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익숙한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면 얼마나 내 삶이 자본주의의 편리함에 쉽게 길드는지를 체감하기 어렵다.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의 가치와 이런 관계망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갖고 살아간다. 생태적지혜연구소를 만나게 된 계기도 이런 마을, 공동체와의 접점을 원했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내 생활이 오롯이 그 가치와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평범한 도시 생활자로 살아가다 보면 여전히 소비를 좇고, 거기서 얻는 만족감의 효능을 한껏 느끼는 욕망도 내 삶의 일부다. 신쌤은 자본주의 욕망이 가진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 욕망 경제는 통속적인 환상 소비를 통해 고립되어 있는 개인들의 열악한 상태를 버티게 만들어주고 재미있게 해주지만, 특이한 욕망을 생산하고 순환시키는 생명 에너지로서의 욕망을 관계 속에서 유통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서툴게 만들고 부조화스럽게 만듭니다.”1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신에 노출되어 사는 동안 욕망하고 사랑하는 방법 역시 거기에 흠뻑 빠지기 쉽다. 아무리 이런 삶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몸부림치지만 익숙해져 버린 물신주의 사회에서 희구(希求)하는 삶을 제대로 추구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신쌤의 말처럼, “물신화된 상품 세계는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 따라 선물을 교환하는 것과 달리, 사랑과 욕망에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환상의 요소를 필요”2로 하고, 그 환상은 소비 생활에서 충실히 환영받고 있다는 구조물로 드러난다. 자신이 바라는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이나 고요한 접근을 차단하는 환상(이미지)은 결국 소비와 향유 속에서만 삶을 즐기라고 부추긴다.
편집부의 배려로 한 달간의 휴식을 가졌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매달 밀려오는 마감 압박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그 압박(?)이 만들어내는 시선과 고민이 있었다는 점도 발견했다. 소울컴퍼니 연재를 쉬는 동안 열두 편, 일 년 동안 연재한 글을 다시 읽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스쳤다. ‘내가 이렇게도 썼었구나.’, ‘저런 표현은 도대체 왜 썼지?’하고는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기도 했다.
글쓰기는 내게 어떤 행위일까. 사유의 배설물일까, 헛헛한 마음의 환기구일까, 아니면 어떤 각오나 증명일까. 때로 써놓은 글 자체가 말의 성찬 같아 지레 주저할 때도 있고, 비장한 삶의 결기를 한껏 글 앞에서도 무기력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늘 상대가 있어야만 할까.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생각, 어떤 특정인이 내 글을 읽고 만족하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 때도 있다. 몇 장 되지 않는 글을 쓰는데도 글쓰기의 괴로움과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중에서 글쓰기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실은 내 생활과 글이 동떨어져 있을 때의 ‘쓸모없음’의 감각이다. 글을 뒤받쳐주지 못하는 글은 오래 못 간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글을 써야만 한다는 강조나 강박은 아니다. 글을 쓰면서 몸소 경험하는 ‘부대낌’이라고 표현으로 전해지면 좋겠다. 이 글이 나를 추구하는 삶으로 하루아침에 이끌지는 못할 텐데 굳이 쓸 필요가 있는지, 글로만 번지르르하게 써놓으면서 바뀐 것이 없는 삶은 위선이 아닐지에 대한 부대낌이 버거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이유는 글쓰기가 내 생활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힘이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읽고 쓰는 일로 나의 부끄러움만을 하염없이 드러낸다거나 어떤 당위를 핑계 삼아 명분으로 가득 찬 논리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마냥 염세적이고 감상적인 글만 쓰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속은 작고 조용해 잘 드러나지 않더라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한 좋음과 나쁨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고민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적절한 몇 마디를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또 글을 쓰면서 만나는 사람들, 글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 글 안팎을 넘나들며 새로운 가능성을 몸소 지어갈 기회를 엿보기도 한다.
사숙(私淑)하는 마음으로 모신 글쓰기 선생님 몇 분의 글을 읽는다. 동시대인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공통점은 그 누구도 실제로 만나보지는 못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미국 출신의 작가 수전 손택(Susan Sontag)도 있다. 손택은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없는”(조너선 콧) 글을 쓰는 작가이자 날카로운 비평가로 알려진 작가다. 손택은 자신의 글쓰기가 가능했던 것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피의 수혈과 자양분, 영감”의 필요를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저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하고 새로운 자양분과 영감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제 정체성과 다른 것들을 제가 좋아하고, 또 저 자신이 아닌 것들, 제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려 애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3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새로운 가치, 신쌤의 표현으로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냥 외면할 수 없는 괴로운 욕망을 자연스러운 순환과 재생을 통해 진정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찾을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란 “글 쓰는 행위”로 내 욕망을 무조건 거스르거나 억압하기보다, 현실에선 예측하기 힘든 새로운 구조와 태도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란 내가 남길 증거물도 아니고, 팔아야 할 물건도 아니다. 다만, 모든 게 값이 매겨진 채 상품화된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과, 정성, 인격이 담긴 실체를 만들어가는, 그 일을 단어와 문장으로 깁고 더하는 행위다. 동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때론 위선으로 들리는 세상에서 조금 더 버틸 지혜와 우정을 마련하는 몸부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따금 비문과 비약이 발견되더라도, 좀 더 나아지는 과정에서 긴 호흡으로 쓰기를 이어가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인용할 손택의 말처럼, “다 쓰고 얘기한 내용에 동조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아까 작가의 사명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라고 말했지만, 저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바 작가의 소명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끝없는 작업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하는 일이죠. 아무리 해도 허위나 허위의식이나 해석의 체계를 끝장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중략) 착시와 허위와 선통을 파괴하려고 애쓰는, 그래서 만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해요. 만사를 더 단순하게 만들려는 불가피한 기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라면 아마 내가 이미 다 쓰고 얘기한 내용에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게 아마 날 그 무엇보다 불편하게 만들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는 뜻일 테니까요.”4
*참고문헌
– 신승철, 『욕망 자본론』, 서울: 알렙, 2014.
– 수전 손택, 조너선 콧, 『손택의 말』, 김선형 옮김, 서울: 마음산책,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