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만든 탈주선
한 번은, 밤중에 눈을 떠 보니 옆자리에 아내가 곤하게 자고 있더군요.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이 작은 평화를 줍니다. 두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앙상블라주(emsemblage)라고 하나요?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멀리 전방으로 탈주하는 것, 현존 문명이라는 엄청난 속도의 기관차에 타고서도 서로를 찬찬히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10년 동안 아내와 저는 주류사회로부터 멀리 탈주했습니다. 정해진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충분한 소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안정된 기준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지요. 저희는 그걸 일종의 ‘탈주’라고 표현합니다. 가타리는 “탈주하는 자의 표현양식에 주목하라!”라고 일갈했다지요. 탈주하는 자들이었던 우리 부부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철학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고, 평범한 일상의 사건을 가지고 추억을 만들고, 고양이들과 어울려 스토리를 써가면서 그것을 몇 권의 책에 담아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갖고 있는 질문의 입구로 들어서서 색다른 출구를 찾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과도 같은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집필하면서 인생의 탈주선 위로 사랑, 욕망, 정동의 지도를 그려나갔습니다. 그가 발견한 자유인의 해방전략은 이제는 그가 개척한 색다른 출구 중 하나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출구는 후대에 올 누군가의 입구가 되어 색다른 사상의 시작점이 되었지요.

들뢰즈와 가타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두 사람은 친구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파리의 거리가 온통 68혁명으로 뜨거웠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번개에 맞은 것처럼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며칠 내내 쉬지도 않고 대화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관계를 형성했지요. 이후 그때를 회상하며 두 사람은 “둘이서 여럿이었으며, 복수였고, 다양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서는 강렬한 밀도, 온도, 속도, 강도의 이야기들이 오갔을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스피노자에 매료된 사람이라는 점이 공통분모였습니다. 스피노자는 그 두 사람의 미지의 항로, 색다른 탈주선에 환한 불을 켜주는 등대와도 같았을 겁니다. 먼저 가타리는 당시 지식인들이 열광하던 라캉주의가 갖고 있는 반동적인 성격을 파악하고, 스피노자의 욕망과 무의식 개념을 혁신할 아이디어를 들뢰즈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좋아! 그걸 책으로 써보세”라며 들뢰즈는 가타리에게 숙제를 내주었지요. 그렇게 해서 출간된 책이 바로 『안티오이디푸스』입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누가 한 이야기인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도 모를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섞어서 책을 써나갑니다. 『천 개의 고원』과 『카프카』,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둘이 만든 탈주선, 둘이 만든 지도 그리기에 많은 독자들을 동참시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랑의 색깔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피노자의 신체변용, 즉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되기(becoming)’라는 개념으로 구현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사랑과 변용은 신적 속성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작업은 스피노자의 신체변용이라는 개념을 현대화하는 지적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그전에 이미 독일 철학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가 스피노자 사상을 계승하여 욕망에 대한 해석 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라이히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즉 자기보존 욕구를 성-욕망이나 오르가슴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둘은 라이히의 성-욕망을 통한 욕망의 해석 방식이 지나치게 환원주의로 흐를 소지가 있음을 간파합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리비도경제학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 결과로 고안한 ‘되기’ 개념은 흐름의 사유, 신체변용의 사유를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또한 되기는 신체변용을 성-욕망으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화학적인 변화와 생물학적 변이, 사물의 변화 양상, 불가역적 변화로서의 흐름 등으로 확장하여 사유할 수 있는 개념의 구도를 보여줍니다. 스피노자가 신체 속의 변용으로 한정했던 구도를, 세상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특이점으로 만들려는 야심찬 기획인 것이지요. 그리고 스피노자의 능동적인 것, 즉 신적 속성으로서의 신체변용을 그저 형이상학이나 신학적인 사랑의 논의로 한정하거나, 동시에 지극히 신체적인 성-욕망의 수준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되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떠올리더군요. 즉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참 좋은 발상입니다. 그런데 역지사지는 엄밀히 말해 동일시에 가까운 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남과 내가 같아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되기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높은 경지에 이른 현자이거나, 혹은 아무런 욕심도 번뇌도 없이 해맑은 아기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어머니와 합일된 상태였던 0~2개월 아동의 우주 되기로부터 합일의 상태에 영성적으로나 신비주의적으로 혹은 시스템적으로 도달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되기를 동일시로 보는 입장은, 우리는 언제든 남과 합일될 수 있고 통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통합(integration)의 뜻이 ‘접촉하지 않은(not+touch)’이라는 점을 곱씹어봐야 합니다. 즉 되기가 신체변용으로부터 파생되었듯이 접촉을 배제한 동일시와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되기는 영성적인 합일의 경지를 추구하는 통합이나 동일시의 논의와는 궤도를 달리합니다. 오히려 상대를 만나 내가 변화되고 상대방도 변화됨으로써 더 미세한 차이를 갖게 되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되기’입니다.
스피노자의 신체변용 개념에 대한 논의는, 신체-욕망단계에서 기호-욕망단계로 이행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시 한 번 혁신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신체로부터 유래하는 생명 에너지와 달리, 이미지, 영상 같은 기호로부터 유래하는 에너지의 작동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되기를 신체 접촉의 수준뿐만 아니라 기호 접속의 수준으로까지 확장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 간의, 사물 간의, 기계 간의 되기에 대해서도 사유의 지평을 확장해야겠지요. 그러므로 변이되고 변화되고 변용되는 되기의 사유는 신체, 기계, 사물, 생명, 자연으로까지 확장해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점점 접촉을 회피하고 위생적이면서 탈색된 관계로 나타나는 현대인의 삶에서도 분명히 사물, 기계, 생명, 자연과의 강렬한 상호작용으로서의 되기는 상존하는 것 같습니다. 되기를 피상적으로 부정한다 하더라도 감정과 정동의 지도를 그려내는 사회와 네트워크, 보이지 않는 공동체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되기’라는 사랑과 욕망의 능력을 촌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 자연, 생명, 사물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삶의 자기원인을 구축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사랑, 다시 말해 ‘되기’는 삶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되기’가 없는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만이 만연한 이 시대에도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를 향한 되기, 둘 사이를 넘어선 다방향적인 되기가 있습니다. 인간으로 한정되지 않는 생명, 자연, 기계, 사물과의 되기도 있을 수 있겠지요. 물론 깊이 있는 접촉이 아닌 표면에서의 빠른 횡단의 되기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 되기 등도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삶의 여러 가지 변용된 모습 자체가 되기가 재창조해낸 것들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젊은 세대들의 되기는 점점 더 촘촘하고 미세해져 이제 기성세대의 인식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게 되고, 세대 차이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되기’가 더욱더 혁신되어야하는 시대에 직면해 있습니다.
번개(가타리)와 피뢰침(들뢰즈)의 만남

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을 ‘번개와 피뢰침의 만남’이라고 표현합니다. 번개는 가타리이고 피뢰침은 들뢰즈입니다. 철학자이면서 심리치료사이자 사회활동가였던 가타리는 전방으로 탈주하여 색다른 영역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과 해석은, 당시 이미 대석학이었던 들뢰즈가 맡습니다. 스피노자가 『에티카』 후반부에서 전방으로 탈주하여 미래로부터 전략적 지도 제작을 했던 것을, 이제 두 사람이 분담해서 하는 셈입니다. 스피노자는 미지의 곳으로 튕겨져 나간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전략을 취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스피노자의 지극히 기하학적인 방법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중적인 상황을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중적인 임무를 띠고 있던 스피노자와 달리, 들뢰즈와 가타리는 마치 서로의 분신인 양 역할 분담을 해냅니다. 그게 앙상블라주 전략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타리를 만나기 전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를 통해 생명, 생태, 생활의 차이 나는 반복, 즉 아침-점심-저녁, 봄-여름-가을-겨울, 밀물과 썰물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차이의 형이상학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그때만 해도 차이가 어떻게 생산되고 반복되고 강렬해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미디어와 소비생활, 문화생활 등이 똑딱거리며 반복되던 동질적인 문명이 등장하면서, 차이 생산, 다양성 생산, 이질 발생의 중요성이 막 드러나던 때였습니다. 즉 들뢰즈는 차이 나는 반복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차이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차이와 다양성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았지요. 그러다가 가타리를 만나면서 그는 난관을 돌파할 색다른 출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스피노자로부터 유래한 욕망 개념을 가타리가 들고 나온 것입니다.
펠릭스 가타리는 사랑을 욕망으로 통합하여 설명합니다. 그리고 차이 나는 반복의 원동력을 우리 내부에 갖고 있는 생명과 자연의 능력인 욕망으로부터 설명합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생산해냅니다. 여기서 기계는 반복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나 생명, 사물 등 반복은 바로 기계라고 일컬어집니다. 예를 들어 매일 밥을 먹는 입은 식사 기계, 계속 담배를 피우는 입은 흡연 기계. 연신 뽀뽀를 해대는 입은 애정 기계입니다. 여기서 매일, 계속, 연신이라는 부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입니다. 원해서 하는 반복이지요. 즉 욕망이 반복으로 만들어진다는 얘기이며, 반복으로 작동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면 가까운 술집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려는 계속되는 욕망은 맥주를 마시는 반복되는 행동양식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즉 차이의 생산이나 반복의 설립, 강렬함의 증가 등에는 반드시 욕망이 개입합니다. 이제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즉 자기보존 욕구라는 욕망 개념을 현대화하는 사상적인 작업임에 분명합니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가타리가 사용했던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은 사랑과 욕망의 반복(=기계)의 성격을 밝히면서, 욕망하는 기계들 간의 메타기계체로서 존재하는 공동체, 네트워크, 사회체 등을 규명하는 전거가 됩니다. 이는 스피노자가 “우리는 아직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라고 했던 아포리즘에 대한 역사적인 대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는 네트워크 사회를 앞둔 상황에서 욕망의 반복 양상을 규명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들뢰즈는 가타리에게 숙제를 내주어, 훗날 방대한 저작이 된 『안티오이디푸스』(1972)의 초고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한 사람은 전방을, 한 사람은 후방을 맡은 것처럼 분담하여 책을 썼습니다. 1980년대에는 공동으로 조금 실험적인 작업을 합니다. 바로 『천 개의 고원』(1980)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되기(becoming)’라는 개념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소수자 되기, 동물 되기, 아이 되기, 여성 되기, 분자 되기,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등의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의 사상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두 사람은 스피노자가 보여주었던 기하학적인 구도 속에서의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되기의 다채로운 양상으로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 감속과 가속을 거쳐 공동체의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된 신체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이토록 아름답게 현대화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고원
두 사람의 만남은 『천 개의 고원』에서 고원으로 묘사됩니다. 고원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마음의 생태학』(책세상, 2006)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고원(高原)의 사전적 의미는 주위의 지형보다 높은 지대에 펼쳐진 넓은 벌판입니다. 이미 일정 높이에 다다른 상황에서 더 이상 정점을 향해 치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편편한 상태에서 고도가 지속되는 지형지물인 것이지요. 또한 고원은, 발리의 이아트멀 원주민들이 사정하지 않으면서 강렬도를 유지한 채 운우의 정을 즐기는 오르가슴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계는 강렬도가 지속되는 고원의 상태에서 그 강렬함에 무언의 춤을 추듯 말하고 글 쓰고 개념을 창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삶이, 욕망을 억제하거나 또는 욕망이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정동을 삶의 내재성에 배치하고 천천히 혹은 빠르게 지도그리기를 했던 것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그 강렬함의 지속 속에서 개념을 창안하면서 욕망의 행로를 지도그리기했던 바를 고원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가 초월적인 신적 원리를 통하지 않고 검소, 소박, 겸양한 내재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그것이 욕망을 억제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의 강렬도가 지속되는 고원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해석이 뒤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고원은 삶 자체였고, 유일무이한 자신의 삶의 내재성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둘이었기 때문에 분신처럼 서로의 욕망을 교차시키면서 강렬도가 지속되는 사이존재로서 위치 지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원은 정점을 치고 내려오는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강렬도가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이는 동양의 방중술과도 유사합니다. 반면 카타르시스는 프로이트가 채택한 정신분석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즉 무의식의 심연에 감추어졌던 것이 의식의 표면으로 드러났을 때, 마치 동양의 깨달음의 도(道)의 체득처럼 해방감과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러한 깨달음의 신화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절정에서 맛보는 깨달음이 아니라, 천천히 익어가는 술과 같이 강렬함이 지속되는 상태에 주목합니다. 이는 스피노자주의에서 깨달음의 순간을 설정한 카타르시스의 방법론이 부재하다는 점과 일치합니다.
스피노자는 인식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면서, 본질직관으로서의 3종지와 공통관념으로서의 2종지, 그리고 표상, 기호, 감각으로서의 1종지를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3종지의 영성적이고 직관적인 과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종지를 거부하면서 2종지와 3종지만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과정으로 앎과 인식을 설정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읽는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서술 방식에서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1종지를 거짓된 인식으로 간주하면서도 이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1종지, 2종지, 3종지의 구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사람은 바로 베이트슨입니다. 베이트슨은 자극과 반응(S→D)의 1차적 앎의 과정과, 맥락화된 2차적 앎의 과정과, 탈맥락화된 3차적 앎의 과정과, 초맥락화된 4차적 앎의 과정의 층위를 서술합니다. 그런 이후 1차, 2차, 3차, 4차 과정 전부가 감쌈(envelopment)과 횡단을 통해 전부 작동하는 것이 앎이라고 봅니다. 즉 스피노자가 카타르시스의 방법론을 채택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1종지와 2종지, 3종지가 전부 작동하는 것이 앎의 과정이며, 어느 하나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앎인 셈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고원의 방법론의 전모도 여기서 규명됩니다. 고원은 무의식과 의식에 차등을 두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무의식, 전의식, 의식, 욕망, 정동, 영적 직관 등이 어우러진 관계망이 두 사람의 만남이라는 점을 말하는 셈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여럿, 복수, 다양이 만든 고원이라고 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일치에서 강렬한 합일을 느끼는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관계나, 의식이나 영성의 깨달음을 주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나, 거리를 두고 위생적으로 마주하는 관계가 아니라, 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차이와 편차를 응시하고 발견하면서 그 속에서 다양체로서의 공동체와 사회의 맥락과 탈맥락 등을 발견하고 구성하는 관계망입니다. 즉 서로 달라짐으로써 더 강렬해지고 가까움과 거리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치 조정이나 태도 변화 등을 수행하는 관계망, 즉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관계망으로서의 배치였던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사랑과 욕망의 지도 제작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강렬도의 고원이 이 세상에 있다는 점에서 ‘천 개의 고원’을 말합니다.
탈주선,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는 것
아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저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보다 잘생긴 연예인을 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로 말없이 앞만 보고 있는 배치가 저를 숨 막히게 합니다. 텔레비전은 둘이 나란히 앉아서 봐도 혼자 보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매체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 저는 외로웠고, 그래서 실수인 척 텔레비전을 끄고 딴청을 피우곤 합니다. 특히 텔레비전을 보는 생활은 앙상블라주를 형성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즉 둘이 서로 얼굴을 보면서 분신을 분배하고 탈주선을 타고 함께 도망가면서 미래를 향한 미지의 항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 부부는 텔레비전을 볼륨을 가장 낮추고 자기 전에 졸음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만 이용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 둘 사이에는 텔레비전과 관련된 이야기는 없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영구적인 탈주선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혼자였지만, 가상의 독자를 설정하고 자유인의 해방전략, 즉 사랑이 곧 혁명이라는 것을 일갈했고, 민주사회와 다중에 대한 민주주의 전략을 얘기했우며, 사랑, 욕망, 정동의 지도 그리기를 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상블라주 전략을 통해 고원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스피노자는 미래로부터의 자신과 과거로부터의 자신을 분신과 같이 분배함으로써 고원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신들과 함께 영구적인 사랑의 승리, 영구적인 욕망의 탈주선을 그려냅니다.
그래서 두 명의 스피노자주의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만든 『천 개의 고원』이라는 창을 통해 스피노자를 독해하면서도 스피노자가 외롭고 고독하고 힘들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 혹은 도를 깨닫기 위해서 『에티카』를 썼다는 오해를 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수많은 사람들, 즉 다중의 사랑, 욕망, 정동이라는 삶의 내재성에 접속한 사람이었기에 엄청나게 상냥하고 뜨겁고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영구적인 승리, 영구적인 탈주선 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특이점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탈주하는 자의 표현양식에 주목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