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슬픔 너머 다시 만나는 희망의 언덕

모시는 사람들에서 출판한 『생태슬픔』을 읽고 내 안에 켜켜이 쌓였던 일상의 상실과 슬픔을 풀어나간 길 찾기 이야기부터 하려고 한다. 사회적 재난에서 시작해서 기후 재난, 기후 위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상실에 대한 애도의 과정을 천천히 곱씹으며 적었다. 사회적 재난이 터지고 어쩔 수 없는 상실감에 정처 없이 헤매기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상실부터 살피고 돌보는 여행이 이 땅 곳곳에 시작되길 바란다. 슬픔을 다룰 수 있어야 건강하게 삶터에 생명으로 뿌리내릴 수 있다.

가만히 있으라!

이나경 外 생태슬픔』 (모시는 사람들, 2026)

남편의 연구년을 맞아 외국의 한 도시에서 아침 등교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학교에 아이들을 내려주는데, 등교를 도와주던 다른 엄마와 학교 선생님이 질문했다. “괜찮니?”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그날따라 안부 인사를 물어보는 낯선 땅 이웃들 덕에 ‘이제 좀 친해졌나!’하는 안도감이 돌았다. 오후가 되어 아이들을 다시 학교로 태우러 가는데, 다른 학부모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많이 힘들지?” “괜찮겠어?” “나도 많이 슬퍼.” “함께 기도할게.” 쇄도하는 안부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파트의 이웃 할머니 부부도 갑자기 말을 건넸다. “같이 후원금이라도 모아볼까?”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과 뉴스를 확인했다.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아이들을 실은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탑승자 전원 구조!”라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화면에는 침몰된 세월호의 처참한 모습이 가득했다. 눈물 흘리며 아이들의 시신을 애타게 찾는 학부모, 팽목항에 착륙하지 못한 채 하늘만 맴도는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게 보도됐다. 더 어처구니없던 것은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선장은 “가만 있으라!”라는 지시를 남기고, 제일 먼저 탈출했다는 소식이었다.

낯선 교실 풍경

한국에 돌아와 새롭게 변화된 교육 환경으로 아이들은 낯선 것과 익숙해져야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한 줄로 정렬된 책상에서 상대방의 등을 바라보고 밥을 먹었다. 안전사고가 문제로 제기되면서 체험학습은 사라졌다. 미세먼지와 황사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체육 수업은 운동장이 아닌, 실내 체육관에서 진행됐고 이마저도 학습 행사로 대치되기 일쑤였다. 음악 과목은 실기 평가를 위한 수업으로 진행되기 바빴다. 혼자 흥얼거리는 콧노래도, 함께 어울려 부르는 아이들의 노래도 사라졌다. 지친 학업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학교 안팎 아이들의 숨통은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동네 곳곳에 놀이터가 있었지만 정작 놀이터에는 아이들을 찾기 어려웠다. 아이들이 모래사장에서 흙이라도 만지려 들면 건강에 좋지 않다며 아이들을 막았다. 학원에 가기 전, 짬이 난 청소년들이 놀이터 정자에라도 앉아 있으려면 어린이들이 다칠 수 있다며 어른들은 ‘안전’과 ‘보호’를 이유로 청소년들을 다른 장소로 내쫓는 경우가 허다했다. 짧은 등굣길도 친구랑 함께 걷기보다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학습 시간을 관리한다며 차로 실어 나르는 특이한 모습이 연출됐다. 아이들은 생명력 있는 나만의 꽃을 피우기보다 숨겨진 야생성은 꺼내도 보지 못한 채, 꺾꽂이된 꽃병의 꽃으로 그저 잘 가꿔진 모습으로 성장했다. 손을 들어 질문하는 아이들은 찾기 어려웠고, 오직 정답에 맞춰 자신의 생각은커녕, 요구하는 정답에 자신의 생각인 양 끼워 맞추는 데 몰두했다.

코로나로 생긴 가족 간의 감염 보호막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들의 표정은 마스크에 가려졌다. 갑작스레 등장한 불청객으로 마스크가 부족할까? 물건을 재빠르게 확보하는 사람들로 약국 앞 줄서기 경쟁이 한동안 이어졌다.

기숙사를 쓰던 작은 아이는 주말이면 보건소를 방문해 코로나 검사를 하는 것이 통과의례가 되었다. 가족들도 덩달아 노심초사했다. 혹시나 코로나가 발생하여 아이가 수업을 못 듣거나 시험을 치지 못할까? 한집에 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빼곡히 들어섰다. 아이들의 졸업식 모습 또한 함께 축하하고 새로운 도전을 격려하기보다 형식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축하하러 간 가족들은 교실도 들어가지 못한 채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아이들만 빠르게 학교를 방문해 졸업장만 전달받고 돌아왔다. 학교에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천천히 돌아보거나, 담임선생님께 존경과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은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에 집안 어르신들의 병원 출입으로 함께 하는 가족들은 이웃들과의 교류도 주의를 기울인 채, 서로 만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감염원을 막아내느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늘어나는 일상의 상실감

마을 공동체 안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횟수가 줄어드는 이웃과의 만남, 지원 기관의 양식에 따르느라 선택도 없이 형식만을 반복하는 시민 모임, 보편적이라고 여겼던 가치가 서로 다른 신념으로 움직여 크고 작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서로 다름의 생각 차이를 끊임없이 두 갈래로 갈라치기를 하는 모습에 진이 빠졌다. 순간순간 나와 너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돌봐야 했다. 시간이 없을 때도 느껴지는 긴장감과 소리 없이 쌓인 불안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때면 왼쪽 손을 오른쪽 손으로 슬그머니 감쌌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몸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면 뜨거운 차를 아주 천천히 마셨다. 그래도 복잡해진 생각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으면 의도적으로 두 눈을 왼쪽 가슴 아래로 돌렸다. 머릿속 얽힌 실타래가 가슴으로 연결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코로나19로 마을 안 공공 스튜디오가 자주 닫히자, 마이크와 핸드폰, 사진기를 들고 골목 상점, 도서관, 다문화센터, 동네 시장을 직접 방문해 이웃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해결할 수 없다면 잠깐이라도 연결이 필요했다.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것을 지나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 너, 우리를 달래고 다정하게 안아주는 시간이 전적으로 절실했다.

사회에서는 표면적인 묵념과 추모가 이루어졌고, 아이들은 수시로 벌어지는 사회 현상에는 신경을 껐다. 그저 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경쟁의 기계로 자라났다. 간혹 사회적 슬픔 앞에 마음을 알아차리고 잠시라도 상실을 애도하는 선생님을 만날 때면 한 모금 오아시스처럼 청량했다.

연이어 찾아온 낯선 손님

어느 순간인가부터 생활 속에 낯선 손님들이 줄줄이 찾아 들었다. 단원고 세월호 참사(2016), 대성고 강릉 펜션 사고(2018), 이태원 참사(2022), 학부모의 민원으로 발생한 초임 교사의 죽음(2023), 두 번의 대통령 탄핵(2016, 2024)에 이르는 이 땅 공동체의 비극이 뉴스에 쏟아졌다. 또 사이사이 파고드는 무더위, 태풍, 폭우, 대형 산불까지 기후 재난으로 인한 자연재해 역시 기사의 한 칸을 굵직하게 점령했다. 사회적 참사와 수시로 목격하는 기후 재난들은 더 이상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의 외침으로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쉴 새 없이 전해지는 잃어버린 생명들에 대한 소식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마음속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감당하기엔 너무 뜨겁고, 외면하기엔 너무 가까운 고통이 되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TV와 뉴스를 통해 넘쳐나는 소식들에 귀 기울이지 않기 위해 애써 무심했다. 무심코 스쳐 지났던 화면 속 장면들이 딱딱한 돌멩이가 되어 마음을 짓눌렀다. 답답했다. 고통스러웠다. 절망감과 함께 불안이 몰려왔다.

서로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원형의 춤

창조적 원형의 대화 ⓒ이현주

그간 곳곳에 구멍이 뚫렸던 안전사고, 몰리는 군중과 미처 대비하지 못한 질서 체계로 잇따라 터지는 시간과 공간의 상처… 멈춰선 경제 성장으로 거듭해서 전해지는, 부모와 잠자는 아이가 함께 숨지는 사건, 장모를 살인해 캐리어에 유기한 사건(2026) 앞에 한없이 답답하고 맥이 풀렸다.

모여야 했다. 나눠야 했다.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이웃들과 함께 모여 한올 한올 실을 떠가며 뜨개 조각들을 연결했다. 서로 안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꺼내놓고 천천히 돌아가며 말했다. 울다 지치면 쉬어도 가면서…. 한 자 한 자 적었던 욕구와 가치들을 커다란 조각보를 들고 외치며 안전한 둥지 삼아 아이처럼 뛰놀았다. 원을 돌아가며 아주 느린 춤을 추기도 했다. 슬픔이 가락을 따라 흩어지기도 하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기도 했다. 눈물은 방울로 쪼개져, 깊게 공명이 되어 서로를 지키는 따뜻한 울림이 되었다.

야트막한 동산에서 발견한 작은 것들의 위대함

활동하고 있는 환경단체에서 짬이 나는 주말이면 함께 산을 올랐다. 어린이, 청소년, 어른들과 어울려 오솔길을 걸었다.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나무를 뒤덮고 있는 가시박 덩굴을 치웠다. 도시의 소음을 저만치 미뤄둔 채, 작은 새소리에 귀 기울였다. 골프장 경계에 빙 둘러쳐진 철창 사이로 고개를 둔 여린 풀꽃을 보고 감탄했다. 동네 입구를 지키고 있는 690년 된 느티나무잎 사이로 비췄던 따뜻한 햇살은 몸과 마음에 남아 있던 잃어버린 아픔을 씻기고 말리기에 충분했다. 이 시간을 통해 나, 너, 우리의 나이테도 훌쩍 성숙했다. 아니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딱딱했던 호흡이 말랑말랑하게 회복됐다. 생명의 샘물이 되어 현재의 삶을 지탱했다.

순환을 통해 성숙해지는 사회

이제는 내 탓, 네 탓을 넘어 멈춰서 긴 호흡으로 서로의 모습을 꺼내놓고 창조적 원형의 대화를 미루지 않고 시작해야 한다. 정답이라고 여겼던 지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시민들이 함께 풀어야 한다. 실패라고 여겼던 부분을 숨기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더 이상 누구의 탓도 아니다. 되풀이되는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의 부족과 단절된 공간이 있었을 뿐이다. 서로들의 위치에서 신발을 벗고 내려와, 서로 다른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현장을 이해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나란히 경청해 보라! 멈춰 선 자리에서 주민들과 다시 희망의 손을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서류, 보고서에 적힌 통계와 결과 이면에 숨겨진 맥락과 상황들을 넓고 깊게 읽어가는 노력을 서로 일으키며 순환할 때, 사라지는 세상이 아닌 생기가 되살아나는 생명 사회를 꿈꿀 수 있다.

이현주

고양시라는 삶의 터전에서 고요한 풍요를 품고 마음의 등불을 따라 걷는 일상 문화 창작자이자, 생명의 화합을 노래하는 지구 시민입니다. 세상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잊혀진 관계, 소중한 가치에 귀 기울이며 마음의 속삭임 TV를 사브작 사브작 운영하고 있습니다. Grass Green의 약자, G²로 창작의 숨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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