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긴 추석 연휴를 맞이하기 며칠 전이었다. 전북 녹색당 소속 콩알 님이 지역 커뮤니티 톡방에 12.29 무안공항-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179분의 넋을 기리는 추석 합동 차례에 함께 갈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참사 직후 몇몇 동지들이 무안공항으로 향할 때도 함께 가지 못했다. 윤석열 탄핵 집회 공간에 세워진 분향소에 방문하지도 못했다. 이제라도 다녀온다면 그동안 마음을 짓눌렀던 부채감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콩알 님께 같이 가자고 연락했다.
공항에 들어가다
추석 당일 이른 아침에 콩알 님과 전북녹색연합 김지은 사무국장님과 함께 무안으로 내려갔다. 연휴 때문에 차가 많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하행선이라 많이 막히지 않았다. 국도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무안-광주 고속도로로 갈아타며 2시간 30분 정도 달렸을까, 점심 무렵 무안-광주 고속도로 끝에 있는 무안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참사 이후 공항 운영이 중단됐기에, 차 몇 대 정도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무안국제공항이라 적힌 간판 아래로 셀 수 없이 많은 파란 리본이 공항 난간에 묶여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리본들이 흩날렸다. 문정현 신부님을 포함한 군산 수라갯벌을 살리기 위해 활동하는 동지들은 이미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처음 뵙는 분들이 많았는데, 콩알 님이 내 소개를 해주셨다. 문정현 신부님은 인사드리자마자 먼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셨다. 많이 연대하지 못했는데도 환대해 주셔서 감사했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자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처음에는 공항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맡으면 맡을수록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반적으로 건물 안에서 나는 냄새보단 어떤 약을 뿌려서 나는 냄새 같았다. 지은 님도 얼굴을 찌푸렸다.
“약 냄새 비슷하지 않아요?”
“플라스틱 냄새 같기도 한데. “
주위를 둘러보다 자연스럽게 벽으로 눈길이 갔다. 국가트라우마센터에서 만든 포스터가 벽면마다 붙어있었다. 잘 자는 방법과 올바른 애도 방법을 알리는 포스터를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여기가 참사 현장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차례를 지낼 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공항을 둘러봤다. 공항 안은 빈소를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전라남도 관광안내소나 카페 같은 편의 시설이 없는 건 아닌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기다리던 시설들이 텅텅 비었다. 1층에 편의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방문객들이 드나들면서 먹을 걸 사갔다. 여기가 열려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점심밥을 먹기 위해 공항에서 멀리 나가야 했을 거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무지개색 편지가 가득 묶여 있었다. 한 계단씩 올라가며 편지를 눈으로 훑었다. 편지에는 참사를 겪은 이들을 향한 기억과 추억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울컥했지만 여기서부터 울면 지칠 것 같아 눈물샘에 힘을 꽉 줬다.
2층 한구석에 노란색 텐트들이 보였다. 〈유가족 및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알림판이 걸린 빨간색 줄이 텐트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X(구 트위터)에서 봤던 〈12. 29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 지킴이〉 표지판도 여기에 있었다. 표지판에 적힌 “여기를 떠날 수가 없어요.”라는 말이 모두가 떠난 여기에 떠날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2시가 되자 지금부터 차례를 지낸다는 방송이 들렸다. 급히 내려가 동지들 곁에 앉았다. 카메라들이 빈소와 가장 가까이에 모여 있었다. 참석자들은 정작 기둥에 가려져 빈소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 차례를 지내는 동안 셔터 소리가 쏟아졌다. 빈소를 담아내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카메라가 자꾸만 참여자들을 향했다. 내 얼굴이 찍히는 건 아닐까, 두렵고 불편한 마음에 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나중에 지은 님께 듣기로는 요즘에는 일부러 얼굴을 피해서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그림이 잘 나오기 위해 과도하게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만 보였다.
노련한 활동가인 동지들은 이 상황을 활용해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팻말을 들고 카메라 가까이 다가갔다. 나도 그 옆에 섰지만, 카메라에 찍히기에는 무서운 마음에 슬쩍 기둥 뒤로 숨었다. 몇몇 기자들이 팻말을 촬영했는데, 지금까지 기사에서 사진을 보지는 못했다. 카메라를 피하다 무심코 뒤돌았을 때, 차례가 시작되기 전 자리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빈 의자로 가득 찬 공항에 별이 된 이들을 찾는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차례가 마무리되고 무안공항-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을 뵀다. 동지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길래 인연이 있나 궁금했는데 신공항 반대를 함께 외쳤던 동지였다. 새, 사람, 행진에서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이 발언한 영상을 봤는데 실제로 뵈니 더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직장이 있다,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행진에 가지 못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유가족은 오후 5시 30분에 활주로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신분증이 필요했다. 콩알 님이 내게 바쁜 일이 있냐고 질문했다. 머릿속으로는 몇 시쯤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계산하고 있었지만, 이제라도 참사 현장 앞에 서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매번 귀찮다고 챙기지 않았는데, 웬일로 신분증을 챙겨오기도 했다. 바쁜 일 없다고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갯벌로 향하다
활주로에 들어가기 전까지 2시간가량 시간이 붕 떠버렸다. 나는 콩알 님께 지금 갯벌을 보러 나가면 어떨까 제안했다. 몇 시간 전,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지은 님은 여기가 새만금과 굉장히 비슷하다니 이 근처 갯벌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콩알 님은 지금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다며 신공항 백지화 사람들에게도 갯벌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오동필 단장님을 포함한 몇 분이 제안을 받아들여 무안 갯벌 탐사대가 탄생했다.

차 한 대로 가기에는 사람이 많으니 차 두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동하기 전에 지도로 무안공항 주변을 확인했다. 스카이뷰로 확인한 무안공항 주변은 전부 파란색과 황토색을 띄고 있었다. 공항 주변이 전부 갯벌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지도상으로 가장 가까운 톱머리를 목적지로 정했다.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고 안내했다. 안내를 믿고 그대로 따라갔는데, 무언가 이상하다. 먼저 출발한 차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길을 확인했다. 아뿔싸, 우리가 역주행을 해버렸다. 도로 중앙에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 있어서 유턴도 못 한다. 한참을 가서 길의 방향은 맞았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와 버렸다. 내비게이션은 요금소를 지나, 함평 분기점에서 돌아가라고 안내했다. 이대로 갔다가는 갯벌은커녕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때 우리는 동시에 요금소 부근에 회차로가 있다는 걸 생각해냈다. 요금소를 지나니 바로 회차로가 보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사히 무안으로 돌아갔다.
내비게이션은 회차로를 통과하자 무안군으로 빠지는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안내대로 가면 시간이 더 걸려서 요금소에서 바로 무안공항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무안공항과 무안군으로 향하는 길이 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설계자가 처음부터 무안공항과 무안군을 구별해서 길을 만든 게 아닐까. 무안-광주 고속도로는 무안국제공항 개항에 맞춰서 건설됐다고 하니, 이 길은 오로지 공항을 위한 길인 셈이었다.

사진제공 : 최은숙
공사 현장 사이로 길이 이어졌다. 붉은 흙더미가 양쪽에 쌓여있었다. 아스팔트길을 따라가는 데도 차가 들썩거렸다. 그곳은 공항 확장 및 KTX 노선 연결 공사를 진행하는 현장이었다. 광주 군공항이 이곳으로 이전된다는 말도 있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전부 공사를 하기 위해 깔아둔 임시 도로였다. 공항은 멈춰있지만, 공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고난과 역경 끝에 제시간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황토색 호수가 우리를 반겼다. 오동필 단장님은 이곳이 원래 바다였지만, 공항을 세우면서 물을 막아 생긴 담수 습지라고 말했다. 수면은 잔잔했지만, 그 위는 절대 고요하지 않았다. 새들이 물 위를 날아다녔다. 그러다 수면으로 돌진해 물살이를 낚아챘다. 고여 버린 물에서도 여러 생명이 살고 있었다. 지은 님이 분노해 외쳤다.
“아니, 공항이 생기려면 이런 거 다 없어야 해요.”

담수 습지를 보자 더 갯벌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물이 들어올 시간이라 갯벌을 잘 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일단 왔던 길로 돌아갔다. 무안공항 뒤편, 공항이 보이는 길을 지나다 활주로 안 둔덕이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조금 멀리, 구겨진 주홍빛 로컬라이저가 보였다. 펑, 둔덕을 바라보다 폭탄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물어 보자, 새를 쫓기 위한 소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붉은 설치물에서 주기적으로 소리를 내보내는 듯했다. 이윽고 새소리가 들렸다. 저건 어떤 새가 내는 소리인지 물어보자, 이것도 새를 쫓기 위한 소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진제공 : 서희
다시 차에 탔다. 오동필 단장님은 아까 봤던 담수 습지 반대편으로 차를 몰았다. 그 뒤로 우리도 따라붙었는데, 여기도 잘 깔린 길이 아니었다. 심지어 목적지를 가려면 언덕을 넘어가는 게 필수였다. 차 안에서 여길 어떻게 지나가냐는 한탄과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구름 사이를 비추는 햇살과 그 아래 깔린 갯벌이 보였다.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홀린 듯이 갯벌로 다가갔다. 인도와 갯벌 사이를 콘크리트가 막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위로 성큼 올라탔다. 사방에서 생명을 마주하고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 게가 있어요!”
“아까 망둑어도 있었어요!”
“저기 도요새도 있어요!”
콘크리트 구조물 아래에서 어떤 덩어리를 발견했다. 덩어리에는 군데군데 작은 뼈가 섞여 있었다. 오동필 단장님은 이건 펠릿(Pellet)이라고, 수리부엉이가 쥐를 먹고 뱉은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말로 설명하기는 모자랐는지 손을 새부리 모양으로 구부려 뱉는 흉내까지 냈다. 담수 습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살아있는 갯벌이었다. 내 등 뒤로 수많은 제비가 하늘 위를 날아 다녔다. 폭탄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장관을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날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름답네요.” 오동필 단장님은 내 말을 듣고 이렇게 답했다.
“아름답죠.” 영화 《수라》에서 아름다움을 본 죄가 있다는 대사가 떠올랐다. 황윤 감독은 수라갯벌이 가진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스스로에게 죄인이 된 건지 물었다. 나도 갯벌이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으니, 죄인이 된 걸까?
사람을 보다
한참 갯벌을 감상하다, 오후 5시에 활주로로 가는 버스 탑승을 시작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 까 안내받았을 때보다 당겨진 시간에 모두가 더 있고 싶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참사 현장을 가기 위해 원래 예상보다 2시간 정도를 더 기다린 거였다. 서둘러 차에 올라 집결지인 2번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앞에는 커다란 버스 여러 대가 있었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서 버스를 탈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몇몇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게이트 안팎을 배회했다. 기자 전용 버스도 따로 있었다. 이쯤 되니 카메라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어떤 사람이 버스에 탑승하려면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함을 안내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인 듯했다. 명단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신분증을 꺼냈다. 그는 내 신분을 확인하고 ‘유가족 X호차’라고 적힌 명찰을 받았다. 나는 이 참사로 가까운 이가 희생된 것도 아닌데, 유가족으로 불려도 되는지 의아했다. 유가족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거워서 명찰을 걸 수도 없었다. 우물쭈물하다 이미 명찰을 차고 있던 신공항 백지화 동지에게 슬쩍 물었다.
“저희 이거 유가족으로 받아도 되는 거예요?”
“시민사회단체 몫으로 받은 거예요.”
시민사회단체 몫이라는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 명찰을 유가족들이 그동안 연대하고 지지했던 시민사회단체 몫을 내어준 것으로 여기자 사명감이 생겼다. 동시에 현장을 미디어로 지켜보던 우리도 유가족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명찰을 목에 걸었다.
일정이 오래 걸릴 걸 예감하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녀오니 활동가 동지들이 관계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방문, 명단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들어보니, 관계자가 문정현 신부님과 김지은 사무국장님을 포함한 신공항 백지화 동지 6명 명단을 따로 받는다, 같은 버스에 탑승한다, 뭐 이렇게 말한 모양이었다. 뭔가 구린 게 있지 않으면 이들을 콕 집어서 말할 이유가 없다. 감시 외에는 그 어떤 말로도 이 순간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들은 신공항 건설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추모 현장에서 감시당한 셈이다. 신원이 완벽히 보장되고 정부가 허락한 존재만이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걸까. 이 와중에 콩알 님이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자신을 피라미라고 일컬어서 픽 웃어버렸다.
실랑이가 일단락되고 관계자끼리 내부 논의를 진행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탑승 시간도 점점 늦춰졌다. 의자에 앉은 채 퍼져버렸다. 30분이 지나서야 관계자가 탑승을 시작하겠다고 안내했다. 신공항 백지화 동지도 들어갈 수 있었다. 관계자는 유등을 들고 버스에 탑승하라고 안내했다. 모두가 줄지어 유등을 받았다. 하얀 유등에는 ‘보고 싶어’ 나 ‘179’ 같이 참사 피해자를 그리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는 단순히 참사 현장에 방문하는 걸로 생각했는데 유등이라니, 뭔가 찜찜했다.
버스 자리가 채워지자 곧이어 기자가 들어왔다. 기자는 맨 뒤에서부터 카메라로 탑승객 뒷모습을 촬영하다, 가끔 각이 잡힐 때면 앞모습을 찍었다. 나는 카메라가 진짜 너무 불편해 창가 커튼으로 얼굴을 가렸다. 단 요만큼이라도 카메라에 잡히고 싶지 않았다.
잠시 뒤 버스가 출발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이윽고 일반 도로와 활주로를 갈라놓는 거대 한 철문을 통과했다. 한 사람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러곤 제주항공 참사 원인이 무엇인지 아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게 다 둔덕이 잘못 설치된 탓이라고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이건 다 국토교통부 때문이라며 옆자리에 앉은 관계자에게 잘못을 알아야 한다고 일침을 날렸다. 너무 무서웠다. 일부러 창밖만 쳐다보면서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버스가 멈췄다. 관계자는 탑승객에게 유등을 챙겨서 버스에서 내려 한 줄로 이동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따랐다. 걸어가는 동안 왼쪽으로 둔덕이 보였다. 관계자는 둔덕을 등지고 줄을 서게 했다. 몇몇 사람은 뒤로 돌아서 둔덕을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었다. 수많은 기자가 정해진 구역에서 우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중간에 유등을 켜야 하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이 들렸다. 또 허가받은 곳은 도로가 깔린 곳이니 풀숲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를 들었다. 그제야 나는 유등을 받았을 때부터 느꼈던 찜찜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유가족 김성철 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줄 서서 대기하던 사람들은 안내에 따라 유등을 켰다. 그러곤 활주로 양쪽으로 차례대로 한 줄씩 걸어갔다. 고개만 돌리면 둔덕이 보이는데, 그 반대쪽 활주로로 가야만 했다. 이윽고 모든 사람이 활주로를 따라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사회자는 등을 높이 들고 희생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외치게 했다. 사방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 제대로 외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는 사람, 보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자는 이런 우리 모습을 단순한 피사체처럼 계속 카메라에 담았다.
음향 장비에서는 〈천 개의 바람〉이 흘러나왔다.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울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때 나는 오히려 정신이 아득해졌다. 각자에게는 각자가 가진 추모 방식이 있을 텐데, 〈천 개의 바람〉 때문에 울어야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새를 쫓기 위한 폭탄 소리와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노래에 덮였다. 둔덕과 멀지 않은 곳, 신분까지 확인해 들어간 이곳에서조차 모두는 자유롭지 못했다.
여기서 몇 십 분을 보낸 후에야 김성철 님은 사람들에게 활주로 가운데로 두 줄로 모여서 둔덕으로 걸어가라고 안내했다. 또 줄을 섰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왜 이런 짓거리를 하게 하냐고 울부짖었다.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유진 유가족협의회 대표님은 울다가 지쳐서 허리가 꺾일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바라보던 콩알 님이 줄을 이탈해 대표님 허리를 붙잡았다. 나도 콩알 님을 따라 줄을 이탈해 대표님 옆에 섰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유가족 여러분,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줄 맞춰 가주세요.”
콩알 님은 이 말을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 줄이 중요하냐.”
그러곤 둔덕에 도달할 때까지 대표님 허리를 놓지 않았다. 나는 그 옆에서 정말로 힘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유등을 들었다.
이윽고 둔덕에 도달했다. 참사 현장은 풀숲이라 진입할 수 없었다. 김성철 님은 1주기에는 꼭 풀숲에 들어가자고 약속하곤, 묵념하고 돌아가자고 안내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우리 누가 저기에 있는데 왜 못 들어가냐고 절규했다. 희생자 이름을 부르짖었다. 보고 싶은데 왜 안 오냐고 물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공무원을 믿냐, 정부를 믿냐, 우리가 우리를 믿어야지. 누가 우리를 믿냐!”

몇몇은 이 말에 동의하며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거창한 행사도 빛나는 유등도 추모 앞에서는 불필요하다. 참사 현장 앞에 서서야 진짜 추모가 이뤄졌다. 그제야 나도 울음이 터졌다. 끝까지 진실을 위해 연대하겠다고 다짐했다. 모두 함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치고 둔덕을 떠났다.
활주로를 떠나는 버스 안, 기자는 계속 카메라를 들고 촬영 각을 잡았다. 아까 큰 소리로 제주항공 참사 원인을 질문했던 사람이 기자를 불러 세웠다. 그러곤 기자냐고 질문했다.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건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기자가 그렇다고 답하자 그가 말했다.
“좋은 것만 찍으면 안 되지.”
사실 저 사람은 유등을 들고 외치던 순간에 내 시야 안에 있었다. 그는 모두가 울던 그 순간에 잘못한 사람 나오라고 화를 냈다. 좀 화가 많은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사람이 조금은 덜 무서워졌다. 슬프게도 그가 기자에게 일갈했던 것과 달리, 그 어떤 기사에도 둔덕 앞에서 있었던 순간을 찍은 사진은 없었다. 모두 유등을 들고 울부짖고, 주저앉아 통곡하던 그 순간을 기록했다. 다들 사진 찍기 좋은 무언가만을 원했던 모양이다.
공항을 떠나다
추석 합동 차례에 다녀와 무안공항이 지닌 장소성을 생각했다. 무안공항은 설계 때부터 터를 잘못 잡은 곳이다. 환경부와 국립생물자원관에 따르면, 무안공항 인근의 전남 무안군 현경면·운남면에서 물새류 6,930마리, 오리류 5,849마리 등 12,000여 마리의 겨울 철새가 관찰됐다. 이 지역에는 113. 34㎢에 이르는 대규모 무안갯벌 습지보호구역이 자리 잡고 있어서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다. 조류 충돌이 일어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폭탄 소리와 새소리로 많은 생명을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런 사후 처리가 정말 효과가 있다면, 애초에 참사가 일어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나는 참사가 일어난 직후 지역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무안공항 참사로 부르면 안 된다고, 제주항공 참사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2025년 6월 21일 12.29 무안공항-제주항공 유가족협의회가 출범했다. 이는 유가족이 비행기를 소유한 제주항공뿐만 아니라 철새 도래지에 공항을 짓기로 결정하고 둔덕을 건설한 국토교통부에도 책임을 묻겠다는 의사를 밝힌 걸로 해석된다. 새, 사람, 행진에서 유가족은 “또 몇 명의 희생자와 수천 명의 유가족이 생겨야 (공항 건설을) 멈추시겠”냐고 발언했다.
이것은 단지 유가족 측 의견뿐만이 아니다. 11월 1일 서울에서 열린 12.29 무안공항 제주항 공 참사 300일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서 대한민국 조종사 노동조합 연맹은 둔덕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상황이 참사를 만들었다는 점에 분개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X(구 트위터)에서 사용자들은 무안공항을 언급하는 이를 향해 지역혐오를 이유로 무차별적 사이버 폭력을 일삼는다. 어떤 사용자는 지역 선거구 의원에게 신고하며 정의구현을 실현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무안공항은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성역화된 공간이 된다. 그들에게 이미 국토교통부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어떻게 가닿을까?
한편에서는 10.29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왜 무안공항은 말하지 않냐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무안공항 참사 진상 규명은 현 정부를 비판하는 수단이자 자신을 도덕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도구인 듯싶다. 차례에 함께 참여한 콩알 님은 언제나 팔에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 팔찌를 차셨다. 노란색은 4.16 세월호 참사, 주황색은 스텔라 데이지호 참사, 보라색은 10.29 이태원 참사를 뜻한다. 콩알 님 한 사람만 봐도, 무안공항-제주항공 참사를 기억 하는 사람이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러니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왜 무안공항을 말하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말하기 전에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모든 참사는 연결돼 있다. 유가족이 원하는 건 다른 무엇보다도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다.
참사 후 모든 것이 멈춘 무안공항을 떠올린다.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가 처벌되고, 재발 방 지 대책이 마련된 후 이곳은 어떻게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 이곳에서 유가족의 목소리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