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다는 착각 –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계몽의 변증법은 근현대 철학의 고전과도 같은 책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계몽주의의 허점과 문화의 산업화를 통렬히 비판한다.

서구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을 자원으로, 세계를 계산기로 환원했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 이성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것이란 없으며 세계는 분화할 수 있는 것 -즉, 해체 가능한 원자의 합-으로 나뉜다. 세계는 더 이상 유기체가 아니다. 세계란 그저 1+1=2와 같이 개별 원자의 합일뿐인 무기물로 전락한다. 계산되지 못하는 것은 없다. 이 명제를 넘어서서 ‘모든 것은 계산되어야 한다’. 인간 이성은 절대 선이자 절대 무너지지 않는 신화로 격상된다.

무지에서 출발한 인간은 앎의 단계를 거쳐 다시 무지의 상태로 돌아간다. 사진 출처 : JESHOOTS.com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깨어나라. 신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두려움일 뿐이다. 저 산과 바위에 정령 따위는 없다. 치유는 마법이 아니며 의학이다. 우리는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근대 서구 철학의 맨트라(mantra)는 위와 같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오만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임을 드러낸다. 반면 정말로 아는 사람은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계몽의 한계이자 계몽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모순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독선은 어중간한 지식에서 기인한다. 많이 알면 알수록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그러니 무지에서 출발한 인간은 앎의 단계를 거쳐 다시 무지의 상태로 돌아간다. 신생아의 무지와 성인(聖人)의 무지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무지함에서 깨어나 처음 ‘앎’의 상태를 맛본 인간은 교만에 빠지나, 앎의 끝에 도달하려 하면 할수록 도리어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포기하라’는 자연의 거대한 메시지다. 그러니 자연을 해체하여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포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기 전부터 ‘알려고 하지 마라’는 가르침이 존재했다. 자연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언어에서는 일종의 ‘체념’과 ‘수용’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체념’은 현대 사회에서 개별 인간들이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 앞에서 맞닥뜨리는 ‘체념’과 달리 자기 파괴적이지 않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문명의 잣대는, 필히 자멸적일 수밖에 없다. nature가 자연과 본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단어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본성이며 본성을 저버리려는 시도는 결국 현존재의 불안을 낳는다. 문명화의 핵심은 우리가 자연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초인적 망상이다. 하지만 인간은 단 한 번도 자연을 벗어나 존재해 본 적이 없으며, 자연을 떠나려 하면 할수록 자연의 중력에 이끌리게 될 것이다. 가이아는 인간을 추방할 수 있으나, 인간은 가이아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문명은 새로운 형태의 비이성적 사회를 초래하며, 또 다른 야만을 낳는다. 야만(정)에 대한 부정으로 문명을 탄생시켰으나 그 끝은 결국 신-야만(합)이 될 것이다. 문명의 자멸성을 문명은 극복할 수 없다.

경제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합리적 인간의 이상형이다. 이상형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인간이 경제적 인간으로 존재한 적 없다는 의미이다. 극도의 이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은 오히려 그 이성성으로 인해 비합리적인 선택을 저지르고 만다. 예컨대 자동차를 타고 헬스장에 가서 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다가 다시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과정이 그러하다. 그러면서 본인의 우둔함을 알지 못한다. 계몽이란 이토록 덧없는 목표에 불과하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문명의 잣대는, 필히 자멸적일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Alena Koval

​계몽은 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적이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은 쉬지 않고 혁신을 좇아 왔다. ‘항상 변화하라’고 설파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된 메시지는 현대인의 사고를 잠식했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모든 산업 영역 전반에 뿌리 깊게 내려앉았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신상품을 맞이하고, 신기술을 맞이하고, 어제보다 새로워진 나를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를 계발한다. 언뜻 새로워 보이지만 그 기저는 전혀 새롭지 않다. 했던 이야기의 반복일 뿐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괴리, 인간과 인간의 격차는 공고해진다. 세계는 떠들썩한 공간처럼 보이나 거기엔 ‘목소리’가 없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문화 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문화 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과 참신한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이 원하는 새로움은 ‘체제가 허락하는 새로움’이다. 규범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금기로 다루어진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야기마저 자본주의에 포섭된다. 영화 《기생충》이 그러하고, 《설국열차》가 그러하다. 유행하는 웹소설의 플롯은 ‘주인공의 인정 투쟁’이다.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으로 일컬어지는 클리셰적 장치)의 목적은 오로지 계급의 전복이지, 세계에 대한 반발이 아니다. 인정과 사회적 지위를 욕망하지 않는 주인공은 대중 앞에 나설 기회조차 잃는다. 을이었던 내가 갑이 되어 복수하는 서사만이 자본의 입김-플랫폼-아래서 그 껍데기를 바꿔가며 돌림노래처럼 반복된다. 이로써 체제에 대한 ‘진정한’ 저항은 거세된다.

오늘날 문화 산업이 허용하는 이야기는 오직 ‘소비자의 재생산’이 가능한 서사뿐이다. ​소비주의를 유지하는 권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소비자를 기만하고 체제 자신을 유지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자본계급과 기득권의 교묘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침해당한다. 이토록 반인륜적인 체제에도 불구하고 계몽에 세뇌당한 인간은 ‘할 수 있다’ 또는 ‘알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반발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혁명의 싹을 뿌리 뽑고 비슷한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예측할 수 있는 선에서의 새로움만을 허용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양산한다. 자본의 욕망에 봉사하는 이야기는 예술이 아니라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상품을 팔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자본주의 아래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무관하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파시즘의 또 다른 형태다. 그것은 순종을 강제하는 대신, 순종을 내재화시킨다. 자본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은 자본이 곧 자유라고 착각하지만, 이는 권력과 지배가 허락하는 ‘길들여진’ 자유다.

낭만주의의 사멸 이후, 베이컨-데카르트-칸트 세 철학자의 환원주의 근대 철학이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는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계몽주의에 대한 저자의 전제를 읽어내는 것 역시 어려울 것이다. 만일 내가 남성-여성, 인간-자연, 정신-물질의 이분법과 위계질서로 구성된 현대 문명의 테제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이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본문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 텍스트로 한병철 철학자의 책 『투명사회』와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즈의 『에코페미니즘』을 추천한다.


※ 더 읽어볼 책

• 한병철, 투명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4

•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즈, 에코페미니즘(개정판), 2020

조윤지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을 소명으로 삼아, 천혜의 자연에 따른 마을 공동체로 이루어진 평화로운 지구가 도래하는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농반어로 바다밭과 땅밭을 모두 가꾸는 농사꾼 인어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궁극적으로 생태아나키즘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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