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풀타임 노동하는 삶은 생존 그 이상이 없다. 현대인들은 수렵채집 시대가 오히려 원시적이고 생존을 위해서만 살아온 일차원적인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반대다. 마셜 샬린스의 책 『석기시대 경제학』1을 참고하면 수렵-채집인들은 많아야 하루 2~3시간 나무 열매, 견과류를 채집하고 나머지 시간엔 온종일 낮잠을 자거나 춤을 추며 놀았다. 그들의 삶은 여가와 여유로 가득했다. 오히려 그날그날 생존을 위해서만 일하므로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자급으로 자립하는 삶은 문화적이다. 주체적이며 자율적이다. 하고 싶은 일을 꽃피우며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생존을 넘어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자아는 ‘ego’가 아니라 자연과 연결된 초자아 ‘Self’다. 원주민들이 세상과 연결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유도 이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눈앞의 자연이 곧 자아실현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어떠한가? 현대사회는 개개인이 모두 자신의 생계를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조에 위임한 상태다. 남이 나를 먹여 살려 주겠노라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생존권을 타인이 쥐고 흔든다. ‘저 좀 먹고살게 해주세요’, 권력을 쥔 자에게 빌어야 한다. 현대인은 무력하다. 길을 나서면 호두나무가 손을 흔들며 열매를 내어주던 때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텅텅 빈 호주머니로 길을 나서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물며 앉아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도.
현대의 권력-자본은 가짜 권력이다. 실체 없는 권력이다. 그들의 생계는 여론과 민심이 결정짓는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온전히 내 힘으로 살아갈 순 없다. 돈이 주는 힘은 나의 힘이 아니라 남이 허락한 힘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다. 빼앗길 요소가 많은 사람은 불안하다.
인간은 자본주의로 인해 서로서로 생계를 쥐고 흔들며 살고 싶으면 기어보라 말하는 폭력배 혹은 깡패가 되었다. 내가 얼마나 살고 싶은지, 사는 것에 얼마나 절실한지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으며 저울질당해야 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임에도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오로지 생존밖에 남지 않는다. 여가는 소비로 변했고, 또다시 타인의 생계 수단으로 작용한다. 쉬는 시간에 돈을 쓰며 타인의 쉬는 시간을 앗아간다. 거기에 문화는 이제 없다. “산업”만이 남아있다.
모든 게 각자도생이다. 돈의 힘을 빌려서 살아남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노동하지만 살아남는 데에 필요한 것, 그 이상으로 과로한다. 죽을 만큼 일하고 죽지 않을 만큼 회복한다. 회복되면 기다리고 있는 건 출근이다. 다시 탈수기에 돌아간 빨래 마냥 탈탈 털려 집에 돌아온다. 집은 더 이상 삶의 공간이 아니다. 방전된 상태에서 기절해 겨우 기력을 충전하는 주유소나 다름없다. 우리는 노동하러 나가서 한껏 소모된다. 소모된 심신을 겨우 살려 놓으면 그 살리는 작업을 위해 또다시 소모된다. 성장의 압박 속에 인간은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노동 기계로 전락한다. 생존 그 이상으로 노동하느라 정작 생존밖에 남지 않는다. 덕분에 현대인은 여가를 도파민에 조종당하는 좀비처럼 보낸다.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이런 노동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 말살이다. 노동자의 삶에서 주체성, 자율성, 자립과 자치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질 높은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언급했듯이 누구에게나 삶은 주어진다. 동물도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꽃을 구경하거나 썰매를 타고 논다. 삶이란 단순히 목숨이 붙어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과 연명은 엄연히 다르다.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노동자의 인생은 연명에 해당한다. 아무도 이렇게 살고 싶어서 선택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삶의 모양새를 선택할 권리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체제의 주입 하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순응하고 어쩔 수 없이 이런 “꼴”을 이어 나간다. 따라서 병상에 누워 있지 않을 뿐 모두 연명 중이다. 연명치료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닌 것처럼, 이 또한 자발성이 없으니 살아도 삶이라 부를 수 없다. 자본의 강제가 인간을 시체로 만들었다.
자살도 과로사도 사회적 타살이다. 한국은 특히나 자살의 국가이자 산재의 국가다. 더는 살지 못해 죽거나 더는 못 살겠다며 죽는다. 삶을 노동에 바치는 순간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게 된다. 삶의 주도권이 기업과 자본에 넘어간다. 여기서 노동자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미미해진다. 성장주의 경제는 노동자를 인간이 아니라 걸레짝처럼 다룬다. 짜낼 수 있을 때까지 있는 힘껏 쥐어 짜내다가 마침내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될 때 버리고 바꾸면 그만인 셈이다.
이런 비인간적인 체제를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도리어 나약한 사람, 간절하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 당한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이 짊어진다. 체제의 문제를 두고 개인에게 손가락질한다. 개개인은 체제의 방패가 되어 대신 욕을 먹는다. 내가 못나서, 내가 무능해서 등으로 개인에게 모든 원인이 있는 것처럼 사고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바로 그렇게 혁명을 피해 간다. 프랑스 혁명보다도 더 불평등한 사회2에서 아무도 사회를 뒤엎으려 들고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민주성을 파괴하여 발생한 체제이다. 둘은 상호 배타적 관계에 있다.
하지만 삶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생계유지의 간절함을 저울질당하다 보니 다들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이게 맞나. 이게 사는 게 맞나. 숨은 쉬는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없으니 차라리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하지만 그건 사실 “진짜” 살고 싶다는 몸과 마음의 증거다. 자살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청산하고 싶은 건 목숨 그 자체가 아니다. 삶의 주권이 나에게 없는 “가짜” 인생을 청산하고 싶은 거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사회는 단절의 삶이자 독선적인 삶이다. 나부터 살아야 하고, 내가 돋보여야 하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야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우선 부여받은 자유 의지를 사용할 수 없으니 영혼이 죽어간다.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디지털 노마드나 셀프 브랜딩, 욜로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그 또한 자본의 방식이다. 노동하고 소비하는 일은 산소 호흡기와 마취제에 의존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코와 폐로 호흡해야 한다. 연명이 아니라 생존,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농민 봉기 일으키듯 노동 봉기 일으켜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듯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밥과 잠과 쉼을 달라고 우리는 슬프지만 21세기가 되어서까지 여전히 외쳐야만 한다. 그런데 아무도 외치지 않는다. 밥도 잠도 쉼도 포기하고 노동하는 사람은 속된 말로 “갓생”3이라 올려치기 당하거나 가난과 무능의 대명사로 내려치기 당한다. 밥과 잠과 쉼은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그런데 쉴 새 없이 자본을 생산해 내야 하는 이데올로기 속에선 식사, 수면, 휴식만한 방해 요소가 없다. 사측은 이걸 최대한 배제하려고 애쓴다.
숨만 붙은 채로 집에 돌아와 기절하듯 잠을 자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가짜” 생존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민주적인 노동 구조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진정 문화적인 삶을 향유하고 참된 자아실현을 행할 수 있다. 누구나 먹고, 자고, 휴식을 취하는 데에 정성을 들일 권리를 가질 때 비로소 삶은 시작된다.
마셜 샬린스, 『석기시대 경제학』, -한울 아카데미 (2023), 수렵 채집 경제야말로 진정한 풍요 사회였음을 증명하는 다양한 논문들이 실려 있다. 책에는 현재 남아있는 원시 부족 사회를 연구해 그들이 어느 정도로 노동하고 삶을 이어나가는지에 대한 글이 적혀있는데, 주에 12~14시간 노동하는 것으로 밝혀진 부족도 존재했다. ↩
토마 피케티의 ‘피케티 지수’ 참조. 피케티 지수란 어느 시점에서 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본총량이 그 해 소득의 몇 년치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측정치다. 프랑스 혁명 당시가 7.5에 해당하며 대한민국은 현재 9에 달한다. ↩
신을 뜻하는 ‘갓(god)’과 삶을 뜻하는 ‘생(生)’을 조합한 신조어로 매일 생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부지런하게 사는 인생을 일컫는 말. (참조: kha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