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⑫ 사랑하면 달라집니다

반복되고 단조로운 움직임 사이에서 발견하는 차이는 다양성을 낳고 그것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특이해지는 변화는 삶을 재창안하며, 심원한 삶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다

대학원 다닐 때였지요. 지도교수님이 갑자기 저에게 꼭 필요할 것 같다면서 선물을 건넸습니다. 보아하니 책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나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가서 풀어보았습니다. 저는 책 제목을 확인하고는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습니다. 그것은 세간에 회자되던 사이쇼 히로시의 『아침형 인간』(한스미디어, 2003)이었지요. 그리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원 수업은 아침 10시부터인데 오후 3시에 겨우 나타나 늦잠 잤다고 말하던 그때, 발제자인데도 불구하고 전화벨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자고 있던 그때, 꼬박 밤을 지새운 채 학교에 나가 세미나 자리에서 손이 떨렸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도교수님에게 감사하다고 전화를 드리자,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자네에겐 공부보다 그게 더 필요할 거야”라고 말하셨지요. 그때 저는 올빼미족인지라 사실은 교수님의 선물이 그다지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활방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아내와 새벽 5시에 잠자는 제가 만나니 서로 마주치는 순간은 늘 새벽녘이었지요. 마치 밤에 찾아오지만 얼굴을 알 수 없었던 에로스와, 낮에 살며 에로스의 실체를 궁금해하던 프시케가 만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새벽에 밥을 같이 먹었는데, 저는 아침에 자기 위해 먹는 것이었고, 아내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더 오래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밤마다 부스럭거리며 아내의 잠을 깨우는 것이 미안해서 저는 아침형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잠들기 위해 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머릿속으로 양의 숫자를 세거나 영화 한 편의 스토리를 영상으로 만들어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저는 저녁이 되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새벽에 되면 잠이 깨는 아침형 인간으로 재탄생합니다. 물론 뒤척거리느라 아내의 잠을 깨운 날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말이지요.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거라는 걸 그때 깨달았지요. 저는 아침에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등 아침시간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도 참 좋았습니다.

삶과 차이 나는 반복

다름을 발견하는 것은 대립과 차별의 감정이 아니라 차이가 낳은 다양성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
사진출처 : Odiseo Castrejon

고백하건대 사실 저는 스피노자의 내재성(immanence)이라는 개념에 익숙지 않았습니다. 단조로운 공부와 똑딱거리는 일상을 살던 저로서는 삶에 내재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내와 마주 앉아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거나, 저녁에 퇴근하고 맥주 한잔 마시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하면서 삶의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삶이 풍부해야 생각도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지요. 이를테면 제가 책에 자주 썼던 생명사상의 바탕에는 연구실에 있는 고양이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고, 농업과 생태계에 대한 생각의 바탕에는 고양이들을 위한 캣글라스와 상자텃밭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생활과 연관되지 않은 사유나 사상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삶과 완벽히 무관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일상 속 소재와 주제가 사유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최근 새로운 삶의 형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살림을 아내와 함께 해나가는 과정이 저의 여성관에 큰 변화를 주고 있었습니다. 설거지와 빨래 널고 개기, 걸레질, 화장실 청소가 제 몫으로 배정되었습니다. 요리를 잘하지 못하지만 가끔은 주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아내에게 허락을 구했습니다. 50대에 접어들기 직전의 한국 남성의 통속화된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은 대안적인 삶의 태도를 갖추기 위한 노력 중 일부입니다. 이제야 일정표에 화장실 청소하는 날, 분리수거하는 날 등이 하나둘 표시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삶이 단조롭게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어제 먹었던 위장약을 오늘 또 먹어야 하고, 어제 했던 운동을 오늘 또 해야 하고, 어제 걸었던 출근길을 오늘도 걸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분명 많이 달랐습니다. 우주, 생명, 자연, 사물의 움직임은 차이 나는 반복에 의해 화음과 율동, 음율, 리듬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물론 저도 어떤 상황에서는 기시감처럼 예전에 했던 것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연구실에서 맞이하는 삶의 반복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었습니다. 사계절의 반복, 아침, 점심, 저녁의 반복, 생명의 생과 사의 반복 등은 매 순간마다 차이가 났습니다. 연구실에서 커피가 일찍 식는 것을 보고 겨울이 다가온 것을 느끼고, 작업하다가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보고 여름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지요. 그러나 그 새로운 겨울이나 여름은 이전의 겨울이나 여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때 헤겔과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 동일성, 통일성, 통합 등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반복이, 세상 만물이 다 똑같고 통일되어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지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것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이가 단지 ‘다르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다’라는 분기로 향하는 지점들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가재는 유충 때 줄무늬 정도였던 것이 크면서 울퉁불퉁한 지절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타인과 저의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차이로 발전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특히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후배와 동기들이 시간이 가면서 많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때면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그리고 제 삶이 늘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도 발견했지요.

생명의 유일무이성 = 특이성

몇 년 전 동물보호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동물보호 무크지 『숨』을 편집하면서, 생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되었지요. 그전까지 저에게 생명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이고 신비롭고 영성적인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의 생명사상, 동학운동의 생명사상, 김지하의 생명사상 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생명, 특히 구체적인 동물들을 마주치면서 이들 각각이 모두 다른 마음과 몸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공장식 축사에서 번호로 불릴지라도 하나의 특이한 존재로서 제각각 다른 마음과 몸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공장식 양계장에서 비육되다가 4주 만에 도살되기 위해 화물차로 수송되던 닭 한 마리를 한 동물보호활동가가 발견합니다. 크기는 이미 묵직한 한 마리 닭이었지만, 털도 채 다 나지 않고 삐악삐악 울던 어린 닭이었죠. 우리가 무심코 먹었던 치킨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그 닭은 동물보호활동가의 돌봄을 받으면서 자기 이름도 알아듣고 들판에서 건강히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떠한 생명도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의 유일무이성,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말한 특이성이었던 셈입니다.

또 어떤 농부는 기르는 소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지요. 그는 소와 교감하고 매번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저 역시도 송아지가 얼마나 정이 많은지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시골에 살 때 송아지를 쓰다듬으면 송아지들은 좋아서 껑충껑충 재주를 피웠으니까요. 그런데 이 농부가 소에 이름을 붙여주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름 짓는다는 것이 유일무이성을 갖게 하는 원천은 아닙니다. 이름이 없던 순간에도 그 송아지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러나 이름 짓는다는 것의 의미는 색다릅니다.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돌보고 교감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저 역시도 이름을 붙여준 고양이가 여럿 됩니다. 저를 피하는 길냥이를 소심이, 저의 손길에 살갑게 몸을 맡긴 고양이를 ‘큰마음을 갖고 있다’ 해서 대심이라고 붙여주었지요. 그리고 대심이를 자주 부르다 정이 들어 연구실 안으로 들여와 같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 길냥이 대심이는 저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생명의 유일무이성은 스피노자가 말한 특이성이 무슨 의미인지를 넌지시 알려줍니다. 그러한 생명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발견이 헤겔주의의 동일성 위주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궁극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삶의 재발견, 삶의 재창안

특이한 것, 유일무이한 것과 마주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먼저 재미와 놀라움,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너에게 이런 면이 있었네!” 하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집니다. 이렇듯 특이성은 우리 삶에서 촉매제이자 효모이자 감초입니다. 우리는 발견의 시각에서 특이성을 응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발견은 외부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내부 관찰자의 발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본다고 말하지만, 우주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과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과 공유하는 면이 많습니다. 이렇듯 특이성의 발견은 자신의 내부에 특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자연과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연과 생명의 특이성, 즉 유일무이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셈이지요.

늘 보던 친구에게서 어느 날 색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재미가 생깁니다. 갑자기 둘 사이에 자극이 되고 활력이 생기고 생명 에너지가 발산됩니다. 단조롭고 똑딱거리는 일상 속에서 갑자기 변화가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이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들, 젊은이들,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특이한 행동이나 특이한 활동, 특이한 예술창조 등은 우리에게 자극과 영감을 줍니다. 그 다름을 발견하는 것은 대립과 차별의 감정이 아니라 차이가 낳은 다양성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우리는 특이성 속에서 욕망과 희망, 열망을 품게 됩니다. 우리 삶의 특이성은 다양함, 충만함, 풍부함의 소재임에 분명합니다. 그 특이성이, 삶의 유일무이함과 소중함, 존엄함을 재발견하게 해줍니다.

또한 축제나 파티처럼 삶을 특이하게 만들 때는 어떤 느낌이 드나요? 공동체에서 카니발적인 축제와 놀이를 할 때, 우리는 특이하게 몸을 움직여 평화의 춤을 춥니다. 온갖 손짓 발짓으로 자신의 특이함을 연출하지요. 흥겨운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보면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흥을 느끼고 비로소 자기만의 춤을 추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는 자기만의 특이성을 재발견하는 순간이지요. 그럴 때면 아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자신의 특이성을 만들어냄으로써 공동체의 난장 속에 녹아들어갑니다. 그것은 특이성이 단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삶의 재발견은 서로의 특이성을 응시하고 발견하는 것이지만, 이미 주어진 특이성이 고갈되고 침묵이 감돌 때 특이성 자체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재창안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속적인 문명은 똑같은 미디어, 인터넷, 문화 향유, 심리치료, 힐링, 웰빙 등으로 단조롭게 일상을 빵 찍어내듯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통속적인 문명의 동질화의 방향성 때문에, 우리의 삶이 비루해지고 단조로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침묵하는 순간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때가 바로 색다른 삶을 재창안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외적으로는 아무리 화려하고 시끄럽고 복잡해도 내면세계는 너무 조용하고 비루하고 지긋지긋하기 때문입니다.

특이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협동하고 연대하고 단결하고 연합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차이를 발견해야 하고 더 다양해져야 합니다. 이전까지 동일성의 철학들은 협동할수록 같아지고 닮아져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연대하고 협동할수록 더 달라져야 합니다. 다양성과 차이로 이루어진 공동체나 생태계, 네트워크 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다양해지고 차이가 만개해지기 위한 판과 배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특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더 사랑하고 연대하고 협동하면서 점점 ‘달라지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이 만나는 것은 다양한 사람 그 자체를 인정하고 확인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색다른 차이, 미세한 차이, 특이성의 창조와 생산, 다양성의 판을 만드는 소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순간은 특이해진다!

특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더 사랑하고 연대하고 협동하면서 점점 ‘달라지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진출처 : Alvan Nee

제가 특이해서일까요, 아니면 사랑이 저를 특이하게 만들기 때문일까요? 아내를 만날 때면 저는 아이도 되고, 동물도 되고, 벌레도 되고, 심지어 외계인도 되는 느낌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 특이해지나 봅니다. 이런 강렬한 사랑은 삶을 변화시킬 에너지와 힘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용기가 생기고, 활력이 생기고, 아이디어가 생깁니다. 우리 문명이 직면한 문제들의 해결방법은 어떻게 사랑을 만들어낼 것인가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는 우울한 사람, 고독한 사람, 좌절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낼 힘이 없다고, 외롭다고, 우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자신을 특이하게 만들었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을 통해 특이해진 사람은 외롭지 않고, 강건하며, 에너지가 넘치니까요.

한 번은 제가 엄청나게 특이한 사람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고양이와 생명, 식물, 침, 뜸, 생태주의, 공동체, 채식 등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별종처럼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파고들어가 보니 제가 원래 특이한 사람은 아니었고, 아내와 연애하면서 사랑이 싹트고 점점 지금의 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즉 아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점점 특이해지는 방향으로 향했던 것이지요. 저는 아내에게 놀이를 하는 아이일 수도, 멀리서 응시하는 해바라기일 수도, 밑바닥을 지키는 돌덩어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심지어 사자, 호랑이, 하이에나, 꽃, 벌레, 나비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저를 특이하게 만들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텔레비전을 멍하게 보거나, 인터넷과 게임에 빠져들거나, 스마트폰을 자꾸 들여다보는 삶, 즉 소비와 향유의 삶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기억하기로, 저는 엄청나게 중독에 약해서 아마 미디어나 스마트 기기에 중독이 돼도 여러 번 중독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소비와 향유가 아닌 생산과 창조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통해 특이해지는 것이 더 재미있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독하게 미디어를 지켜보는 시간이 줄어들고, 함께 대화하고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특이성 개념은 굉장히 딱딱하게 느껴지거나 별종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개념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랑할수록 특이해진다는 점에서 사랑, 욕망, 정동의 비밀을 알려주는 키워드에 가깝습니다. 물론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은, 원래부터 존재가 특이하다는 의미와 사랑하기 때문에 특이해진다는 의미 모두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사랑하기 때문에 특이해진다는 점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가타리는 되기의 사랑은 ‘재특이화 과정’이라는 말로 다소 어렵게 설명합니다. 결국 삶의 변화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사랑을 통해 심원한 변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왁자지껄하고 흥이 넘치고 놀이와 재미가 있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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