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 사태는 조기대선이라는 예정에 없던 정치 일정을 만들어냈다. 대통령 임기가 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된 것이다.
내란 사태는 동시에 우리에게 큰 질문을 남겼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일까?
지난 겨울 아스팔트 광장에서 매서운 눈바람을 맞으며 우리가 절실히 느낀 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 소수의 사법, 정치, 행정 엘리트들이 사회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들이었다. 민주주의는 참여와 행동, 연대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학습했다.
한국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요소들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선거 제도를 통해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뜻을 대변할 정치인들을 직접 선출할 수 있다. 주민투표제, 주민발안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통해 시민들이 직접 조례 제개정이나 주요 정책과 예산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게다가 시민들의 열린 소통과 이성적 토론 절차를 통해 참여를 높이는 숙의민주주의와 공론화 역시 많은 지자체에 관련 조례들이 제정되어 있다.
하지만 제도와 형식이 있다고 해서 내용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지난 탄핵 국면에서 법과 제도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면서 원래의 취지를 왜곡하는 상황이 여러 번 벌어졌다. 지방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시민들의 눈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정치는 토호세력과 지방정치인, 행정 권력이 더 막강한 힘으로 상황을 좌우하면서 민주주의를 뛰어넘는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제주특별자치도 숙의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주민참여 기본조례’(이하 ‘숙의민주주의조례’)가 작동되는 제주의 상황은 제도를 운영하는 행정이 얼마나 손쉽게 제도를 무력화시키는지 보여준다.
2017년 ‘숙의민주주의조례’가 제정되었다. 제주도의 주요 정책 사업을 수립할 때 주민 500명 이상이 숙의형 정책개발을 활용하라고 청구하게 되면 관련 심의회가 청구안에 대해 숙의형 정책개발 추진 여부, 원탁회의, 공론조사, 시민배심원제 등 숙의형 정책개발 방법 등을 결정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이에 따라 숙의형 정책개발이 이뤄지면 도지사는 이 결과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조례 제정 후 8년 동안 주민들의 청구가 받아들여져 숙의과정을 거쳐 정책이 수용되는 시늉이라도 한 것은 2023년 들불축제 존폐 의제가 유일하다. 들불축제의 경우 매번 강풍으로 축제가 취소되는 경우가 빈번하고 기후위기 시대에 오름을 불태우는 것에 대해 비판이 커지면서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기자간담회에서 다른 방식의 축제가 필요하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러한 사안에 대해 시민들의 정책 개발 청구는 행정 입장에서 오히려 반가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청구건을 제외한 다른 건들은 그 결과가 몹시 처참하다.
조례 제정 다음 해인 2018년에 진행된 영리병원 허가와 관련한 숙의형 정책개발 청구는 공론화로 그 방법이 정해지고 공론화 과정을 통해 그 결과가 나왔지만 당시 원희룡 전도지사는 그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다. 2024년에는 ‘옛탐라대학교부지 활용방안’, 2025년에는 ‘버스준공영제 문제에 대한 완전공영화방안’에 대한 숙의형 정책개발 청구가 이뤄졌다. 하지만 모두 담당부서가 반려했고 끝내 숙의 과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숙의민주주의 운영의 실태

세 가지 청구건의 경험이 의미하는 바를 집어보자.
‘영리병원’ 건은 도지사가 공론화 결과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사례이다. 관련 조례는 ‘숙의형 정책개발에 의해 도출된 결과를 최대한 존중’하도록 도지사의 책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의무 규정이 아니기에 결국 도지사 멋대로 할 수 있다. ‘영리병원’ 공론화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 제주사회가 호되게 비판하자 그 다음부터는 도정이 껄끄럽게 여기는 의제의 경우 오히려 도정이 앞장서서 공론장이 열리는 것을 막고 있다.
제주도는 2024년과 2025년에 청구된 건에 대해서 담당 부서 검토 단계에서부터 반려했다.
오영훈제주도지사는 ‘우주산업 유치’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도지사 당선 후 오랫동안 비어있던 옛탐라대학교 부지를 위성공장 등이 모여 있는 ‘우주산업클러스터’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방산기업 한화를 만나 온갖 특혜 약속을 했다. 이에 대해 2024년 878명의 시민들은 중산간의 지하수자원특별관리구역인 탐라대학교에 공장이 들어선다면 지하수 문제를 비롯한 환경문제가 심각해질 것이고 강정 해군기지 건설 후 제주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우주산업은 제주의 군사적 위기를 가중시킬 것이라며 ‘옛탐라대학교부지활용방안’에 대한 숙의 과정을 관련 조례에 따라 청구했다. 하지만 담당부서인 우주모빌리티과는 ‘사업계획이 확정되어 추진 중에 있거나 처리가 이미 종료된 사업’에 대해서는 숙의형 정책 개발 대상에서 제외된다며 반려했다. 청구인 측은 해당 부지의 지구단위계획과 전략환경영향평가가 추진 중이며 해당 부지에 조성하려는 사업에 대한 고시 등의 행정행위가 없기에 사업이 확정된 것이라 볼 수 없다며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숙의형정책개발청구심의회’(이하 ‘심의회’)는 회의를 열어 이의신청서를 심의했다. 당시 청구인 측은 이의신청서에 대한 취지 설명 기회를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자 제주도는 심의회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참여하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청구인 측은 갑작스러운 통고에 항의하며 취지 설명 자료 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며 심의회 연기를 요청했지만 심의회는예정대로 강행되었다. 이날 회의록을 보면 혁신산업국장과 우주모빌리티과장은 회의에 참여해 “정책개발 청구가 받아들여진다면 우주산업에 있어서 향후에 추진하는 정책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심의회 의장인 행정부지사는 그에 더해서 “모든 행정행위에 대해서 고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등의 도정의 입장을 강변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이날 심의회는 내내 심의위원들의 질문에 해당부서가 많은 시간을 들여 설득하는 분위기로 흘러갔고 제주도의 완강한 입장이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분위기 속에 이의신청 건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25년 982명의 시민들이 ‘버스완전공영제’ 방안에 대해 숙의형정책개발을 해달라고 청구했다. 제주도의 버스공영제 운영비용이 수직상승하지만 정체된 버스수송분담률, 버스 운행 결손 등 지속적으로 발생되는 버스 서비스 문제, 손실을 제주도가 전액 보조하면서 생기는 버스회사들의 도덕적 해이, 제주도가 비용은 부담하지만 노선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모순 등이 8년의 버스준공영제 운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당부서인 대중교통과가 반려했다. 반려 근거는 시행규칙 제5조에 명시된 ‘도가 추진하는 정책사업 또는 계획이 아닌 경우’라는 것이다. 조례에도 없는 반려 근거가 시행규칙에 추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조항에 대한 해석 역시 제주도의 입맛에 따라 왔다갔다 한다. 2019년 제주의 최대 갈등현안인 제주제2공항 사안에 대해 숙의민주주의 조례의 숙의 방법을 거치자는 시민사회 제안에 대해 당시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제2공항 건설은 제주도가 추진하는 정책사업․계획이 아니라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시행규칙 제5조에 해당한다며 거부했다. 그런데 2025년에는 ‘버스완전공영제 도입 공론화는 제주도의 정책 방향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도가 추진하는 정책사업 또는 계획이 아닌 경우’라고 답변했다.
즉 조례에도 없는 시행규칙 제5조 ‘도가 추진하는 정책사업 또는 계획이 아닌 경우’는 상황에 따라 ‘제주도가 아닌 중앙정부의 사업’ 혹은 ‘도의 계획에 들어있지 않은 사업’으로 왔다갔다 해석된다.
참여민주주의의 퇴행과 제도 개선의 과제
최종적으로 숙의형정책개발대상 여부를 심의하는 ‘심의회’ 역시 제주도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우선 심의회 의장은 행정부지사이다. 심의회 구성 권한 역시 제주도에게 있다. 제주도가 구성한 위원들이 부지사가 주재하는 심의회에서 숙의형 정책개발 추진여부에 대해 제주도의 입장과 상반되게 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제주녹색당은 이에 대해 심의회 의장을 위원들 중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행정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구인 제주도의회가 위원 구성 권한을 갖도록 하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현 조례에서 숙의형 정책개발 청구 제외 사항으로 나열된 내용 중 ‘사업 계획이 확정되어 추진 중에 있거나 처리가 이미 종료된 사업’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사항’등의 내용은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반려권한을 가지고 있는 담당부서는 모호한 틈을 파고 들어 우선 반려를 한다. 청구인들로서는 진입장벽이 한층 더 높아지는 셈이다. 모호한 기준을 명확히 하거나 이해관련부서인 담당부서가 반려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례 개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제도를 손본다고 해도 제도를 운영하는 이의 주관이 제도 시행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시민참여에 대한 행정 책임자의 관점이 중요한 이유이다. 오영훈도지사는 2023년 자신의 핵심공약인 행정체제 도입을 위해 15억 원의 혈세를 투입해 관련 사안의 공론화 추진 연구용역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공론화 요구는 차갑게 외면했다. 제주의 참여민주주의는 행정 책임자가 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했다.
정말 안타까운 사례들입니다. 그런데 읽고나니 민주주의가 제도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지만, 애초 제도설계가 잘못되었기에 도민들의 의견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추첨에 의한 ‘시민의회’ 방식을 도입하고, 그 결정을 도지사나 시의회가 아닌 도민투표 같은 방식으로 할수만 있다면 아마도 중요한 사업들에 있어 도민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