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⑰ 스피노자의 사랑의 혁명, ‘자유인의 해방전략’

담배꽁초 사건으로 시작된 갈등은 고양이 모모의 등장으로 해결됩니다. 입구와 출구는 뻔하지 않으며 상식적인 노선을 따라 진행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가능성을 말하지만 증오는 과거의 틀 안에 상대를 가둡니다. 뻔한 해결책, 뻔한 이야기는 미래로 향하지 않고 과거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랑은 욕망과 함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입구와 출구의 알 수 없는 불일치야 말로 미래를 향한 탈주선에 희망을 줍니다.

사랑의 질문들, 애증의 대답들

“자기는 늘 그런 식이잖아!” 저를 향하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는 바로 이런 종류의 아내의 말입니다. 사랑에서 발생하는 세상 모든 문제들의 요지는, 사랑의 원천은 미래를 향한 질문들이고, 증오의 원천은 현재와 과거의 대답들이라는 점입니다.

한 일화가 있습니다. 아내와 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함께 차를 마시며 생활과 철학,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합니다. 어찌 보면 한량처럼 한껏 여유를 부리는 삶이지요. 하지만 하루 24시간 가깝게 붙어 다니기 때문일까요? 사랑의 크기만큼 애증도 함께 커지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그 애증이 혐오나 배제, 차별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고 뻔하다고 느낄 때, 그리고 그 뻔함이 매사에 답이 되어버릴 때, 애증바이러스가 활성화되어 우리 둘 사이를 괴롭히지요. 그러나 저는 지독한 애처가인지라 그런 상황이 발생할라 치면 사전에 차단하거나, 아예 멀찌감치 달아났다가 나중에 눈치를 봐서 다가가거나, 특유의 애교로 스리슬쩍 넘어가거나, 혹은 색다른 사건을 갑자기 소환하여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곤 합니다. 이 일련의 대처법은 결혼생활 10년차 남편의 터득한 비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날은 지독히 운이 안 좋았던 날입니다. 호주머니에 담배꽁초를 넣어둔 바지를 깜빡하고 세탁기에 넣고 돌린 것이 화근이었지요. 담배꽁초가 해체되면서 세탁기 속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아내는 그동안 쌓아두었던 온갖 불만을 쏟아 부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고 황망하여 동작 정지가 된 상태로 고스란히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내는 그동안 탐탁지 않았던 저의 모든 면모들, 즉 저의 뻔한 구석들, 비루한 모양새들, 잘못된 생활습관, 위생 상태, 실수 등등을 지적하면서 “너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는 판결을 꽝꽝꽝 내리고선 휘리릭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시간은 정지한 것 같았고,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내에게 100통의 문자와 전화를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지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지만, 선풍기 켤 생각조차 못했지요. 갑자기 아내와 함께 마시던 차 한 잔의 여유가 그리워졌고, 함께 나누었던 철학과 생명,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아내는 그날 아주 늦게 들어왔습니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듯했지만, 저는 모기만 한 소리로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아내를 끌어안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화 난 목소리로 “늘 그런 식이지” 하며 잔소리를 시작했고, 저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깽이 모모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양쪽을 번갈아 보며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나 봅니다. 마치 “엄마아빠 싸우지 마요”라고 외치는 아이 같았지요. 아내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갑자기 더 큰 사랑이 찾아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의 일화는 저의 결혼 일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위기와 질문의 시기에 쓰인 에티카후반부

스피노자가 쩔쩔 맸을 위기의 순간은 여러 번이지만,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것은 그를 후원하던 공화파 드 비트 형제가 잔인하게 피살당하고 헤이그에 야만의 무리가 판을 치던 바로 그날이었을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말을 타고 그곳으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극구 만류하는 친구들 때문에결국 단념하고, 하숙집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질문을 던지고 주저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가 쓰던 『에티카』는 이미 3부까지 완성된 상태였지만, 처음에 기획했던 그대로 진행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는 당대의 증오의 상황, ‘예속을 영예로 여기던’ 상황, 맹목적인 신앙의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리고 긴 모색과 방황의 끝에 다시 펜을 들어 『에티카』를 계속 집필해나갑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심원한 변화를 겪습니다. 그의 필체와 내용도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사랑이 증오를 이기고 영구적인 승리를 하리라는 전망에 대해 그는 깊게 탐색합니다.

그 결과 『에티카』 전반부의 입구와, 후반부의 출구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입구와 출구가 일치한다는 기하학적인 방법론과도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입구와 출구가 일치하는 것은 의사소통, 갈등, 투쟁을 통해 정확히 문제가 되었던 상황에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만약 입구와 출구가 일치했다면 스피노자는 야만의 현장에서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종교에서 파문당하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그가 은둔을 통해서나마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드 비트 형제에 대한 의당한 보상이자 행동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헤이그 시내로 달려가지 못한 그는, 자신의 사상의 입구와 출구가 일치하도록 할 수 없었지요. 그것이 『에티카』의 후반부를 쓰게 만들고, 엄청난 사상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랑과 욕망은 영구적인 승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자유인의 해방전략의 전모입니다. 사진 출처 : Peter Durand

스피노자의 입구와 출구의 불일치는 이미 기하학적 방법론을 벗어나 있었으며, 이는 후대 펠릭스 가타리가 제안한 지도 그리기의 방법론으로 이미 이행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입구와 출구의 불일치는 탈주와 지도 그리기의 원천이 됩니다. 이제 그의 전략은 어떻게 미래로 탈주하고 미래사회를 향한 전략적 지도 제작의 방법론을 선취할 것인가로 바뀝니다. 입구와 출구의 불일치는, 20세기 중반의 강력한 스피노자주의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창안한 분열생성론의 배경이 됩니다. 들어간 곳과 나갈 곳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를테면 고뇌하고 연민하던 연애의 문제를 풀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절망의 밑바닥에 빠졌다가 올라온 사람은 갑자기 시인이 되거나, 화가가 되거나, 혁명가가 되거나, 춤꾼이 되기도 합니다. 입구와 출구 사이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되고, 미지의 곳으로 나아갈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학생 때 시험을 망쳐 실의에 빠지거나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입구와 출구가 같은 대면이라면, 시험을 망치고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 입구와 출구가 다른 탈주 혹은 지도 그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스피노자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에티카』 후반부는 다른 사람이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필체나 내용에서 전반부와 완벽한 차이를 보입니다. 스피노자는 전방으로 탈주합니다. 미래로 탈주합니다. 미래로부터 온 편지를 씁니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는 혁명가로서만 발언하고 사랑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전략적 지도 제작을 수행합니다. 놀라운 변화, 돌이킬 수 없는 변화, 획기적인 변화가 『에티카』 후반부에서 엿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립니다. 당대의 상황에서 상상하고 구상하고 형성할 수 있는 최대치로 자신의 내부에 감추어진 주름을 펼쳐냅니다. 그리고 입구와 출구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했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한 그는 1675년 『에티카』를 완성하고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44세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사랑과 욕망은 결국 승리한다!

스피노자의 정동의 기하학의 구도를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어떨까요? 왜 스피노자를 그토록 혁명적이라고 할까요? 스피노자는 외부에서 들어온 우발적인 원인이 정신의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기쁨(수동의 능동)과 정신의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슬픔(수동의 수동)을 구분합니다. 일단 우발적으로 다가온 상황에 처하면 모든 사람의 정동은 수동의 상태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만약 우발적인 수동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망과 일치하면 기쁨이 되는 수동의 능동을 형성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과 불일치하고 예속과 무능력에 빠지면 슬픔이 되는 수동의 수동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도를 이해하려면 서로 간의 욕망이 상승하는 윈윈의 상태에서 기쁨이 형성되고 서로의 욕망이 억압되면 우울, 침잠, 무기력의 슬픔이 형성되는 것과 같이 기쁨과 슬픔의 공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시처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함과 한계, 끝이 있음을 자각하는 귀중한 정동입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슬픔이 마치 능동적으로 다가와 기쁨에게 말을 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에티카』의 정동의 기하학은 기쁨과 슬픔의 이분법을 통해 사랑과 증오, 명예와 치욕, 자기만족과 후회 등의 수평선을 그립니다.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의 관계를 통해 기쁨과 슬픔에 대한 독특한 지도 그리기를 해냅니다.

우리는 종교의 관점에서 선/악의 이분법을 생각할 때, 선(善)의 세력과 마찬가지로 악(惡)의 세력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와 악마의 이분법에 따라 생각을 전개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것을 좋음과 나쁨의 구도로 이행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좋음이라는 긍정 이외에도 나쁨이라는 부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쁨의 부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즉 존재의 긍정이 다가와 구성할 때까지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공백의 도화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즉 기쁨, 선, 좋음, 사랑과 대비되는 슬픔, 악, 나쁨, 증오는 하나의 독립적인 항으로써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지 상태, 부재 상태, 무능력 상태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을 증폭시키고, 증오는 증오를 증폭시키기 때문에 증오는 증오를 통해 조절될 수 있겠지만, 증오에 사랑이 다가가서 감싸 안으면 더 큰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을 기다리고 사랑이 그려나갈 백지이자 도화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런 점에서 사랑과 욕망은 영구적인 승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자유인의 해방전략의 전모입니다.

결국 정호승 시인의 시처럼 슬픔이 기쁨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늘 기쁨이 슬픔에게, 사랑이 증오에게 먼저 말을 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한한 긍정과 생성, 기쁨과 사랑의 삶의 영구적인 승리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스피노자는 일갈하고 있는 셈입니다.

증오는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지금까지 민중운동은 증오가 아닌 사랑의 힘이 역사를 만들어온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영역에서는 절규와 아우성 또한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부정의 힘, 슬픔의 힘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하고, 모순, 적대, 투쟁 등이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라는 주장이 전면에 나섭니다. 그런 사상을 가진 이들에게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전방으로의 탈주’는, 부정이 긍정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증오가 사랑에게 가학적인 억압을 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에티카』 후반부 작업을 통해서 삶의 긍정성, 생산성, 존엄성이 슬픔, 증오, 폭력, 차별, 착취와 같은 부정적인 힘에 심원한 변화를 가할 수 있고, 사랑의 영구적인 승리로 향할 것이라고 명료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승리, 삶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말할 때 죽음을 또 하나의 독립항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죽음은 우발적으로 찾아오는 유한성의 증거일 뿐, 삶에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하여 변화를 가할 수 있는 부정적인 힘을 갖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지요. 단지 죽음은 끝, 유한성, 한계로서의 의미만을 갖습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서의 죽음과 유한성으로서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유한성으로서의 죽음은 삶을 살아가는 시간을 더욱 소중하고 활력 있게 만드는 비밀입니다. 끝이 있음으로 해서 생명력과 생명 에너지를 발아하고 긍정적인 힘을 최대한 펼쳐 보이는 생명의 비밀이 사랑과 욕망, 정동에 내재해 있는 셈이지요. 결국 죽음은 부정적인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계일 뿐이지요. 그래서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의 삶에 대한 숙고다”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방법론은 『에티카』 4부와 5부에서 이미 지도 제작의 방법론으로 이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입구와 출구가 기하학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동의 지도를 그려나갈 때 입구와 출구가 분열된 상태에서 서술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삶의 긍정성과 사랑의 무한성이 그려내는 색다른 출구를 응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가 그려낸 정동, 사랑, 욕망의 지평은 생명 에너지와 활력으로 가득하고, 무한한 잠재성으로 가득한 사랑의 색다른 승리의 역사를 향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부정의 힘이 가득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모순, 적대, 투쟁, 증오, 폭력, 차별, 착취로 가득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이들은 젖을 먹을 것이고, 강아지들은 뛰어놀 것이고, 꽃들은 흐드러지게 필 것이고, 새들은 노래할 것입니다. 생명(life)이 존재하듯 삶(life)도 역시 찬연하게 긍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자유인의 해방전략의 전모

“증오가 사랑으로 바뀌면 더 큰 사랑이 된다”라는 『에티카』 4부의 구절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반문하겠지요. 굳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아의 비유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증오범죄나 혐오발화, 차별 등의 원동력은 사랑의 능력이 부재하기에 변용에도 무능력한 앙상한 체계나 개인, 집단일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결국 그런 체계나 집단, 사람은 ‘예속인’이며, 오직 사랑과 욕망의 능력을 통해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는 사람은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씨앗은 자유로운 삶과 정신이 있는 한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낙관적인 전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혁명을 선취한 스피노자가 그려낸 미래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유인의 해방전략을 접한 사람들은 동화 같다고 말하거나, 너무 순진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곧 혁명이다”라고 일갈한 스피노자는 그저 동화나 공상으로 얘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헤겔은 부정의 힘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면서, 인륜적 공동체가 인간 사회에는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모순·적대·투쟁의 부정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더 성숙한 사회로의 부정의 부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헤겔의 생각이야말로 더 동화 같고 순진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인륜적 공동체는 미리 전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순과 적대는 더 큰 사회 분열로 이어집니다. 오히려 삶의 긍정적인 역능인 사랑과 욕망의 능력에 따라 인륜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생산하려는 사랑의 용기 있는 행동이 혁명에 필적한다는 점을 스피노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욕망, 정동을 통한 공동체의 구성과 삶과 생명에 대한 긍정적인 에너지의 발산이 자유인의 해방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영원성을 향하여

아깽이에 대한 사랑, 상자텃밭은 꽃과 나비에 대한 사랑, 새로운 일이 주는 색다른 질문에 대한 사랑이 찾아왔지요. 사진 출처 : rawpixel

아내의 가출사건 이후로 저의 입지는 굉장히 좁아졌습니다. 우선 아내의 눈치를 보는 일이 참 많아졌습니다. 혹시 훌쩍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생겼지요. 그런데 최근에 저는 사랑하면서도 애증을 느끼는 그러한 상황이 무시간적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들을 되도록 빨리 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색다른 문제 제기를 하고 색다른 생각의 경로를 개척하고, 색다른 사건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노력은, 퇴근길에 함께 이야기 나눌 대화 소재를 비장의 카드로 준비하거나,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기쁘게 하거나, 고양이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찾아 전달해주거나, 때때로 내 연구 주제에 대해 비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색다른 조언을 구하는 등의 과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점차 담배꽁초 세탁 사건은 아내의 뇌리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 대신 아깽이에 대한 사랑, 상자텃밭은 꽃과 나비에 대한 사랑, 새로운 일이 주는 색다른 질문에 대한 사랑이 찾아왔지요.

그때 사랑은 미지의 미래로 향한 여행과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래진행형의 무의식인 셈이지요. 스피노자는 드 비트 형제의 피살이라는 하나의 계기, 즉 특이점을 거쳐 미래를 선취하고 미래진행형적인 무의식을 작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 만든 영구적인 승리의 상에 대해 전략적인 지도 제작을 합니다. 마치 혁명문건과도 같습니다.

저 역시도 아내와 함께 늘 미래를 향해 문제 제기를 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부지불식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판단하려 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과 욕망, 정동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입구와 출구의 일치를 경험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대면, 모순, 갈등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미래로 가는 색다른 출구를 개척하는 지도 제작으로 향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스피노자가 발견한 지점은 『에티카』 후반부의 내용이 올바른지 틀린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획기적인 태도 변화를 이루었던 지점입니다. 바로 입구와 다른 출구를 개척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미래를 향한 전방탈주이자 미래진행형적인 무의식입니다. 이를 정동의 지도 제작법에 오롯이 그려냈던 스피노자의 에너지와 활력, 사랑의 능력에 탄복하게 되는 저녁입니다. 아내와 저는 오늘도 술잔을 기울이며 스피노자를 안주 삼아 시간을 보낼 작정입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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