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가는 가악의 시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은 신라의 세 번째 왕이다.1 34년간 임금 노릇을 하였다. “5년(서기 28) 겨울 11월,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돌아보다가 한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아,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곳곳마다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늙고 병들어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鰥寡孤獨老病不能自活者]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 부양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웃나라의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옮겨 오는 이들이 많았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歡康]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2 이 기록에 의하면 유리 이사금은, 소위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의 삶을 보살피는 좋은 통치를 베풀었다.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신라로 옮겨 왔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치적이다.
한편 여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歡康]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民俗歡康 始製兜率歌]” 라는 글이 들어있다. 그런데 도솔가는, 이 이름 만 전할 뿐, 『삼국사기』에 도솔가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도솔가에는 차사와 사뇌격이 있었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제3대 노례왕’3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이 당시에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는데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始作兠率歌 有嗟辭詞腦格]”4
『삼국유사』에도 도솔가라의 가사는 보이지 않지만. 이 노래의 내용 혹은 성격을 설명하는 듯한 차사와 사뇌격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이 단어들의 의미에 관한 다양한 설들 가운데 가장 단순하며 기초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차사(嗟辭): 구절.5 슬픈 마음을 표현하는 감탄사.6 슬픔을 표현하는 말로 ‘아으’와 같다.7
• 사뇌격(詞腦格): 격식.8 감탄사를 가진 10구체의 향가.9 사뇌가라는 노래 장르의 격식으로, 마지막 구절이 ‘아으’ 따위의 차사로 시작됨.10
여기에 보이는, ‘아으’ 따위의 차사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과는 다르게,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歡康]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그런 차사가 슬픔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찬탄의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11 이는 고려가요에 보이는 ‘아으’를 슬픔이나 한탄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것과도 부합된다.
‘사뇌격’이라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편찬되던 고려 시대 사람 혁련정(赫連挺)12이 “뜻이 사에 정밀한 까닭으로, 뇌라 한다[意精於詞, 故云腦也]”13라고 한 것을 근거로 하면, 고려 시대에 사뇌란 말은 항상 청(淸)·정(精)·려(麗)·찬(讚)·아(雅)·고(高)·가(嘉) 등의 의미 범주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14
이제 『삼국유사』, 「기이」 제1, ‘제3대 노례왕’으로 돌아가 “始作兠率歌 有嗟辭詞腦格”를 번역하여 보자.
① “이 당시에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는데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15
② “비로소 (왕의 선정과 시절의 승평함에 대한) 지족(知足)의 노래[두률가(兜率歌)]를 지으니 찬미하는 말[차사(嗟辭)]로 사뇌[청(淸)·정(精)·려(麗)·찬(讚)]로운 격조가 있었다.”16
『삼국사기』에는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歡康]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라고 적혀있다. 『삼국유사』에는 ① 또는 ②라고 번역될 수 있는 설명이 적혀있다. 이들을 참조하면 도솔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만들 수 있다.
유리 이사금 시대에 누군가가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당대 백성의 즐겁고 편안함을 찬탄하는 것으로써 깨끗함[청(淸)]과 순수함[정(精)]과 아름다움[려(麗)] 등의 격조가 있었다.
신에게 바치는 제의를 넘어서
앞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볼 수 있는 도솔가에 대한 설명을 실마리로 그 낱말의 뜻을 정리하여 보았다. 그 결과는 누구에게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 너머로 추정을 전개하였다. 도솔가라는 낱말의 의미에 관한 추정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① 덧소리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신에게 제사 올릴 때 부르는 노래[제신가(祭神歌)]다.
② 도살푸리/살푸리’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신이 부르는 노래 아니면 신에 관한 음악[신악(神樂)]이다.
③ 도릿소리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일본에 전해진 고려악무인 도리소[조소(鳥蘇)]와 같은 음악으로 신성한 곳에서 하는 음악[신악(神樂)]이다.
④ 두률이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두레노래[농악(農樂)]의 원류다.
⑤ 조리(朝離)/주리(侏離)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동이악(東夷樂) 가운데 하나로 즐겁고 편안함[환강(歡康)]을 노래하는 것이다.
⑥ 도살놀애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소생(蘇生)/재생을 노래하는 것이다.
⑦ 다ᄉᆞᆯ놀애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치리(治理)/안민(安民)을 노래하는 것이다.
⑧ 돗놀애/도리놀애/두리노래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 여기에서 돗/도리/두리는 나라의 수도를 뜻하니, 도솔가는 나라의 수도에서 불려진 노래 아니면 나라의 수도를 찬양한 노래[국도가(國都歌)]이다.
⑨ 다리/ᄃᆞᆯ이라는 후렴이 포함된 노래의 이름인 ᄃᆞᆯ이놀애라는 고유어를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다.17
⑩ 도솔가라는 이름은 유리 이사금[노례왕] 당대에 통용되던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편찬되던 고려 시대의 불교적 교양인들이 만든 것이다. 유리 이사금[노례왕] 시대 사람들이 즐겁고 편안한 세상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음을 기록할 때, 그 노래의 내용과 성격이 마치 불교의 이상세계인 도솔천을 찬양하는 것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고려 시대읜 독자들에게 전달되도록, 그 노래의 이름을 도솔천의 노래 즉 도솔가라고 적었을 것이다.18

①~③은 도솔가를 종교적인 노래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록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民俗歡康 始製兜率歌]”라고 한 것을 보면, 노래의 주제가 종교적인 것이 아닌 듯하다. ⑤~⑦ 특히 ⑤는 노래의 주제 특히 기록 속의 즐겁고 편안함[환강(歡康)]이라는 말에 주목한 듯하다. ⑧은 노래가 유행한 곳에 주목한 설인 듯하고, ⑨는 고려가요 〈동동〉의 후렴구인 “아으 동동다리” 따위에서 볼 수 있는 ‘~다리/~ᄃᆞᆯ이’에 주목하여 노래의 형식을 논한 것인 듯하다. ⑩에서는 도솔가라는 낱말이 고려시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지만, 그런 이름의 노래가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백성들의 즐겁고 편안한 생활이라는 내용을 잘 담아내기 위한 모색의 산물이라고 본 듯하다.
도솔가 전이라도 신라에 노래가 없었을 리 없다. 아마 종교와 관련된 노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 의례에는 음악이 수반된다. 궁극적 실재와 관계를 맺는 데로 초점을 맞추어도 마찬가지이다. 그 관계 설정에는 음악 특히 노래가 심심치 않게 끼어들어 왔다. 신라가 건국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종교의례나 궁극적 실재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환경을 고려하고 보면, 유리 이사금 집권기에 즐겁고 편안한 백성의 생활이 노래 생성의 배경이 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사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도솔가 류의 노래가 유행한 시기에 종교에 대한 인간의 기속력(羈束力)은 미세하게 약해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때 노래 가사는 점차 궁극적 실재[신]보다는 사람의 생활을 화제로 삼는 것으로 조금씩 옮겨갔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이러한 현상을 포착한 사람들은 이 노래의 형식을 “종교적 의식의 축사(祝詞)와 서정요의 중간 형식”이라고 평가하고 이 노래를 “그때까지 전래해온 주교적(呪敎的)·집단적인 것이 아닌 새로운 서정적 민요” 혹은 “낡은 가악인 신요(神謠)에서 종교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순수하게 민중의 환강이라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춘 가요”라고 규정하고자 하였다.19
첫 번째 노래의 또다른 얼굴
그러나 이 첫 번째 노래는 두 얼굴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노래는 “동양적 예악사상에 입각해 의도적으로 제작되어 궁중의례에서 연주된 최초의 정풍(正風)가악에 사용된 노래”, “왕이 친제(親祭)하였던 국행제의(國行祭儀)에서 불려진 제악(祭樂)으로서 왕가가 제정한 최초의 가격(歌格)”, “국가의 기반을 수립하는 시기에 야기된 여러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거행된 제의 곧 민속환강을 구하는 기축(祈祝)의 제의에 쓰인 최초의 가악”20 등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을 가능하게 한 단서는 『삼국사기』의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歡康]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民俗歡康 始製兜率歌]” 라는 글에 들어있는 제(製:짓다)라는 글자일 것이다. 이는 이런 노래를 만든 주체가 뚜렷함을 시사한다. 만약 생(生:생기다)이 제(製)의 자리에 있었다면 “도솔가가 생겨나서 퍼졌다”고 번역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도솔가는 지배집단이, 피지배자들이 사실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즐겁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를 원하여, 일부러 만들어 나라의 수도[국도(國都)]에서부터 시작하여 널리 퍼뜨리려 한 노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본다면 도솔가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기 위한 선전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 노래에 즐겁고 편안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담았다면 그것은 피지배 집단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이 노래에는 다른 얼굴도 있다. 일단 이 노래는 신에게 바치는 제의를 넘어서 생에 대한 관심을 담았다.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굳이 ‘가악(歌樂)의 시초’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 노래를 지칭한 것도 이런 남다름에 주목한 결과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노래를 짓고 유포시켜 지배 이데올로기를 피지배 집단에 의식화시키고자 하였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환상일지언정 즐겁고 편안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었을 것이고, 그런 환상을 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환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욕이 저도 모르게 자라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노래를 접하며 산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과는 다른 세계상을 꿈꾸며 일종의 자기 전환을 했을 것이고, 세월이 흐른 후, 그 환상의 일부는 실현되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전환을 했던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 세대의 일부가 그 실현된 환상을 누렸을 것이다. 먼 과거의 잔재들 속에서 어떤 노래를 건져 올려, 거기에서 이러한 환상과 의욕을 포함한 노래의 유전(流轉)을 읽어낼 수 있다면, 역사 인식은 더 깊고 의미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리 이사금 [儒理尼師今]’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에 따르면, 재위기간은 AD 24년 ~ 57년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유리 이사금’ ↩
[네이버 지식백과] ‘제3대 노례왕 [第三 弩禮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
『삼국유사』,「기이」 제1, ‘제3대 노례왕’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도솔가를 짓다’ ↩
[네이버 지식백과] ‘제3대 노례왕’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도솔가를 짓다’, 각주 451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도솔가를 짓다’ ↩
[네이버 지식백과] ‘제3대 노례왕’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도솔가를 짓다’, 각주 451 참조 ↩
박재민, 「“두률(兜率), 사뇌(詞腦), 차사(嗟辭)”의 어의(語義)에 대한 소고(小考)」, 『고전문학연구』 43, 한국고전문학회 2013, 3~31쪽 참조. ↩
혁련 정(赫連挺: 생몰년 미상)은 고려 문종~예종 때의 학자로, 『균여전』을 지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혁련(赫連)’은 흉노 계통의 성씨이다. 《위키백과》 ‘혁련정’ 참조. ↩
혁련 정은 자신이 편찬한 『균여전』의 ‘제7 노래로서 세상을 교화함[第七歌行化世分者]’에서 균여가 사뇌에 익숙하였다고 쓴 후 사뇌를 “意精於詞, 故云腦也”라고 설명하였다. ↩
박재민, 「“두률(兜率), 사뇌(詞腦), 차사(嗟辭)”의 어의(語義)에 대한 소고(小考)」, 『고전문학연구』 43, 한국고전문학회 2013, 3~31쪽 참조. ↩
『삼국유사』,「기이」 제1, ‘제3대 노례왕’ ↩
박재민, 「“두률(兜率), 사뇌(詞腦), 차사(嗟辭)”의 어의(語義)에 대한 소고(小考)」,, 『고전문학연구』 43, 한국고전문학회 2013, 3~31쪽 참조. ↩
박재민, 「“두률(兜率), 사뇌(詞腦), 차사(嗟辭)”의 어의(語義)에 대한 소고(小考)」, 『고전문학연구』 43, 한국고전문학회 2013, 3~31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