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매달린 자들의 도시: 18세기 런던, 커먼즈의 범죄화와 죽음통치

이 글은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의 『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18세기 영국 노동계급 공통장의 죽음과 삶』을 소개하는 글이다. 특히 인클로저를 통해 시골의 공유지(커먼즈)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18세기 대도시 런던에서 어떻게 새로운 커먼즈를 구성해나갔는지, 생산 재료를 전유하는 그 구성 방식에 지배 계급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런던의 다중은 어떻게 마침내 타이번의 교수형으로 대표되는 죽음통치를 위기에 빠뜨렸는지, 그러나 임금은 어떻게 새로운 훈육의 장치로 등장했는지를 살핀다.

피터 라인보우는 미국의 역사학자로 영국사를 전공했다. 그의 작업은 이미 국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마그나카르타 선언: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도둑이야!: 공통장, 인클로저 그리고 저항』, 『메이데이: 노동해방과 공유지 회복을 위한 진실하고 진정하며 경이로운 미완의 역사』, 그리고 마커스 레디커와 함께 쓴 『히드라: 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 책들은 모두 각기 다른 대상을 다루지만, 공통된 시각을 공유한다. 공통자(commoner), 다중, 프롤레타리아, 빈자, 폭민mob, 노동계급 등 다양한 용어로 등장하는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다(이들이 그저 지배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역사가 아니라). 커먼즈는 이들의 “투쟁으로서의 삶”1의 기반이자, 그러한 삶 자체다. 커먼즈가 “우리가 함께 움직이면서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출현해 내가 그것의 일부로 살아가게 되는 어떤 삶의 형태”라면2, 라인보우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삶을, 그 삶이 역사적으로 작동했던 방식과 그 함의를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노동하는 빈자”를 지배 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그저 희생된 제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투쟁으로서의 삶이 지배 질서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다시 그것의 역관계를 고찰하면서 역동적인 “역사의 변증법”을 드러낸다. 지배 권력을 전제적인 힘으로 이해하지 않고 ― 그러나 그 힘을 간과하지도 않으면서 ―, 오히려 다중의 힘에 대응하는 세력으로 그리는 것, 그래서 역사를 두 세력의 힘 관계에 달린 문제로 이해하는 것, 이것이 언제나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했다. 이번에 한국에 소개된 책, 『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18세기 영국 노동계급 공통장의 죽음과 삶』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의 핵심 논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적 관계와 연관된 착취 형태들이 범죄 활동 형태들을 유발하거나 변형했다는 것, 둘째, 그 역도 사실이라는 것, 즉 범죄 형태들이 자본주의에 중대한 변화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 런던의 범죄화된 인구는 그 자체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세력이었다. … 마지막으로 교수형당한 사람들의 투쟁은 그들 계급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통치자들이 나름의 선제적 조치를 행사하도록 자극했다. 이러한 투쟁, 선제적 조치, 대응의 패턴으로부터 역사의 변증법이 만들어졌다3.

대감금 시대의 탈감금

자본주의적 관계와 연관된 착취 형태들이 범죄 활동을 유발한다. 『목매달린 자들의 런던』(피터 라인보우, 갈무리, 2026)

책을 여는 인물은 가택 침입 강도이자 탈옥수인 잭 셰퍼드(1702~1724)다. 그는 성실하고 뛰어난 “거의 마스터 같은 목수” 도제였다. 그러나 런던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조적 재구성 과정에서 직종인들이 더 이상 길드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해 불안정에 노출되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착취 조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형성되는 가운데, 셰퍼드는 마스터를 떠나 후자에 합류했다. 많은 직종인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선원 생활, 도박, 부랑자, 어카운트 하기”4 같은 다른 방편을 찾아 나섰다. 셰퍼드 역시 그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탄생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차례 투옥되었지만 탈출했고 그에 따라 “온 나라의 공통 화제”가 되었다. 그는 왜 사람들의 공통 화제가 되었는가?

이는 무엇보다 그가 탈감금을, 따라서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푸코가 “대감금(the great confinement)”이라고 부른 시기에 라인보우는 런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감금 시설로부터의 탈출 경향에 주목하며 이를 “탈감금(excarceration)”이라 명명한다. 그는 푸코가 “감금을 강조하며 정부와 사회의 지배자들을 전능한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고 비판하며, 감금이 물론 18세기 초 런던을 특징짓는 주제이긴 했지만 “감금이라는 주제는 탈감금이라는 대항 주제를 불러일으켰다”고 강조한다. “감금이라는 주제가 노역소, 공장, 병원, 학교, 배에서 펼쳐졌듯이 탈감금이라는 대항점은 탈출, 도주, 탈영, 이주, 거부로 펼쳐졌다.”(p.53)

노역소(workhouse)의 사례를 보자. 노역소는 어떤 곳이었나? 그곳은 “감금 시설이면서 처벌의 장소였다. 처벌의 목적은 외부의 사람들을 겁주고 내부의 사람들을 유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노역소에 대한 논의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계획이 진지하게 다루어진 건 1675년 8월 방직공들의 소요 이후였다. 방직공들은 당시 새로 도입된 엔진 직기를 이용하는 마스터를 공격했고, 그에 따라 기계화는 연기되었지만, 노역소는 현실화되었다(p.39~40). 즉 노역소는 방직공들의 힘에 대항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설계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늘 의도대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노역소 내에서는 저항이 있었다. … 런던의 노역소들은 설립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투쟁의 현장이 되었다.”(p.40) 이와 관련하여 셰퍼드는 노역소의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그곳은 “감금된 재소자들에게 순종과 근면한 습관을 불어넣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탈출의 대가 잭 셰퍼드를 배출했다.”(p.41)(잭 셰퍼드는 1700년에 문을 연 비숍게이트 노역소에 1년 반 동안 있었다).

노역소는 또한 “게으름”에 대항하는 공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저축이나 축적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일하지 않으려 했다.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윌리엄 페티는 아일랜드에서 사람들이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일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아일랜드인의 산만하고 빈둥거리는 습관은 축적을 위해 요구되는 노동 훈육에 장애물이었다.”(p.365) 리버풀에서 태어나 인생의 1/4을 항해하며 보냈으며 1737년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로버트 배로는 런던에서 임금을 정산받은 뒤 선장이 다시 함께 일하자고 말했지만 거절했다. “나는 아직 돈이 남아 있었고 돈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일하거나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p.182) 이렇게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일하기보다 빈둥거리는 노동 거부의 성향은 축적을 위해 혹은 질서 확립을 위해 필요한 순종적인 노동력 형성에 큰 장애물이었다. 그에 따라, “17세기 말 새로운 도덕이 자본가 계급 사이에서 득세했다.” 한때 “타락한 인간에 대한 저주”였던 노동은 “신을 찬양하는 수단이 되었”고, “가난은 더 이상 신성한 상태가 아니라 사악함을 나타내는 정황 증거가 되었다.”5 라인보우는 게으름이 지배 계급 내에서 매우 다양한 태도를 요약하는 용어로 활용되었으며, 직무 완수에 있어서의 충실함이나 기량과는 무관하게 “훈육이나 종속, 혹은 복종의 거부를 의미했다”는 것을 알려준다(p.41).

탈감금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게으름’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도제살이를 마치지 않고 “게으른 도제”가 된 셰퍼드처럼 런던의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가둔(enclosed)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은 노역소, 징병, 비자발적인 도제살이, 강제 노동을 거부하며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으로 살아가려 했다. 타이번 교수대는 이러한 끊임없는 자유의 투쟁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이었다. 먼저 자유의 투쟁의 구체적 행위들 ― 노상강도질과 취하기 ― 을 살펴보자.

노상강도질과 취하기

투옥되었지만 매번 탈출해 “온 나라의 공통 화제”가 된 잭 셰퍼드(1702~1724). 사진은 『잭 셰퍼드의 역사』(1839년) 표지(J.Sketch 삽화). 사진출처 : British Library

라인보우는 『타이번에서 처형당한 악인의 품행과 고백 그리고 유언에 대한 뉴게이트 교회사(敎誨師)의 이야기』(이하 『이야기』)라는 제목의 정기간행물을 토대로 런던에서 교수형 당한 사람들을 추적한다. 교회사는 사형수의 마지막 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요약하여 자신의 설교와 함께 『이야기』로 출판했고, 이것은 거리에서 판매되었다.

이 목매달린 자들은 어떤 이들이었는가? 라인보우는 이들의 출생일, 거주지, 직업 이력 등 정부의 검열이나 출판의 상업적인 고려 사항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실들에 기초하여 이들과 런던 전체 인구의 직종 구조가 유사함을 밝혀낸다. 이는 18세기 노동자와 빈자가 한편에는 직종인, 다른 한편에는 부랑자나 범죄자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들, 런던의 범죄화된 인구는 18세기 런던을 제조한 “노동하는 빈자”들이었고, 그에 따라 이들 사형수의 역사를 18세기 런던 노동계급 역사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대체로 재산 범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그들이 겪었던 가난에서 비롯되었다. 가령 벽돌공과 선원 일을 번갈아 했던 헨리 존슨은 바다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건설 현장에서 지붕 공사에 쓰는 납을 훔치기 시작했고 1739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리처드 이즈는 강제 징집되어 군함에서 복무하다 제대한 뒤 “극심한 가난에 빠졌”고, 거리 강도를 시작하여 부자들의 버클, 시계, 가발, 돈을 훔치다 1741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 로스는 아내와 세 자녀를 위해 “돈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 노상강도를 시작했다가 175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책에는 이러한 사례가 무수히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문을 표하며 그들을 탓할 지도 모른다. 비록 형량이 과하다 해도 물건을 훔치고 거리에서 강도질을 하는 건 ‘나쁜’ 일이라고. 열심히 일해서 ‘떳떳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일 듯하다. 그러나 이들이 노동자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노동하는 빈자’라는 걸 기억하자(다시 말해 이들은 특수한 집단이라기보다 일반적인(common) 대중이었다). 라인보우는 이 ‘강도’들이 “규제된 도덕경제에 대한 뚜렷하고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수행했”음을 상기시킨다. 즉 이들은 재산에 대해 다른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석탄을 훔친 레베카 하트는 치안판사에게 도둑질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부자를 강탈하는 빈자에게 죄는 없어요.”(p.383) 이러한 재산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18세기 런던의 목매달린 자들과 노동계급 일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런던 노동계급과 21세기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다.6 이러한 ‘다른 이해’는 전자에게는 공통적인 관념이었다.

많은 푸주한들이 노상강도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라인보우는 이 육류 직종과 노상강도의 관계를 도덕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거래로의 이행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주문한다. 과거 런던의 주요 시장은 시장 상인의 이윤보다 소비자의 필요를 우선하면서 식량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접적인 만남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규제되었다. 그러나 17세기와 18세기 초 런던 인구가 늘어나면서 통제되지 않는 교외 시장이 늘어났고 전통적으로 육류 직종을 관리했던 길드도 무력화되었다. 그에 따라 소수의 도매상과 상인들이 거래를 통제했고, “소매 푸주한, 가금상, 소규모 상인, 허브 파는 여성” 등은 시장에서 쫓겨나 “인근 골목의 변변찮은 자리를 두고 다투거나 … 노상강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p.258) 이런 점에서 노상강도질은 시장을 독점한 상인들이 공동체로부터 수탈한 부를 재전유하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개인적인 실천이지만, 공통적인 관념(도덕경제에 대한 집합적 기억)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 ‘범죄’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전유는 길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매우 비중있게 소개되며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작업장에서 이루어진 관습적 전유다. 여러 직종에서 생산 재료를 “취하는(take)” 형태로 이루어진 이 행위는 다양한 은어로 표현되었다. “양말하기(to sock)”는 그 중 하나다. 양말하기는 취하거나 주머니에 넣는다는 의미로 인쇄물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런던 방언이었다. “짐꾼, 통장이, 선원, 거룻배 사공에게 ‘양말하기’는 ‘오래된 관습’이었고 그들의 소득의 일부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시골에서의 관습, 공통권(common rights)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관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사실 투쟁에 의해 늘 창조되는 과정이었고, 그들의 생계를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강 노동자들은 담배를 취해서 팔거나 물물교환하여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높였다. 이러한 취하기는 노동 과정에 내재되어 있었고, 특유의 작업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자기보상 체계였다. 담배를 담은 통은 창고 마당에 열린 채로 있었고, “그곳에서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기존 관습에 따라 씹거나 피우기 위해 한 줌씩 담배를 취할 수 있는 특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담배를 담은 통이 운송 중에 갈라져서 담배가 노출되거나 검사를 위해 통을 개방하는 경우에도 취하기는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매년 수천 파운드의 담배가 농장주의 손에서 사라졌다.”(p.215-216) 대서양 양쪽의 상인들, 선주들, 입법자들은 이러한 관습을 범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용기에 담지 않은) 벌크 담배의 운송을 금지하고, 담배를 용기 속에 넣도록 규정하는 등 여러 “약탈”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는 강 노동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이들을 겨냥한 로버트 월폴(1721~1742년 사이 영국 총리로 재임)의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양말하기가 담배의 관습적 전유를 가리켰다면, 다른 직종에서 이는 또 다른 용어로 통용되었다. “클리킹(clicking)”은 제화공의 작업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유였다. “윌리엄 홀은 자신이 맡긴 재료가 완성된 구두로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찰스 레이놀즈도 좋은 가죽을 전당 잡히고 질 낮은 재료로 신발을 만드는 직인의 이러한 관행에 대해 불평했다.”(p.294) 모자공들 사이에서 이와 비슷한 전유 행위는 “버깅(bugging)”으로 불렸다. 이것은 “모자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고가의 재료를 저렴한 재료로 교체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습적 전유를 방지하기 위한 대응들이 시행되었다. 1749년 〈버깅법〉은 중노동과 채찍질을 처벌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법안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의도가 늘 실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라인보우는 버깅법이 만들어진 이후 중앙형사법원 재판 기록에 관련 사례가 단 한 건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8년이 지나 이 문제가 다시 검토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는 버깅을 처벌하기 위한 법이 유명무실했음을 의미한다. 제정된 법령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실제 역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라인보우는 〈버깅법〉이 실제 런던의 기소나 유죄 판결에서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 법이 “버깅”을 종식시켰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양복장이의 관습적 전유와 관련된 용어로는 “양배추”가 있다.7 양복장이는 옷감을 재단하는 과정에서 남은 자투리를 양배추처럼 둥글게 말아서 보관했는데, 이는 그의 소득과 동의어였다. 1725년의 한 사전에 따르면 “그들(양복장이)이 훔치고 슬쩍한 천은 양배추로 불린다. 이것으로 보통 자신의 반바지와 조끼뿐 아니라 갓 바지를 입기 시작한 아주 어린 아이들을 위한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었다.”(p.308)

우리는 이러한 관습적 전유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건 그저 단순한 ‘횡령’에 불과한 것 아닌가? 라인보우는 이 문제를 직접 다룬다. 그는 한 역사가가 횡령을 “고용주의 물품을 피고용인이 허가 없이 전유하는 행위”로 정의한 사례를 언급하며 이러한 정의가 두 가지 쟁점을 당연하게 여기며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하나는 ‘누가 허가하는가’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모자를 만드는 데 쓰이는 ‘비버털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라인보우는 이 두 가지 문제가 늘 분쟁 상태에 있었음을, 그리고 〈버깅법〉은 마스터 모자공들과 펠트상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개입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위의 횡령에 대한 정의에서 “고용주의”와 “허가 없이”라는 표현은 작업장에서의 물품이 누구의 소유인지, 그 물품의 처리를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의 문제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것처럼. 하지만 이와 다르게 18세기의 생산과 전유 관행에서 그 문제는 늘 분쟁 중에 있는, 세력 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였다. “재료를 사용하여 그 결과물로 모자를 만든 사람은 모자를 만든 것이다. 그가 만든 것은 그것뿐이다. 그는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 모자의 ‘재산권’을 만들지 않았다.”8

이렇게 시골에서 인클로저(enclosure) 과정을 통해 도시로 쫓겨온 이들은 극심한 가난을 겪으며 거리와 작업장에서 새로운 생계수단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시골 커먼즈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첫째, 소유권을 가지지 않은 이들에 의한 전유 행위라는 점. 둘째, 생산수단 혹은 생계수단을 갖지 않은 이들의 삶을 뒷받침했다는 점. 셋째, 투쟁에 의해서 생산되고 세력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 이런 점에서 이들의 취하기는 도시적 버전의 공통하기(commoning)로 이해할 수 있다.

도시적 공통하기가 생산 재료의 관습적 전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취한 혹은 강탈한 물품을 화폐와 교환하거나 물물교환하기 위해서는 비공식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러한 관계, “매듭”은 장물을 처분하는 데 유용했을 뿐 아니라 상호 부조 체계이기도 했다.9 “그들은 상호 방어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 도둑질은 자체적인 보험을 제공했다. 따라서 밧줄 제조공이며 석탄 운반부인 러셀 파넬이 교수대 앞에 섰을 때 … 그의 친구들은 그가 감옥에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었고, “교수형에 맞는 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장례를 치러주었다. [서로 간의] “협정”이 존재하고 “보험”이 제공될 때 도둑질은 어떤 이들에게 매혹적인 자유를 제공했다.”(p.385) 그러므로 길에서의 강탈, 작업장에서의 취하기는 더 큰 사회적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취하기와 그것에 연계된 네트워크는 도덕경제의 기억 속에서 작동했으며, 달리 생계수단이 없는, 화폐 없는 이들의 삶을 지탱했을 뿐 아니라 자유를 선사한 집합적 기반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들의 ‘범죄’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도덕경제에 대한 기억을 공유했고, 매듭의 한 마디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강도질과 취하기를 개별적인 범죄가 아니라 도덕경제를 되찾기 위한 집합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집합적 기억과 사회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장에서 그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강도질과 취하기를 이해하는 인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형과 임금

노역소는 또한 “게으름”에 대항하는 공간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사람들이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일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진출처 : Wayne S. Grazio

교수형은 이러한 탈감금의 실천을 행하는 이들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끔찍한 연극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의미는 “사회계약”의 갱신이었다.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대다수는 재산법을 위반했다. “사회계약”의 핵심은 사유재산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러므로 각각의 교수형이 주권 권력을 갱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교수형은 “사유재산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되풀이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수형을 연극으로 여긴다면 그 연극이 재현한 갈등은 약자와 빈자 대 권력자와 유산자의 갈등이었다. 그 교훈이 결코 학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질없고 변치 않는 갈등 말이다(p.21).

교수형은 ‘사유재산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되풀이했지만, 그 교훈은 쉽게 “학습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취하기에 대응하는 법안들이 실패한 것과 유사하게 교수형은 그 의도대로 온전히 작동할 수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 대담하게 혹은 용감하게 또는 무죄를 주장하며 숨을 거둔 덕분에 공개 교수형은 런던 다중을 위압하거나 공포에 떨게 하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p.350) “아일랜드에서 지배적인 법적 권위가 깜짝 놀랄 정도로 오막살이농은 “교수대에 겁먹지 않았다.””(p.403)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범죄화만으로는, 심지어 교수형조차도 관습적인 전유권과 싸우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협력 관계가 생산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범죄화만으로는 그들의 힘을 꺾을 수 없었다. 그들의 힘의 기반인 협력적 노동 관계 자체를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법적인 조치 외에 “자본의 지리적 이동, 생산양식의 재조직화, 노동의 기계화”(p.359)라는 다른 해결책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라인보우는 이러한 해결책을 주도한 세력을 세 부류로 나누어 살핀다. 첫째는 새뮤얼 벤담 ― 제러미 벤담의 동생으로 판옵티콘을 고안했다 ― 이나 윌리엄 본 같은 기술 전문가들이고, 둘째는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경제학자들이며, 셋째는 콜쿠혼과 해리엇 같은 경찰이다. “관습적인 전유는 기술 전문가에게 비효율이나 손실로 나타나고, 경제학자에게는 재고 손실이나 거래 비용으로, 경찰에게는 약탈이나 범죄로 나타난다. 그에 따라 그들은 노동계급과 전쟁을 벌인다.”(p.525) 각각의 부류를 좀 더 살펴보자.

기술 전문가: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하층민들 사이에 양속(良俗)을 도입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새뮤얼 벤담은 직종에 따른 기존의 노동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과정을 새롭게 분류하고 혁신했다. 그에 따라 조선공들이 누렸던 관습적 전유는 ‘기술적으로’ 제거되었다. “오랜 토막(작업 중에 목재를 관습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권리) 관습은 결정적으로 무너졌다.”(p.488) 벤담은 ‘과학적 관리법’으로 잘 알려진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힘이 생산 과정에서의 협력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잘 이해했으며, “그 관계를 파괴하고 대신 생산 과정에서 자본의 전제주의를 완성하는 관리 체계를 개발하는 데 생애 대부분을 바쳤다.”(p.490)

경찰: 경찰을 ‘발명한’ 패트릭 콜쿠혼은 관습과 범죄를 구별하려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그 차이를 없애는 데 주력했다. 템스강 경찰의 “본질과 목적은 관습적인 취하기를 제거하는 것”(p.527)이었으며, 그래서 경찰의 기능은 범죄자를 체포하거나 범죄를 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범죄를 창조하거나 범죄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재정의하는 것이었다.”(p.531) 즉 계급 간 힘 관계에 의해 좌우되던 생계 수단의 전유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경찰 설립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경제학자: 이러한 기술적·제도적 해결책은 새로운 계급 관계의 구축(경제적 합리화)으로 완성되었다. 산 노동과 착취자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화폐 관계로 이해되지만 18세기 런던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삶은 아직 합리화되지 않았다. 이 시기 경제학자들의 역할은 바로 합리화되지 않은 삶에 ‘경제’라는 “새로운 추상적 보편”(p.85)의 질서를 부과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시골에서 커먼즈에 대한 인클로저를 통해 생계수단을 잃은 생산자들은 도시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들이 곧바로 임금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노동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10 18세기 런던에서 임금은 계급 관계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토막” 같은 자기보상 체계가 있었으며, 이는 이들이 도시 작업장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커먼즈였다. “임금과 달리 토막은 협상 가능했고 그 자체가 모호해서 노동자들에게 이득이었다. 그들은 토막을 빙자하여 모든 유형의 물품을 빼돌릴 수도 있었다.”(p.464) 해군 조선소 노동자들은 토막을 명목 임금 인상으로 대체하려는 해군의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그러한 노력들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점들은 이들이 ‘경제’라는 새로운 추상적 보편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작업장 혹은 공장의 발전, 경제의 성장 같은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는 자기보상 체계였다. 재생산이 생산보다 이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경제 발전과 살림살이 혹은 임금과 생계가 거의 동의어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이들에게 그 두 가지는 분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노동자들은 가변자본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이들은 작업장에서의 생산에 무심했으며, 생산을 위한 재료를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일터란 물론 생산의 장소였지만 무엇보다 재생산을 위한 수단을 취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인간들이 작업장에 있는 한 ‘경제’는 발전하기 어려웠고,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양식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그레이버가 상기시키듯 생산양식이란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문제이고11 이를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생산에서 분리된 생산을 중심에 두는) 이 새로운 ‘경제’를 위해서는 작업장의 발전을 자신의 생계와 동일시하는, 상품 생산을 자신의 재생산과 동일시하는 인간이 만들어져야 했다. 임금은 바로 이를 위한 도구로서, 생산에 무관심한 이들을 합리화하는 기능을 했다.

처벌의 목적은 외부의 사람들을 겁주고 내부의 사람들을 유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진출처 : rawpixel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프롤레티라이트의 일부는 임금 지불 체계를 대가로 노동 과정의 기술적 재구성을 묵인했다. 이 임금 노동자들은 여전히 토막 경제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을 치안하는 임무를 받아들였고, 제화공들은 협회 규칙을 통해 스스로를 치안하기 시작했다. “이 규칙은 “술에 빠지는 것과 욕하는 것”, 성 월요일(St Monday)의 준수, … “마스터의 물건”을 슬쩍하는 일을 처벌했다.”(p.535-536) 이것은 임금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책임감 있는 근면한 인간’으로 훈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인보우의 말을 따라 교수형은 ‘사유재산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되풀이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 더해 이 교수형이 ‘근면한 인간이 되라’는 교훈 역시 되풀이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유재산을 존중한다는 것은 관습적 전유의 범죄화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보상 체계에서 배제된다면 이제 노동자는 ‘열심히’ 일한만큼 돈을 벌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임금을 수용하며 근면한 인간이 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지속적인 노동은 습관이 되어야 했고, 게으름은 폐지되어야 했다. 빈둥거림과 게으름에 대한 욕구는 꺾고 근면한 인간을, 적어도 근면함을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경제’라는 추상적 보편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다. 교수형이라는 조직적 살인도 추상적 보편을 확립하기 위해 충분하지 않았다. 기술적 개입과 새로운 제도의 확립, 그리고 생산관계의 합리화가 필요했다. 임금의 전면적 도입은 이를 완성하는 길이었으며, 따라서 죽음통치는 임금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임금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되었고, 이 새로운 권리를 위해 생산 과정은 중단 없이 이루어져야 했으며 기업은 성장하고 경제는 발전해야 했다. 따라서 임금을 수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자신의 생계가 좌우된다는 것은, 기업과 경제의 성장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노동자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제 노동자는 진정한 자본이 될 터였다. 임금 노동자란 사유 재산을 존중하며 (즉 생산 재료를 전유하지 않고) 생산 과정에 ‘책임’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경제’라는 추상적 보편은 하나의 진리가 되었고, 삶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맞추어졌다. 재생산은 생산에 그 중심 자리를 내주었다. 임금은 ‘게으른 노동자’를 ‘경제’라는 질서에 가두는 강력한 인클로저 수단이었다. 또한 임금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 내에 심대한 분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라인보우는 임금의 권력이 “무급 노동과 유급 노동의, 남성과 여성의, 성인과 어린이의, 노예와 자유인의 분할”(p.539)을 더 깊고 폭력적이게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임금의 가부장제”(페데리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요컨대 교수형에서부터 새로운 기술과 경찰의 도입, 생산 관계의 재편, 임금 체계의 도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런던의 ‘게으른’ 빈자를 합리화하는 데 끝내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화폐(임금)를 삶의 중심에 두고 그것의 안정적인 획득을 위해 노력하는 삶은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임금을 계급 관계의 중심에 두는 삶은 “노동계급의 끊임없는 투쟁을 체제 내부의 역동적 요소로 ‘승화’시키는 전반적인 메커니즘”12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삶이 임금(화폐)을 중심으로 합리화된 이상, 계급 관계는 성장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기 쉽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기업이 성장하고 경제가 발전해야만 할 것이다. ‘양배추’와 ‘토막’에 의지하고 ‘양말하는’ 인간과 임금에 의존하는 인간은 완전히 다른 종이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종은 자본의 한 요소로서, 그것의 성장주의 윤리를 내면화한다. 이것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과 한 몸이 된 새로운 종은 ‘경제’의 성장 외에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은 추상적인 화폐 순환에 맞춰 짜여졌고, 임금은 그 순환에 매몰된 인간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마리오 트론티가 “자본과 싸우기 위해 노동계급은 자본으로서의 자신과 싸워야 한다”고 쓴 이유일 것이다.13 그리고 이것이 21세기 한국에서 인류세와 기후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가 프로젝트 같은 한가하고 한심한 계획이 발표될 수 있는 배경이다.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의 한계선으로 이야기되는 1.5도를 지킬 수 있든 없든, 폭염에 사람이 쓰러지든 말든, 산호초가 사라지고 물고기가 사라져 바다가 죽음의 공간으로 변해가든 말든 ‘경제’라는 추상적 보편은 포기될 수 없는 진리로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공감을 토대로. 18세기 런던의 목매달린 자들을 다룬 이 책은 어쩌면 이 모든 위기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18세기 런던, 커먼즈

‘사유재산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되풀이했지만, 그 교훈은 쉽게 “학습되지” 않았다. 사진출처 : itoldya

이대로 끝나는 것은 너무 우울한 마무리일 테니 ― 실제로 이 책은 (‘취하기’를 다룰 때의 유쾌함과는 대조적으로) 임금을 다루면서 다소 무겁게 끝난다 ― 마지막으로 18세기 런던의 커먼즈를 정리해보자. 이미 이야기한 생산재료의 전유나 ‘장물’ 거래 네트워크, 즉 ‘매듭’만이 아니라 좀 더 광범한 무언가가 있다.

라인보우와 함께 『미드나잇 노츠(Midnight Notes)』를 발행했던 실비아 페데리치의 말처럼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커먼즈다.14 “역사는 우리의 집합적 기억이며, 방대한 투쟁과 우리를 연결하는 우리의 연장된 신체다. 이는 우리의 정치적 실천에 의미와 힘을 부여한다.”15 이 책의 저변을 이루는 가장 큰 흐름 중 하나는 바로 커먼즈로 작동하는 집합적 기억으로서의 역사다. 런던은 국제 자본의 중요한 마디였고, 바로 그 때문에 런던의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국제적이었다. 그에 따라 런던에는 자본만이 아니라 “전 세계 생산자들의 경험”도 축적되었다. 이들은 고향에서 혹은 바다에서 일하며 또 싸우며 얻은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런던에 왔고 그것은 “런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런던 노동계급의 경험을 매우 풍성하게, 코스모폴리턴적이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런던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조직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지 않는 역사적 정의(定義)를 찾을 수 있는 장소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이곳이 전 세계의 경험들이 유통되는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 아일랜드인, 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은 18세기 런던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p.110-111).

이렇게 런던이라는 도시는 전 세계의 생산자들이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1768년의 강(江) 파업, 1780년의 고든 폭동처럼 때때로 분출하여 통치 실천과 생산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16 이처럼 18세기 런던의 가장 중요한 커먼즈는 런던에서의 메트로폴리스적 경험 그 자체였다. 런던은 다양한 역사를 가진 이들을 끌어들였고, 그 역사들은 런던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으로서의 삶’을 뒷받침하는 기초가 되었다. 교수형만으로는 완전히 파괴할 수 없었으며, 그에 따라 기술 전문가, 경찰, 경제학자가 함께 파괴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도시적 삶으로서의 커먼즈였다. 도덕경제에 대한 집합적 기억, 그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듭’, 그리고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의 노동자-빈자들이 가져 온 지혜와 경험들이 어우러진 삶의 형태. 런던의 목매달린 자들은 바로 그러한 삶형태에 기대어, 그 속에서 아니 그것의 일부로서 살고 싸우며 훔치고 감금되고 달아났다. 이는 그 삶형태가 지닌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쫓겨난 이들이었고, 그런 까닭에 화폐를 바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임금(화폐)은 그들이 바란 것이면서 또한 피한 것이기도 했고, 결국에는 그들을 다른 삶형태로 끌고 들어갔다. 살림살이가 아니라 ‘경제’를 위한 그 삶형태는 지금까지 지속되며 우리 역시 그 안에 얽매여 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이 점이,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도록 비슷한 삶형태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 비록 그것의 억압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 우리가 그들과 또 다르게 이어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던 기억들, 지혜들, 경험들을.


  1. 이와사부로 코소, 『방사능과 혁명』, 어반샌드위치클럽 옮김, 그린비, 2026. ↩

  2. 권범철, 「커먼즈」,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기획, 알렙, 2026, p.39. ↩

  3. 피터 라인보우, 『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18세기 영국 노동계급 공통장의 죽음과 삶』,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26, p.22. 이후 본문과 각주에서 숫자만 표기된 것은 모두 이 책에서의 인용이다. ↩

  4. “1730년대에 “어카운트 하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신용 화폐와 노상강도를 가리켰다.” 노동하는 빈자들은 임금이 체불되는 경우 다른 방법으로 지급받으려고 시도했으며, 노상강도질에 의지하면 그것은 어카운트로 불렸다(p.271). ↩

  5. Christopher Hill, Puritanism and Revolution (London: Secker & Warburg, 1958), p.218(p.41에서 재인용). ↩

  6. 물론 노상강도에 대한 사형을 주장한 로크가 보여주듯 당시의 빈자와 부자 사이에도 재산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로크는 이미 내 것을 훔쳐간 도둑에 대해서는 법률에 호소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가 단지 나의 말이나 코트를 훔쳐 가기 위해서지만 나를 습격할 때, 나는 그를 죽일 수 있다”고 쓴다(존 로크, 『통치론: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 강정인·문지영 옮김, 까치글방, 1996, p.25; p.86에서 재인용). 이러한 적의는 당대의 유산 계급의 재산이 종종 위험에 처했음을 알려준다. ↩

  7. ‘양배추’는 관습적 전유를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 중 새뮤얼 존슨의 사전(1755)에 유일하게 등장한다. 존슨은 “그 단어의 기원이 소규모 오막살이농이 공유지에 침입하여 양배추 밭을 직접 일구던 관행에 있다고 생각했다.”(p.309) 이는 도시 작업장에서의 관습적 전유가 시골에서의 공통권과 연계되어 이해되었음을 알려준다. ↩

  8. L. S. Bevington, ‘Why I am an Expropriationist’, Liberty (May 1894), p.37(p.301에서 재인용). ↩

  9. 장물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남성 도둑은 여성 장물아비와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잭 셰퍼드도 그랬고 그러한 관계는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에 결혼은 사업 파트너십이었다. 중범죄 기록이 보여주듯이 런던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에서 가장 빈번한 남성-여성 관계가 도둑과 장물아비의 관계라는 것은 흥미롭다.”(p.192-193) ↩

  10. 자본주의로 ‘이행’하던 시기에 임금노동에 대한 혐오는 엄청났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그해 1월에서 3월 사이 베르사유에 제출된 진정서(cahiers of grievances)는 일용직 노동자(journalier)를 “소작농들이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빠질 수도 있는 일종의 지옥”으로 언급했다. 크리스토퍼 힐은 이러한 태도가 산업혁명 시기 잉글랜드에서도 거의 보편적이었다고 말한다(Christopher Hill, Change and Continuity in 17th-Century Englan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1), p.219). “사람들은 임금노동의 구렁텅이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들은 모두 희망을 버려라’는 임금노동의 입구 위에 쓰인 글귀였다.”(앞의 책, p.221) ↩

  11. 데이비드 그레이버, 「생산양식의 안팎을 뒤집기」, 『가능성들: 위계·반란·욕망에 관한 에세이』, 조원광·황희선·최순영 옮김, 그린비, 2016. ↩

  12. 안토니오 네그리, 『혁명의 만회』, 영광 옮김, 2005, 갈무리, p.31 ↩

  13. Mario Tronti, “The Struggle Against Work!,” in Workers and Capital, tr. David Border (London: Verso, 2019), p.273 ↩

  14. 페데리치는 이 점을 라인보우에게서 배웠다고 말한다. ↩

  15.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p.86 ↩

  16. 라인보우는 특히 고든 폭동이 “런던 계급 관계의 분수령”이었으며, 제국주의 지배계급에게 심각한 두려움을 안긴 까닭에 이후 훈육과 처벌의 방식이 크게 변화했다고 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번 교수형의 폐지였다(p.409). ↩

이 글은 서교연 웹진 인-무브(https://en-movement.net)에도 동시 게재 되었다.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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