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하게 뻗은 지평선을 따라 펼쳐진 매향리 갯벌은, 그 앞에 선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 만큼 광활했다. 사방이 꽉 막힌 도시의 골방에서 끙끙대던 내 마음은, 자연이라는 장엄한 방망이에 두들겨져 말끔히 세탁된 듯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은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던 쿠니사격장이 있던 자리였다. 아시아 최대의 공군 훈련장이었던 이곳에선 하루 평균 600차례, 연간 250일에 걸쳐 15~30분 간격으로 사격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민가와 훈련장이 가까워 ‘현장감 있는 전투훈련이 가능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군대 입장에서는 최적의 훈련장이었겠지만, 주민에게는 재앙이었다. 민가와의 인접성 탓에 인명 피해는 불가피했고, 피해자는 4,000여 명에 달했다. 오폭과 불발탄 폭발로 12명이 목숨을 잃었고, 중상 및 부상자는 15명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미군으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이나 사과는 없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수많은 동식물도 함께 죽어갔다. 미군기지 막사 안쪽 관제탑에 오르면 멀리 ‘농섬’이 보이는데, 폭격의 주요 표적이었던 이 섬은 면적이 원래의 3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매향리 주민의 오랜 투쟁 끝에 2005년, 사격장은 마침내 폐쇄되었다. 이후 일부 주민이 생태 환경 복원에 힘썼지만, 화성시의 무분별한 간척사업은 또 다른 생태계 파괴를 불러왔다. 그 결과 갯벌에 서식하던 수많은 생물이 멸종하거나 개체 수가 급감했다고 한다. 미래 세대에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자연이, 한 줌도 안 되는 이익 추구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매향리와 화성습지를 탐방하며 탐조 활동에 참여했다. 망원경 너머로 마도요, 도요물떼새, 백로 등 다양한 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느긋한 오후를 즐기며 목욕을 하거나, 서로 장난을 치고, 아이를 돌보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깊이 실감했다. 화성습지는 그들의 집이자 그들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집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소중한 곳을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 주민과의 대화, 주변 지역 탐방, 동료와의 소통까지 더해져 참으로 뜻 깊은 하루였다. 그러나 그날 점심시간에 겪은 일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물살이를 먹는 식당에 도착했다. 입구의 파랗게 칠한 수조 안에는 살아 있는 새우들이 숨 쉴 틈 없이 빼곡히 갇혀,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헤엄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행은 예약된 공간으로 안내받았고, 식탁 중앙에는 가스레인지 위에 투명한 뚜껑이 덮인 냄비가 놓여 있었다. 팝콘이 튀는 듯한 ‘타다닥’ 소리가 들려왔다. 뚜껑 아래, 굵은 소금에 범벅된 새우들이 뜨거운 열기를 피하려 사방으로 튀며 냄비 벽에 온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소름이 끼쳐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곧장 밖으로 나왔다. 쳐다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문득 과거의 속초 여행이 떠올랐다. 친구가 숙소에 찾아와 술안주라며 스티로폼 용기를 꺼냈다. 열기도 전부터 ‘끼기긱’ 하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뚜껑을 열자, 살아 있는 10cm 크기의 새우 세 명이 배가 꼬챙이에 관통된 채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들이 다리로 스티로폼을 긁어대는 소름 끼치는 소리는 나에겐 발성기관이 없는 새우가 목소리 대신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고, 친구는 웬 호들갑이냐며 잠시 갸웃거리다가 “비싸게 샀으니까”라며 새우를 초장에 찍어 통째로 씹어 먹었다. 그때의 경험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도망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쳐다보기조차 어렵다.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이 낯설었다.

예전, 비건이 되기 전에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 있는 새우를 먹으면서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감수성이 생겼다는 사실에 놀랐다. 고통을 피하려 몸부림치는 생명을 바라보다가, 그 시체를 ‘신선하다’며 먹는 통념이 내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과 크게 충돌했다. 결국 나는 식당을 나와, 버스로 돌아와 홀로 주최 측에서 준비해 준 채식 도시락과 미리 사둔 바나나를 먹었다.
나는 고어 영화를 보며 밥을 먹을 정도로 비위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비인간 동물이 학살당하는 장면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비거니즘이 하나의 태도가 되면, 마음지각(동물에게 마음이 있다고 느끼는 것) 수준이 높다고 여겨지는 돌고래나 강아지, 고양이뿐만 아니라, 가장 낮다고 여겨지는 새우의 죽음 앞에서도 고통을 공감하는 감수성이 생긴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차마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그 장면에서 나는 미약하게나마 새우와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내 배가 꼬챙이에 관통당했고, 산 채로 태워졌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제는,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죽이고 먹을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 내겐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곰을 산 채로 마취시켜 쓸개즙을 뽑아내는 일, 망태기에 담긴 개를 각목으로 패 죽여 만든 개시체 음식, 지느러미만 자르고 상어를 바다에 던져 죽게 만드는 샥스핀 산업 등을 혐오한다. 그 안에 추악한 탐욕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이 감춰둔 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우리가 즐겨 마지않는 소, 돼지, 닭의 시체를 이용한 음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쾌락만을 위한 먹기. 그것을 지속한다는 것은, 그 이면에 감춰진 끔찍한 학대와 죽음을 매 끼니마다 외면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