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살고 있는 집의 계약을 연장했다. 햇수로는 4년째 이 집에서 살고 있다. 대학 시절 기숙사를 제외하고, 서울에서 독립해 생활하는 첫 집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학교 기숙사의 방역 지침이 강화되고 결국 폐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한 곳도 마음 편히 등을 붙일 수 없는 서울에서, 주거 공간만큼은 안정적이기를 바랐지만, 언제 기숙사에서 짐을 빼야 할지 모를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졌다.
서울에서의 불안정한 주거 상황은 쉽게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기숙사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당시에 내겐 너무 멀게 느껴졌던 금액의 돈이 오가야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집을 구할 당시, 여러모로 불안하고 걱정이 앞섰다. 집을 구하면서 삶의 한 부분을 재편해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드는 일인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이전에도 몇 차례 이사를 경험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새로운 ‘이주’를 체험하는 것 같았다.

사진출처 : hicret
내가 사는 집은 크지 않다. 아니, 성인 두 사람이 들어가면 공간이 꽉 차게 느껴지니 작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몇 평 되지 않는 이 집을 깨끗이 치우고 정리하는 데에는 적어도 2-3시간이 걸린다. 이곳저곳에 쌓인 먼지는 닦고 쓸자마자 다시 가라앉는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책장 전체를 다시 정돈해야 할 때가 있다. 여러 개의 화분이 있었지만, 능력 없는 식물 집사인 나는 작은 화분 하나를 근근이 키우는 것도 버겁다. 매번 물 주는 시기를 놓치곤 한다. 빨래는 얼마나 빨리 쌓이는지, 화장실은 얼마나 자주 청소해야 하는지도 이 집에서 배웠다.
이러한 일상적 행위들을 통해, 나는 ‘소중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전은 소중함을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내게도 소중한 것들이 많다. 사람도 소중할 수 있고, 내가 소유한 물건이나 기회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 앞에서, 앞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며,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한다. 쇼케이스에 진열된 물건들을 바라보며 서성이는 것도 그 자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정동'(Affect) 개념은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나의 삶을 두르는 소중한 것들과 어떻게 연결되며 살아갈지를 고민할 좋은 단초를 제공한다. 신승철은 정동을 감정이나 정서와 구별하여, “감정이나 정서는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라면 정동은 ‘움직일 때의 마음'”이라고 설명한다.(『정동의 재발견: 가타리의 정동이론과 사회적 경제』, 5) 그러니까 내가 집에서 꼼짝 않고 쉬려고 해도, 집 한 구석이라도 “보살피고 아끼고 행동하고 이행하고 움직일 때” 바로 그 순간이 ‘정동’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또, 정동은 물리적 행동을 통해 감각하고 재배치하는 힘을 말한다. 집 안의 물건들을 재배치하고, 청소하며,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반대로 무엇에 관심이 없는지를 깨닫는 행위들. 이러한 행위들이 단순한 정리나 청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을 재배치하고, 삶의 질서를 새롭게 잡아가는 일이다. 정동적 행위는 결국, 내 삶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결국, 집은 내게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나의 소중한 것들을 품고 있는, 나만의 작은 우주인 셈이다.

서울의 주거 문제는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의 정동이 얼마나 비대해지고, 연결보다는 소외와 단절을 부추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 현상이다. ‘집’은 사람들의 정동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안정된 주거 공간의 부재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불안을 안겨주고, 그 불안은 생활 속의 작은 일들-책을 정리하고, 집을 청소하며, 화분에 물을 주는 행위들-을 소홀히 여기고 오로지 ‘입지’와 ‘가격’에만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기괴한 ‘주거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형성한다.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공간을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정동적 경험이라고 할 때, 지금 우리 사회가 ‘집’을 이해하는 행위 자체에 새로운 변화를 많은 이들이 감각한다. 여러 층위에서 한국의 주거 문제를 바라보며 집이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 대상이 아니라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내가 만들어지고,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로 인식하는 변화의 질문을 찾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집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서울의 주거 문제는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정동적 경험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가 아닌 단순히 소유 대상으로의 물리적 공간의 확보 문제로 쉽게 변해버린다.
부동(不動), 꼼짝하지 않는 아파트 숲을 올려다보며 나의 집은 어디일까, 여기에서 사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새로운 질문은, 아마도 내가 있는 곳,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