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연(妙衍)한 생명의 창조성에 관하여

묘연(妙衍)은 완전/불완전, 개체/전체의 경계에서 우연적 생성·변화 과정을 뜻하며, 합리적 인과론이 아닌 과정철학·생성론적 특성을 가진다. 혼돈의 정막함, 흰 그늘, 차이·겹침·마찰이 창조성을 낳는 조건이며, 예술가는 이를 배치해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 ‘활동하는 무(無)’는 고정 자아를 흔드는 텅 빈 가능성의 에너지로 모든 사건을 창조 사례로 전환한다. 인간은 우주 생명의 순환 속 무한한 묘연한 창조성을 해체·재배치로 드러내며, 질서와 혼돈 사이를 오간다. 위기의 시대, 규정 불가능한 이 창조성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이건 아니다’를 자각하는 각비(覺非)의 마음이 필요하다.

묘연(妙衍), 듣기만 해도 알 듯 모를 듯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묘한 매력이 있다. 어디서부터 나왔을까? 기록에 묘연(妙衍)은 [천부경] 해석 과정에서 파생된 七一妙衍(칠일묘연)에 나온다. ‘칠과 일이 오묘한데 온 데에 퍼져 없는 데가 없다.’는 말로 설명되어 있다. (칠과 일은 모두 양수(天)이며 생수(生數)과 성수(成數)의 대표 격의 숫자이다) 칠은 불교에서 완전성과 주기를 상징하며, 일은 낱(개체)과 전체의 이중성을 가진다. 완전과 불완전성, 낱과 전체 경계에 서서 그사이를 오가며 끝없이 변화하면서 다시 생성되어 퍼져나가는 무궁한 생성/변화 과정이 묘연(妙衍)이다. 그리고 묘연(妙衍)은 마치 주변에 오염되어 무연(無然)인 듯 필연(必然)으로 생성되는 엉성한 인과관계다.

혼돈·흰그늘·차이/겹침이 창조성을 낳으며, ‘활동하는 무’가 에너지다.
사진출처 : pxhere

묘연(妙衍)은 결과론이나 결정론, 실증적 인과론의 배경이 되는 서양 근대철학의 특징인 이성, 합리성, 논리성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론이나 내재성, 배치, 탈영토화/영토화를 특징으로 하는 들뢰즈의 생성론 거기에 네트워크이론의 신유물론에 가깝다. 그래서 묘연(妙衍)은 불확실성과 비확정성, 즉시성과 동시성, 비시원성과 비단계성의 특징을 가지며 생성 변화하는 차이 나는 반복과정을 이끈다고 할 수 있다. 묘연(妙衍)은 실증적 인과관계의 추출보다는 사건과 생성 같은 우연성에서 비롯되고 결과와 과정이 난잡하게 얽혀있어서 하나를 떼어내 분리하기가 어렵다.

인간은 우주 생명의 창조성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순환하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시간과 공간의 셀 수없이 많은 영향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결과와 영향은 알 수 없다. 그래도 해체와 재구성이 궁궁(弓弓:무한함)으로 들며나는 리드미컬한 묘연(妙衍)한 창조성을 유용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묘연(妙衍)이 시작된 전통 생명 사상의 역설과 흰 그늘, 질서와 혼돈, 차이와 겹침, 수렴과 확산으로 창조성의 길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1. 혼돈의 정막함은 창조를 낳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다.

창조를 원한다면 혼돈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무질서한 혼돈을 낳는 인위적인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서 무위적으로 새로운 무엇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계획이 아니다.

파괴와 창조의 경계에 있는 혼돈은 모든 걸 빨아드릴 듯한 회색에 가깝다. 최치원의 현묘지도(玄妙之道)에서의 현도 검정보다는 회색에 가깝다고 한다. 창조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혼돈은 생각과 다르게 오히려 튀지 않고 시끄럽지 않다. 수운 최제우 선생님의 무자미지특심(無滋味之特心)이다. 정말 아무 재미없는데도 독특한 마음이 일어나는.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고, 무어라 갈래 지울 수 없고, 확고한 규율, 원칙이 없는 혼돈의 적막함에서 창조력이 튀어나올 것이다.

야만의 시대에 자신을 정막함 속으로 안내한다면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될 수 있다.

2. 흰 그늘은 창조를 잉태하고 있다.

음(陰) 안에 양(陽), 양(陽) 안에 음(陰). 어둠을 잉태한 빛, 빛을 잉태한 어둠. 침침하면서도 환한, 쓸쓸하면서도 그리운, 슬프면서도 후련한, 절망 속에서 희망 이렇게 오묘하면서도 독특한 말할 수 없는 흰 그늘.

‘그늘은 지기지심(至氣之心)이라 부를 수 있다. 즉 그늘은 혼돈한 생명, 카오스 기의 정서이며 무질서한 상상, 무질서한 역설적 정서와 상상력이 배태되는 움직이는 동명사로서 한국 미학의 무질서의 미. 판소리에서 이면(裏面)과 함께 가장 중요시되는 창조원리이다.’
(『생명학2』, 김지하)

기존 질서와 구조에서 벗어난 탈 영토가 영토를 배경으로 하듯 창조성은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지금, 여기의 구조 안에 배태되어있다. 지금 여기의 혼돈한 생명, 카오스 기의 정서, 무질서한 상상력의 지극함이 그늘을 흰 그늘로 뒤집어버린다. 이럴 때 흰 그늘은 창조의 상징이 된다.

3. 차이와 겹침 그리고 마찰이 창조성을 일으킨다.

교접운화(交接運化). 접인운화(接引運化). 자동(무위:無爲)과 능동(인위:人爲).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있지만 교접과 접인 모두 차이에서 시작되고 차이는 다양성 안에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른 두 개의 요소들이 겹쳐 충돌할 때 긴장과 마찰(혼란)이 일어나고 마찰의 힘이 임계점을 넘으면 질적 변화(창조)가 시작된다. 겹침은 두 개 사이에서 오염도 일으킨다. 얼룩덜룩한 무늬를 만들면서 복잡하고 카오스적인 형태를 띠게 한다. 그래서 해체와 재조립과정의 재배치는 창조에 절대적 힘을 갖게 된다. 배치의 강렬도가 높을수록 창조의 힘은 높아진다. 바로 이때 교접(交接)과 접인(接引)의 매개자로 재배치에 능숙한 예술가를 주목해야 한다. 예술가는 다른 존재의 기운을 끌어와 연결하고 새로운 변화의 장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한편으로 창조는 끊임없는 떼어짐 disjuntion(해체)에서 만나짐 conjuntion(연결/구성)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떼어짐이 새 실체를 창조해 낸다. 이것이 무한한 창조성이다. 창조의 세계는 떼어짐(차이)과 만나짐(겹침)을 거듭 통일시켜 자동으로 새로운 복합체를 형성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각 물질 개체나 각 개인 내부의 우주적인 기의 성취에 의해 그것이 확장함으로써 타인의 성취된 기의 확장 활동과 겹친 부분에서 새로운 창조적인 신묘한 비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생명학2』, 김지하)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지구와 새로운 우주 생태 관계의 창조는 바로 인간 개인의 모든 물질 내부와 모든 생명체 내부의 전체적 영성의 상호 유통이 겹치는 부분의 심화 확대 과정에서 문명의 전환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과 창조적 생명의 회생이 이루어진다.’
(『생명학2』, 김지하)

창조과정은 율동 rhythmic이다. 산조와 재즈와 같아서 환경에 영향을 받아 장단고저(長短高低)가 그때그때 다르게 흐른다. 변화된 환경의 리듬에 규범의 리듬이 어긋나는 불협화음의 순간, 뭔가 새롭게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리듬이 변화를 이끌어간다.

4. 활동하는 무()는 창조의 에너지이다.

위기 속 모든 변화를 각비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진출처 : easy-peasy.ai

텅 비어있음은 마치 다음의 주인공을 기다리는 무대처럼 탄생을 예고한다.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언제든 자리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무궁의 잠재성이고 가능성이다. 끊임없이 고정된 자기/자신을 흔들어 살아있게 하고 생동하게 하는 창조적 생명의 틈이 활동하는 무(無)다.

‘수운선생은 모심의 내용으로 신령한 우주 생명의 끝없는 창조적 진화 생성을 말하고도, 그 신령의 주동성, 창조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근거로서 천, 하늘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태허(太虛), 공(空), 활동하는 무(無),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 거대한 미지의 여백입니다.
(『생명학2』, 김지하)

창조성은 활동(변화)하는 무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다. 창조성은 언제 변화가 일어나는가? 변화는 어떤 형태를 만드는가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일단 오묘한 조화 속에서 변화가 생기면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가졌건 상관없이 모든 각개 사물들은 창조성의 사례가 된다. 사례가 되어 먼저 있었던 사례와 한 덩어리가 되고, 동시에 앞으로 생길 사례들에 대해서는 복합체의 한 단위가 되어 자기 자신을 바칠 하나의 새 단위가 된다. 그리고는 괴공(壞空)에 제물이 된다.

쓰고 나니 처음부터 묘연(妙衍)한 창조성을 찾는 것이 무리였다.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현재의 시간을 잡는 일과도 같다. 다만 가까이 다가가야만 할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누구나 몸 안에 묘연(妙衍)한 창조력이 내재 되어있다. 적막함 사이로 나즈막히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마찰의 뜨거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염되는 내 몸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이로 슬그머니 일어나는 묘연(妙衍)한 창조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고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모방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두려운 것은 창조를 ’좋다/나쁘다‘로 구분할 수 없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변화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위기와 재난의 상황이 한편으로 두렵고 한편으로 기쁘다. 다만 필요한 것은 이건 ’아니다‘를 깨닫고 받아들일 각비(覺非)의 마음일 것이다.

이무열

지역브랜딩 디자이너. (사)밝은마을_전환스튜디오 와월당·臥月堂 대표로 달에 누워 구름을 보는 삶을 꿈꾼다. 『지역의 발명』, 『예술로 지역활력』 책을 내고는 근대산업문명이 일으킨 기후변화와 불평등시대에 ‘지역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발명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하며 곧 지역브랜딩학교 ‘윤슬’을 시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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