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라는 소구점 -『그린 리바이어던』을 읽고

기후위기라는 이름으로 밀어닥치는 자연환경의 변화에 개인의 자유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사회를 이루는 과정에서 개인을 포함한 행위자들은 이 위기의 영향을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린 리바이어던』이 전하는 정치적 문제의식은, ‘자유’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가 인간을 넘어선 글로벌 거버넌스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기후위기’는 축적된 에너지를 사방으로 표출하고 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이들은 그 표출된 에너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찰하고, 이에 대해 반응한다. 자연환경의 변화에 개인의 자유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사회를 이루는 과정에서 개인을 포함한 행위자들은 이 위기의 영향을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마크 코겔버그, 『그린 리바이어던』 김동환, 최영호 옮김 (서울: 씨아이알, 2023)

내가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생협 활동이다. 내 역할을 미미하지만 분명하다. 기후변화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소농들의 목소리를 도시로 전하는 것이다. 땅을 살리고, 도시와 농촌이 서로를 살린다는 가치에 힘을 실어야 한다. 땅과의 유기적 관계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품질에 대한 보증, 작황 상태에 대한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지만, 그들의 우직한 농법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 가치 소비가 확산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짤막한 영상을 제작한다.

생협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사실 내 안에 있는데, “지금 내가 기후위기를 통해 소구점을 찾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반성적 고민이다. 반성이 계속되면 죄책감과 무기력으로 빠지기에 십상이니 활동이 더 분명하게 설득되도록 내 안의 위선과 모순을 정돈하는 것은 나의 과제다.

이런 점에서 기술철학자 마크 코겔버그는 논쟁적인 두 화두(기후위기와 AI)를 통해 이 고민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돕는다. 우선 그는 우리 사회 어디에서든 발화할 수 있는 기후위기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p.11)는 점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코겔버그의 정치적 문제의식은 ‘자유’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가 (인간을 넘어선) 글로벌 거버넌스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먼저, 그는 인간 중심의 통치 자체가 신뢰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급격하게 증가한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영향력을 우려한다. 기후문제를 해결할 강력한 가능성으로 AI와 함께 증가하는 고도 기술 중심의 넛지(Nudge)가 형성하는 정치 행위와 그에 대한 반응에 대한 문제의식. 과연 AI라는 (새롭게) 위임된 권력에 맡길 때 전 지구적 위기가 해소될 수 있을까? 이 복잡한 문제 앞에서 코겔버그는 거듭된 물음표를 던진다.

“AI와 기후변화는 도대체 어떤 관계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자유와 관련해 이런 관계의 정치성은 무엇인가? (중략) ‘지구’를 위해 AI를 개발하고 지속 가능하고 기후 친화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기업들의 고집이 평소처럼 사업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은폐물인 ‘윤리 세탁’(ethics washing)에 불과하다면 과연 어떡할까?”(p.11)

자유와 권력 사이의 얽힘의 문제는 기후위기라는 화두에서 정치, 경제 행위자들(특히 유무형의 힘을 가진)에게 새로운 입장을 요구한다. 여기서 홉스의 리바이던을 불러와 그가 ”자연 상태”(잔인하고 불쾌하며 경쟁적이고 폭력적인 상태를 끝장내는 존재, p.37)를 끝장내는 인공 괴물의 이미지를 AI에 투영할 때 우리는 이 혼란함을 잠재울 통치성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과연 AI라는 위임된 권력에 정치를 맡길 때 전 지구적 위기가 해소될 수 있을까?
사진출처 : Chris_and_Ralph

하지만 그 희망은 일시적이며 엄밀하게는 “희망”일 수 없다. AI가 완전한 투명성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지만, 이 수단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눈치 채지 못하게 “조작, 착취, 통치와 조종”(p.140)을 부추기는 행위자의 존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행위자(들)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점은 결국 또 다른 계층, 계급의 발생이다. “환경에 관한 문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일 뿐 아니라, 소비를 통한 새로운 종류의 자유롭지 못한 준권위주의적 지배이다. 소비사회에서 대다수는 소비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욕구를 갖도록 조작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p.161) 여기서 등장하는 인류세 시대의 “새로운 종류의 계급(기후 자본가와 기후 프롤레타리아)” 차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신기후계급 사이에선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보장받는 존재가 있지만, 그런 자유 자체가 보장받을 수 없는 존재의 차이 구분이 발생한다. 기후위기가 소구점이 될 때 그 호소에 반응할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한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 심각하고 위험한 취약성만 증대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증대된 취약성에 영향을 받는 집단을 확대하는 코겔버그의 지적이다. 그는 이 취약성 범주에 인간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취약한 땅, 물과 동식물이 공존한다.

공존하지만 ‘절대적 수동체’로 격하된 비인간 존재자들을 재사유하는 방법엔 무엇이 있을까. 코겔버그는 라투르와 해러웨이의 사유를 가로질러 인간이 “지구가 아프다”라고,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구에 무언가 빚을 지고 있다”(p.196)고 사유할 수 있는 수동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수동성으로의 전환은 심층생태학의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되는데,

“심층생태학은 생물, 생태계, 그리고 지구(또는 ‘땅’)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한다. 자연계는 복잡한 상호 관계의 균형을 보여준다. 즉, 유기체는 생태계 내에서 상호의존적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강과 대기를 옹호하고 그들에게 목소리를 줘야 한다. 그리고 심층생태학적 관점에서, 대표자의 주요 임무는 자연 실체를 우리 인간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p.197)

코겔버그의 관점 역시 기존의 철학적 사고를 상상력의 심급으로 도약시키는 것에 그치는 한계를 갖는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일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나에게 이 상상력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무거운 질문이고, 막연한 상상력일 수 있다. 하지만 내 행위 자체가 소구점을 찾는 너머에서 작동할 가능성은 오롯이 이 상상력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올해도 사과와 복숭아나무를 분양한다. ‘분양’과 ‘판매’ 사이에 간극을 좁혀 좀 더 단단한 열매가 맺히고 전해지길 바라본다.

김준영

세상에 여러 얽힘, 연결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계기독교와 상호문화를 공부하고 있고,달리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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