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기, 꽃과 나비의 사랑
아내와 저는 늘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서 출근하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우주 되기처럼 합일의 사랑이 가능할까?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같아지는 것일까? 아니면 같아질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일까?

어느 봄날 어느 도서관에서 특강할 때 “되기는 사랑인데, 합일의 사랑은 아닙니다. 이유가 뭘까요?”라고 청중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청중 가운데 한 분이 소와 호랑이의 사랑의 비유를 들더군요. 소는 호랑이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물을 계속 가져다주고, 호랑이는 소에게 고기를 계속 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현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이 떠올랐지만, 많은 힌트와 영감을 주는 답이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르키데와 말벌의 비유를 들어 사랑을 설명합니다. 즉 난초과 식물인 오르키데는 말벌 암컷 모양의 꽃을 피워 수컷 말벌을 끌어들이고, 말벌은 모의성교를 통해 꽃가루를 옮김으로써 난초의 일부가 됩니다. 분명 오르키데는 말벌 되기를 합니다. 말벌 역시 오르키데 되기를 합니다. 그러나 난초는 말벌일 수도 없고, 말벌도 난초일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되기이며, 도달할 수 없는 수렴점을 향해 끊임없이 평행선을 달리며 진행되는 시간의 수평선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점은 아내를 사랑할수록 미세한 차이에 더 민감해지고, 서로의 마음 위로 더 많은 다양한 것들이 생성될 여지가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저는 한겨울에도 찬물을 마시는데 아내는 따뜻한 물을 좋아합니다. 그런 아내를 위해 저는 항상 식사 전에 물을 끓여둡니다. 그리고 아내와 저는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음식도 있지만 선호도가 다른 음식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식탁에 차릴 때는 아주 섬세한 배치의 예술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에서 절박한 사랑의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점점 더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이 표면 위로 드러나면서 표현되는 것을 느낍니다. 서로에게 잠재되었던 아이, 동물, 식물, 자연, 생명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노는 것만 같으니까요.
둘이 서로 사랑하면 공유 지점이 커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원다이어그램으로 그것을 쉽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진동 폭과 리듬, 박자를 가진 진동자와 같습니다. 두 진동자가 울리면 울림은 떨림이 되어 미세한 음들이 화음을 이룹니다. 그 과정에서 더 미세한 음들이 발생하고 신시사이저 같은 다양한 음들의 하모니가 울려 퍼집니다. 결국 사랑은 공감이 아니라 화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시사이저가 되는 것이 사랑할수록 달라지는 것의 비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 안의 내재성의 지평이 더 넓어지고 아주 복잡한 존재가 되는 것이랄까요?
되기, 사랑할수록 달라지는 것
먼저 헤겔과 같은 철학자는 동일성의 철학을 기반으로 사랑할수록 같아진다는 논리를 폅니다. 이에 따라 사랑도 보편적인 사랑으로 선을 긋습니다. 영원한 사랑, 어머니의 사랑, 신에 대한 사랑 등이 그 예이지요. 서로가 쉽게 합일하고 일치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건 결국 나와 생각이 같을 것이라는 점이 보편주의에 따른 논리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지극히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인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하거나 평가할 수 없지만, 합일과 일치가 그렇게 단숨에 가능하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정신적 합일에 입각한 보편적인 사랑을 추구한 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질서와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이념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결국 여기에 기반하여 국가주의 사상이 등장하게 됩니다. 국가 혹은 지도자에 대한 종교적인 추앙, 그 극단이 파시즘으로 향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이러한 보편주의에 따르는 사랑은 결국 특이성을 억압하고, 몰개성화하고, 차이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지배질서 이념의 기초가 됩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공통관념이라는 개념에서는 사랑할수록 닮아지는 공동체나 공통성(common)이라는 논리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공통성은 동일성과 달리, 사랑할수록 닮아가지만 분명 차이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이를 억압하거나 단조롭고 편편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보편적인 사랑처럼 ‘사랑하면 같아진다’는 논리가 모든 영역에서 적용된다는 식의 방법론이 공통성에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공통성은 지극히 국지적인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공동체는 둘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성의 철학과 같은 국가주의의 철학이 구사하는 “사랑하면 같아진다”는 논리와, 공동체의 철학에서 구사하는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논리는 유사하게 보일 수 있지만, 심원한 차이를 갖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공통성의 영역은 공통의 아이디어, 생태적 지혜, 집단지성, 공유자산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사랑은 국가주의나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논리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스피노자의 특이성이라는 개념은 “사랑할수록 달라지는 것”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을 바꾸는 모델 가운데는 의견 차이를 최소화하고 단일전선에 집중시키는 모델이 있는가 하면, 공동체의 차이와 다양성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모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욕망은 공동체의 차이와 다양성을 더 다양하게 만드는 원천입니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사랑을 욕망이라고 할 때, 고정된 정답이 아닌 욕망이 던지는 문제 제기이자 질문이기 때문에 비스듬하게 편차를 가지면서 반복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늘 차이 나는 반복이나 비스듬한 경로의 행동양식, 사랑의 편위운동을 만들어냅니다. 이에 따라 사랑할수록 달라진다는 말은 결국 사랑과 욕망이 미세한 차이와 결과 무늬의 변화, 신체변용, 사랑의 카오스를 일으키는 것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사랑할수록 닮아간다”와 “사랑할수록 달라진다”의 두 영역 사이에 있습니다. 즉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이라는 구도, 즉 차이와 다양성에 따라 더 풍부하고 다양해지는 공동체가 바로 스피노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이러한 스피노자의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를 더 혁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특히 가타리는 연대할수록 달라지는 구도를 통해서 ‘차이를 낳는 차이’라는 색다른 차이의 구도를 보여줍니다. 즉 공동체가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2차적 차이인 색다른 주체성을 생산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나 발상, 공통의 것을 생산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타리는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으로서의 공동체’라는 스피노자의 구도를 더 전진 배치하여 ‘차이를 낳은 차이로서의 공동체’로 나아갑니다. 이를 ‘특이성 생산’이라고 요약하지요.
되기와 이기
근대사회는 나와 그것(it) 사이의 구분을 통해 자아와 대상, 주체와 객체를 정확히 구분했습니다. 이것이 ‘이기(being)’입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되기(becoming)’는 갑자기 그 접촉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희뿌연 구름과 같은 영역이 만들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되기는 사랑이자 흐름입니다. 되기는 존재를 이동시켜 나와 너의 구분마저 사라지는 신체변용의 양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존감, 자긍심, 자립 등 자아의 정립과 관련한 담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아와 관련된 무경계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강건한 자아가 뭉개진 채 무심결에 살아가고, 미디어에 무심결에 조종되고, 무비판적으로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수용자적 태도를 의미할까요? 그런 무경계 상황을 흐름의 상태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즉 나와 너의 구분은 기본 전제가 되지만, 나와 너 사이에 강렬한 사랑의 흐름이 생겼을 때 그 수평적인 상태 속에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주체성(subjectivity)이나 공통성(common)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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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되기’는 직분, 역할, 책임, 기능, 믿음을 바탕으로 한 나, 너, 그의 책임주체와는 다른 궤도를 그립니다. 나와 너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욕망의 흐름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신체를 변용시키는 능동적인 신적 속성입니다. 신적 속성이라고 해서 형이상학적이거나 영성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본질의 가장자리에 있는, 신체의 표면에 잠재되어 있는 흐름이 활성화되어 활력과 생명 에너지가 발생하고, 둘 사이에서 전혀 다른 ‘우리 중 어느 누군가’가 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되기는 결국 사랑할수록 달라지는 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입니다. 사실상 나는 너와 차이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차이 나는 색다른 영역인 2차적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나와 너의 차이는 더 미세해져서 식별 불가능하고 지각 불가능한 변화, 즉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심원한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우리는 간혹 되기의 질문을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던지곤 합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하니?” 상투적인 질문에 아이는 얼굴을 찌푸립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은 조금 생각하고 나서 연예인, 공무원, 의사, 변호사 등 어른들이 알려준 직업을 말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되기의 질문은 “너는 뭐가 좋으니? 어떤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니”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약간 상기되어 “동물이 참 좋아요”, “게임이 좋아요”, “글 쓰는 게 정말 좋아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커서 수의사나 게이머나 작가가 될 수도, 혹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 아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게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되기의 질문은 사랑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되기를 물으면서도 사실은 이기로서의 직분, 직업, 직능에 대해서 물어왔던 것은 아닌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되기는 사랑이자, 흐름이자, 욕망의 질문입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니”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내가 누군지?”, “여기는 어딘지?”라는 질문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바로 삶의 내재성을 구성하는 사랑과 욕망의 일관된 흐름, 마그마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의 ‘되기’와 ‘이기’의 전통
철학의 전통에서 되기(=사랑=흐름)의 전통과 이기(존재)의 전통은 구분됩니다. 되기는 사랑할수록 달라지는 것, 즉 ‘특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되기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야기꾼도 되고, 가수도 되고, 춤꾼도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기는 정체성으로서의 직업, 직분, 역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직업상 연예인이어서 이야기 전문가 역할을 하고, 직업상 가수였고, 전문 댄서였던 것입니다. 되기는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 창조하는 특이한 행동양식, 너와 나 사이의 주체성 양식입니다. 아마추어 같지만 만나면 웃음이 자꾸 나오고, 괜히 진지해져서 실수만 하게 되는 것이 특이성이 서식하는 관계망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정체성 영역에서는 이런 건 상상도 못하지요. 한 번 실수는 치명적이고, 전문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잘 해내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의 사랑과 욕망의 흐름은 되기이며, 공동체를 작동시키는 것도 되기입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를 작동시키는 것은 직업을 가진 전문가들이 만든 이기입니다.
되기의 전통은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시작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면서 불가역적인 변화와 흐름의 행렬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것은 역사와 시간의 무의식적인 흐름의 행렬과도 같은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불의 흐름과 순환이 세상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피력했지요.
이러한 흐름과 되기의 사상은 스피노자로 계승됩니다. 스피노자에게는 신체변용의 능동적인 신적 속성으로 묘사됩니다. 스피노자의 되기 사상은 빠름과 느림에 따라 변이를 겪는 이상한 신체의 양상을 얘기합니다. 그것은 그저 속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변용의 양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변용의 가속과 감속에 따라 변이되는 신체는 어쩌면 유기체와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관들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창안합니다. 소화기관, 감각기관, 운동기관 등의 기관들이 정해진 역할을 맡아서 각각 유기적으로 움직임으로써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루는 유기체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도 정해진 기능을 맡지 않은 상태로 언제든 손가락이나 코가 되어서 튀어나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신체가 바로 기관들 없는 신체입니다. 이처럼 되기를 일으키는 신체는 실험적인 신체와 같다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입니다. 즉 어떤 특이성으로 변모할지 모르는 다양체이자 비유기체적인 신체의 양상이 그것입니다.
‘이기’의 전통은 존재의 전통으로 불려왔고, 플라톤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 늘 변화하고 거짓된 이 세상의 이면에, 고정되고 영원한 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플라톤은 어떤 변화도 없고, 원형이며, 원본인 질서를 ‘이데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이데아 사상은 고정불변한 것을 추구하는 현존 문명을 만들어낸 고정관념이 됩니다. 변화하거나 변용되지 않는 신체를 이상적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무엇다움, 무엇임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능이나 역할, 직분을 가진 전문직업인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정체성이 바로 이기입니다.
플라톤은 기능과 역할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의 상, 즉 이데아를 꿈꿉니다. 그리고 국가를 떠받치는 고정관념, 즉 존재와 정체성 사상을 계속 생산해내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것에 답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답을 아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는, 자본과 국가로 이루어진 현존 문명을 떠받치는 시녀들입니다. 이기 사상은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 만들어낼 창조와 생성의 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힘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굉장히 보수적이고 반동적이라고요? 맞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서 시원한 물을 좀 마시고 와야 할 것 같네요.
성공주의가 아닌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
공동체에서의 사랑과 욕망의 흐름은 늘 낮은 곳으로 향합니다. 즉 소수자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생태계는 다양성으로 만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반대편인 다수자의 방향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공주의일 수밖에 없고, 다들 알다시피 성공의 피라미드는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집니다. 결국 ‘의자 뺏기 놀이’와 같은 생존경쟁으로 치달아가고, 생태계는 점점 획일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되기는 소수자 되기여야만 우리 모두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되기가 성공주의와 승리주의를 향한 맹목적인 충동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잘 포장된 성공신화가 민중을 현혹해왔습니다. 사람들은 앞만 보면서 효율적으로 달려갔지만,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외롭고 고달프고 고독한 개인’으로 와해되고 해체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듯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성공주의, 승리주의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통해 천천히 발효되고 성숙되는 것이 공동체에서의 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되기라는 스피노자의 신체변용은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과제에 대한 하나의 답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아직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지 잘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에서의 되기를 통해 가수도 되고, 춤꾼도 되고, 이야기꾼도 되는 특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공동체의 사랑은 되기의 흐름을 감속시키거나 가속하여 특이성을 만개시켜 풍부하고 다양한 몸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랑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시대에도 사랑이 참 어려웠나 봅니다. 스피노자의 사랑은 신체변용으로 표현되지만, 정작 스피노자 자신은 독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신자로서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욕망이 그렇게 큰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스피노자는 작은 사랑, 보이지 않는 사랑, 생명과 자연의 미세한 변화가 주는 사랑에도 신체변용을 느꼈을 테니까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연애로서의 사랑이 성립하려면 남성의 여성 되기와 여성의 여성 되기가 만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성조차도 여성 되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성 되기는 사랑과 n개의 성의 관문입니다. 즉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여성성/남성성이라는 성성향(sexuality)이 위치해 있으며, 세상에는 정체성으로서의 남성/여성이 아닌 소수자로서의 n개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여성 되기의 내용입니다. 누구도 다수자 되기를 통해서는 사랑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면에서 남성 되기는 사랑의 영역이 아니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합니다. 소수자 되기라는 낮은 곳을 향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과 욕망의 흐름, 즉 되기의 진실인 셈입니다.
우리는 아직 스피노자의 아포리즘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말이지요. 공동체의 판과 구도는 우리를 특이성으로서 재창안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다양체이며, 기관들 없는 신체가 뛰어노는 삶의 내재성의 평면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피노자의 질문에 대한 최대한의 대답을 해보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