조와 생성의 힘으로 만들 때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생각,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 분열생성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삶의 배치를 재배치할 정도의 강렬한 에너지와 역능”을 찾으라니…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 미션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가타리가 추천하는 방법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소소한 삶의 표현 소재들, 즉 음악, 미술, 춤, 향기, 맛과의 접촉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 그리고 가족, 연인, 친구를 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완전히 색다른 방식으로 관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과 정동, 욕망의 흐름이 갖는 힘과 에너지에서부터 그 원천을 찾는 것입니다.

사진 출처 : Kelsey Chance
스피노자는 “증오가 사랑으로 바뀔 때 더 큰 사랑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협착됐을 때의 무능력이 슬픔과 증오의 의미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때 더 큰 에너지가 생겨서 사랑으로 바뀔 수 있다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그래서 협착분열이 분열생성으로 바뀔 때 더 큰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스피노자의 ‘기쁨과 사랑의 힘’과 ‘슬픔과 증오의 힘’의 에너지 동역학적인 관계는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물론 증오의 힘이 갑자기 사랑의 힘으로 변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가능성 중 하나이니까요. 그런 실낱같은 가능성을 열어두더라도 증오의 힘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진 사랑과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유와 해방의 전략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4부 「인간의 예속 또는 정서의 힘에 대하여」에서 ‘자유인의 해방전략’에 대해 말합니다. 사랑이 증오를 이기고 영원히 승리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에 찬 음성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는 사랑과 , 욕망이 갖고 있는 힘과 에너지가 협착의 분열로부터 흐름의 분열로 돌연변이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그의 말이 ‘지금-여기 가까운 삶에서부터 해방과 자유를 만들어라’는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 바로 자유의 기반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자유인의 해방전략은 어떻게 하면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 것인가의 숙제도 우리에게 남기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