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결자’ 신승철
폭염과 홍수와 화재, 묻지마 범죄가 난무했던 2023년 여름이었다. 환멸의 정치에 몹시 지쳤던 어느 일요일, 신승철 생태적지혜연구소 소장의 본인 부고문자를 받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자 통화한 지 며칠 안 된 때였다.
그의 갑작스런 부고에 망연했던 것도 잠시, 장례식과 그 이후 그를 추억하는 많은 자리에서 저마다 그의 거부할 수 없는 호출과 제안과 기다림의 낮은 소리를 기억하며 그의 존재는 살아생전보다 더 자주 출몰하곤 했다. 우리는 그가 맺어놓은 수많은 연결망을 보물찾기하듯 발견하고, 그가 펼쳐 놓은 일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어떻게 그 많은 모임을 그렇게 촘촘히 엮어낼 수 있었는지, 그 많은 기획안들을 만들어냈는지, 의구심을 가지며 각자의 자리에서 많이 바빠짐을 감수하고 있다. 신승철, 그는 스스로를 ‘연결자’로 규정지은 만큼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맺기와 되기를 실천하며 공동체에 스며들었고, 그가 사라진 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북극성을 잃은 듯’ ‘벼랑 끝에 선 듯’ 크나큰 상실감을 주었다. 어느덧 물러날 것 같지 않은 더위도 한풀 꺾였고 그의 빈자리도 조금씩 채워지고는 있지만 그의 갑작스런 부재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4년 전 쯤 다람쥐회에서 대안경제공부모임을 시작했을 때였다. 70년대 노동자서민의 금고로 출발했던 다람쥐회, 많은 사람들이 의지했고 공동체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정체성과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미궁에 빠진 듯 무기력증을 겪고 있을 때였다. 공동체의 길로도 한계가 있고, 유지하고 버티기에는 몸집이 작지 않아 피로도가 심했던 다람쥐회에 공유경제와 탈성장, 기후위기 극복과 생태적 전환을 들고 나타난 신승철. 자조금융, 혹은 대안금융의 기능에는 한계가 있고, 에코포인트를 기후화폐로 전환하여 기본소득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에 기여한다면 어떨까? 사회적 경제체 들과 지역소상공인들과 함께 네트웍도 만들고 자체플랫폼도 구축하고…… 이런 계획들을 의논해 왔지만, 실현가능성을 타진하기에 실무력도 부족했고, 여전히 다람쥐회의 근본 물음은 아직 진행형인데, 그가 가버리고 없다니…… 그와 함께 공부모임에서 이행과 전환의 필수요소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를 하곤 했던 기억을 소환해 본다.
2. 생태적 지혜에 스며들다
신승철, 그가 운명한 후 40여 권의 책과 논문 등, 수많은 유고 글들을 보며 그 양과 깊이에 적잖이 놀랐다. 그의 저서들을 이제야 조금씩 들여다보며 그가 가진 확신과 신념을 조금씩 알아나가고 있다. 신승철, 그는 맑스주의자에서 생태주의자로, 문래동에 ‘생태적 지혜’라는 이정표를 세우고 다양한 공동체와 이론들과 실천들을 접목시키고 많은 사람의 동행을 구했다.
‘생태적 지혜는 커먼즈(Commons)로서의 공유지에서 발아했던 약초, 벌레 퇴치, 식생, 발효, 요리, 저장 등의 지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생태적 지혜는 연결망의 지혜이자 정동과 살림, 돌봄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후위기시대의 개막은 절기살이, 식생 등 생태계 전반의 순환과정의 거대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과거적 지혜가 아닌 미래적 지혜에 더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래적 지혜는 지나친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아니라, 적정기술, 녹색기술, 친환경기술 등의 도전, 창조, 모험에 대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
그가 물들이고자 했던 담론의 근원지는, 산업자본주의의 쇠락에서 잔존하고 있는 문래동의 철공소들과 쇠락의 빈터에 새순을 돋게 하고 낡은 공업의 골조에 예술의 옷을 입히려 스며든 문래동 예술촌이었다. 생태적 지혜가 넘실대는 그곳에서, 약 2년 여의 다람쥐회 경제학습모임 후 신승철은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내게도 조합원이 될 것을 권유했었다. 90년대, 맑스주의 이후 여러 포스트주의들의 난해한 흐름을 스캔하듯 읽고 덮은 이후 ‘사회주의적 이상’만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있던 내게 신승철의 들뢰즈 가타리와 분자혁명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의 생태주의자로서의 지혜는 물 흐르듯 넘쳐서 나에게로도 흘러왔던 것 같다.

3. 창조적 욕망의 토대가 될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이미 공론화된 바, 소득과 노동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일정 금액이 지급되는 것이다. 신승철은 그의 여러 저서에서 이 기본소득을 여러 번 언급한다. 그 중 욕망가치론에 주목한 신승철은 다양한 비노동영역의 욕망가치에 주목한다. 그 욕망가치가 발현되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새로운 창조적 가치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 이후의 삶의 형태에 대해서 저는 욕망가치에 입각해서 색다르게 전망해 봅니다. 욕망의 차원은 ‘기호’와 ‘기계’의 단계로 이행해 있습니다. 어쩌면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게임에 빠져 있는 청년세대를 도덕적 해이라고 훈계하는 기성세대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욕망이 주는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공동체경제와 집단지성의 성숙에 엄청난 토양으로써 작용하면서 기본소득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지평을 열 수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욕망해도 괜찮아”수준의 범생과 같은 담론이 주를 이루지만, 이것을 뛰어넘어 야성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욕망이 아직까지 기억에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2
보장된 급여도 없고, 원고료나 강의료 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신승철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졌다면 어떤 상황이 생겼을까? 신승철이 그의 반려인 이윤경에게 보낸 편지 형식으로 쓴 책 『욕망자본론』에서 기본소득이 가져올 수 있는 욕망가치와 다양한 창조적인 생산가치의 가능성이 재미있다.
’우리 집, 기본소득이 있었던 거 기억하나요? 예전에는 윤경씨가 제게 일주일에 7만원이나 되는 용돈을 기본소득으로 보장해 주었지요. 그때 저는 군것질도 하고 후배들에게 자장면도 사주었고, 급하면 택시도 타면서 유용하게 잘 썼지요. 그러나 최근 들어서 윤경씨가 용돈 공급을 끊으면서 저는 스님이나 수행자 모드가 되었어요. 저는 지금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소득처럼 용돈이 두둑히 있다면 뭔가 색다른 구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약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술도 안 마시고, 딱히 군것질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아침저녁으로 당신과 함께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상황인지라 딱히 용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한번 생각해 봤어요. 욕망가치와 기본소득이라는 주제가 용돈이라는 곁가지로 넘어갔군요. 예전에 용돈을 챙겨 주던 윤경씨를 그리워하며 ‘3
4. 탈성장, 생태적 전환으로 이행하기 위한 기본소득
신승철은 정동자본주의 내, 노동과 소득에서 배제된 소수자, 비노동 영역, 재생산을 위한 부불노동, 돌봄노동에 주목한다.
‘기본소득은 ‘고용된 노동’이라는 허구상품 배후에 있는 다양한 정동노동의 실존에 기반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고용된 노동의 이면에서 다양한 비물질적인 노동, 정동노동, 욕망노동, 정상화노동, 돌봄노동 등이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이러한 정동의 가치를 주장한다는 것은 결국 삶과 실존, 자유, 사랑, 욕망의 거대한 지평과의 접속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삶과 사랑의 변화를 전망해 볼 수 있다.‘4
기계가 사람들의 노동을 많은 부분 대체하고, 정동자본주의의 플랫폼에 날마다 정동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 재생산을 위한 여러 노동들, 돌봄과 치유의 노동들, 다양한 창조적인 욕망노동에 대해 기본소득으로 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대안은 탈성장밖에 없는데, 탈성장 담론이 많은 사람들 특히 빈곤층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점도 주목한다. 불평등이 거세된 풍요라 할지라도 늦추고 절제해야 할 시점에 탈성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수라는 것이다.
그는 ‘탈성장을 위한 보편적 기본소득을 정동해방, 활력해방, 욕망해방, 돌봄해방의 판을 구성하는 이행의 구성요소’5라고 얘기했다.
5. 기본소득을 현실화하기 위한 생태적 지혜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기본소득 가능성을 경험했다.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 마련 방법에 대해서는 주권화폐론과 국토보유세 등 세수 확대 방안 등이 있다.

사진출처 : Ali Alauda
신승철은 통화주의의 한쪽 면 MMT(현대경제이론)의 주권화폐론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양적완화를 통한 화폐발행을 은행이나 자본에 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직접 기본소득으로 지급한다면 그린뉴딜의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이를 통해 기후금융 등의 종잣돈을 마련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세금을 통한 기본소득은 조세저항이 있을 수도 있는 반면 통화주의를 통한 기본소득은 정책 결정의 과정이 완료되면 좀 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통화주의로 나아갈 때 ‘정동의 가치’와 ‘욕망가치’에 대한 고찰이 없이는 공염불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후위기의 징후들이 경제위기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현 상황에서, 기후부정의와 부의 불평등을 타개하기 위한 유력한 방법은 통화주의일 수밖에 없다. 돈이 기업과 자본에게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나눠주는 상황이 더 탈성장에 가까운 통화주의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MMT와 같은 통화주의를 성장주의의 혐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 그린뉴딜, 기후금융의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6
신승철은 기본소득 형태의 기후화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후화폐가 기후금융으로 순환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안했다. 기본소득 재원으로 탄소세를 배당하는 방식도 그중 하나의 실현가능한 대안으로 제안하고 있다.
‘스위스는 2008년부터 국가가 탄소 감축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국민들에게 화석연료를 소비한 만큼 세금을 걷습니다. 이렇게 징수한 세금의 3분의 1은 건물과 주택의 에너지 개량사업과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고, 3분의 2는 n분의 1로 나누어 스위스 거주자 모두에게 기본소득 형태로 지급합니다. 이렇게 되면 에너지를 덜 소비한 기업이나 가정은 세금을 덜 내고 더 돌려받게 됩니다. 에너지를 아낄 이유가 충분해지는 거죠. 스위스에서 한해 동안 거둬들이는 탄소세는 2019년 기준 1조 500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7
기본소득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 수도 있고, 더 많은 논란과 정체를 겪을 수도 있다. 기본소득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혹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논리처럼 노동의욕을 저하시키고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현실화된다면 적어도 기후위기 상황에 탈성장이라는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연착륙하고 신승철의 ‘정동해방, 활력해방, 욕망해방, 돌봄해방’의 새 판을 여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인이 되어버린 ‘생태적인 삶, 대안적인 삶’을 선택했던 신승철의 삶에 기본소득이 더해졌다면, 그의 지평이 지금보다 훨씬 더 넓게 그려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창립선언문 일부. 2019.6.28 ↩
신승철 저 『욕망자본론』(알렙, 2014) 2부 7장. 「지금, 기본소득이 필요한 까닭」 중 ↩
신승철 저 『욕망자본론』(알렙, 2014) 2부 1장. 「마르크스가 알지 못했던 욕망가치」 중 ↩
이호찬·권희중·신승철 저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 (한살림, 2020) 2부 다. 「삶을 ‘선택’하고 있는 걸까?」 중 ‘정동노동과 기본소득’ 부분. ↩
계간 『기본소득』 2023년 봄호. 「정동자본주의 하에서의 기본소득」 (신승철) 중 ↩
웹진 『생태적지혜』 「그 많던 조개껍데기 화폐는 왜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 MMT(Modern Monetary Theory)와 기본소득」(신승철), 발행 2019년 10월 25일 ↩
권희중·신승철 저 『10대와 통하는 기후정의 이야기』(철수와 영희, 2021) 3부 8-3장 「에코마일리지와 기본소득」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