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조각모음] ⑬ 입장(立場)은 어떻게 윤리적 판단이 되는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입장 차를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인정 이전에 누군가의 입장을 파악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경우가 많다. 만약 역사 읽기가 입장 파악과 인정의 훈련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역사 공부는 가치있는 일이 될 듯하다.

친(親)

친(親)한 사람 특히 가족부터 먼저 보살피고[친친(親親)] 그 보살핌의 범위를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넓혀나가는 것[별애(別愛)].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여 보살피는 것[겸애(兼愛)].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하여 좋을까? 이런 질문 앞에서 전자를 택하여 좀 더 설명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듯하다. 조상에 대한, 그리고 같은 조상의 후손들 사이의, 존중 혹은 연민 등등의 감정은 친(親)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에 입각하여 친소(親疏)1관계를 따진다면, 아들이 가장 가깝게[친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생각해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나아가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가깝게 느껴짐’을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보살피고, 그것을 넓혀나가서 모든 사람이 서로를 보살피는 사회를 전망하는 사상이 유교라고 할 수 있다.

한 정치체의 최고권력자가 이 친(親)을 중시한 예라고 볼 수 있는 역사를 『삼국사기』권제2 「신라본기」권제2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에서 볼 수 있다.

“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왕(助賁王)의 친동생이다. 원년(서기 247) 가을 7월, 시조묘에 참배하고, 아버지 골정(骨正)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봉하였다.”2

친한 사람 특히 가족부터 먼저 보살피고 그 보살핌의 범위를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넓혀나가는 것이 친(親)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3세기 신라에서는 박씨·석씨·김씨가 번갈아 왕[이사금] 노릇을 하였다. 첨해는 그 가운데 하나인 석씨 집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골정은 왕이 되지 못하였지만 형인 조분(助賁)이 왕이었다. 첨해는 조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해, 첨해는 아버지 골정을 갈문왕에 봉하였다. 갈문왕은 신라에서 왕의 근친에게 주던 벼슬이다. 골정의 경우처럼, 사후에 올리기도 하였다. 갈문왕은, 신라 상대에는, 상당한 정치적 실권과 위상을 가지고 국정 운영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점차 역할과 위상이 축소되었고, 결국 신라 중대 이후 사라졌다고 한다.3 골정은 사후에 갈문왕에 봉해졌으니, 정치적 실권과 위상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아들은, 돌아가셔서 그런 처지가 된 아버지에게, ‘왕’으로 분류되는 높은 벼슬을 올렸을까? 먼저 조상에 대한 존중 혹은 연민 등등의 감정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公)

이렇듯, 첨해이사금이 한 일을, 유교사상 혹은 그와 유사한 논리에 기대어 이해하고 쉽게 넘어갈 수도 있을 듯한데,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의 역사가는 첨해이사금이 한 일을 가벼이 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무게있는 비평을 남겼다.

“사관이 논평한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었다. “다른 사람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낮추어야 하고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이는 조종(祖宗)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황제의 생부를 친(親)이라 하고 시호를 도(悼)라 하며, 생모를 도후(悼后)라 하여 제후나 왕의 지위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이는 경전의 뜻에 맞는 것으로 만세(萬世)의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은 이를 본받아 그대로 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임금의 친척으로 왕통을 이은 임금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받들어 봉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니, 절대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4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의 역사가는, 적통 승계자가 아니었던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 후, 자신의 친부모를 낮추고 제사도 지내지 않은 반면, 스스로 친아버지가 아닌 직전의 왕의 친아들처럼 처신하였음에 비하여, 신라에서는 임금의 적장자가 아니라 친척이어서 왕통을 잇게 된 새 임금이, 자기의 친아버지를 왕으로 받들어 봉하지 않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지적하고, 신라의 이러한 관행을 낮게 평가하였다.

고려시대의 역사가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한나라 선제는, 자신이 황제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친부모는 황제의 부모가 아닌 ‘제후나 왕의 지위’에 묶어두라는 관리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는 친(親)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아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황제가 친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면, 그 황제의 나라에서는 유교적 인륜질서의 지반이 물러질 가능성이 있을 듯하다. 이것은 그 사회의 안정성을 해칠 위험성을 증가시킨다.

국외자의 눈에 보이는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선제가 한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명분은 공(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명분에 따른다면 한나라 선제가 친부모를 황제의 부모가 아닌 ‘제후나 왕의 지위’에 묶어 둔 것은 선공후사(先公後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친(親)에는, 공적(公的)이라고 할 수 있는 면도 있고 사적(私的)이라고 할 수 있는 양면이 있으며, 이 양면 가운데 어느 한 면의 친이,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선택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입장(立場)

친(親)·친친(親親)·친소(親疏)·공사(公私)·선공후사(先公後私) 등등의 개념들에 관하여 생각해 본 후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을 읽어보면, 정치세력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양상도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고, 그것들에 정치적 윤리적 명분론들을 더 능숙하게 적용하게 된다. 이때 관찰자들은, 긴장과 갈등의 당사자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정치적 윤리적 승자로 판정하고픈 의욕도 잠깐 가지게 되기도 하지만, 그 당사자들 각자가 처한 입장(立場)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친(親)에는, 공적(公的)이라고 할 수 있는 면도 있고 사적(私的)이라고 할 수 있는 양면이 있으며, 이 가운데 상황에 따라 한쪽이 선택되어 왔다.
사진 출처 : Jon Tyson

여기에서 좀더 관조하여 보면, 이미 문자로 고착된 역사서에 등장하는 갈등 당사자들의 입장 못지않게, 역사서에 자신의 견해를 써 넣은 역사가의 입장에 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역사가는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를 지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첨해이사금’에 자신의 견해[논왈(論曰)]를 써 넣던 시점에 그가 살았던 나라의 윤리적 정치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어떤 입장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고, 그 입장은 그의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정당함과 올바름에 대한 그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게다. 이런 면들을 보면, 역사서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입장 혹은 세계관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한 훈련장 같다.

누군가의 견해에서 특정한 윤리적 정치적 입장을 볼 때, ‘중립적이지 않다’ 혹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그가 그런 입장을 가지게 된 과정을 입체적으로 생각하여볼 수도 있다. 후자와 같은 선택을 더 많이 한다면, 서로에 대하여 더 관용적인 사회 속에 살게 되고 지적 활동도 더 섬세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철학과 입시 면접에서,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입장 차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던 수험생이 있었고 그는 합격하였다고 한다. 합격생의 답변에는 “철학이란 사람들이 세계에 대하여 각기 다른 입장 혹은 세계관을 가진다는 것이 인정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지적 활동”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면접을 담당한 교수는 왜 이런 답변을 한 학생을 합격시켰을까? 교수는 그가 살고 있는 세계가 경직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는 그 학생을 받아들이고 대학생활을 함께 한 후 사회로 뛰어들게 하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좀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지금은 여기는 어떤가 생각해 보게 된다.


  1. 疏(소) 대신 疎(소)를 쓰기도 한다.

  2. [네이버 지식백과] 첨해 이사금 [沾解尼師今]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沾解尼師今立 助賁王同母弟也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갈문왕’ 참조

  4. [네이버 지식백과] 첨해 이사금 [沾解尼師今]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論曰 漢宣帝卽位 有司奏 爲人後者爲之子也 故降其父母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帝所生父稱親 諡曰悼 母曰悼后 比諸侯王 此合經義 爲萬世法 故後漢光武帝宋英宗 法而行之 新羅自王親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已 封其外舅者亦有之 此 非禮 固不可以爲法也”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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