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중요한 것을 속삭이기 – 〈자청비와 문도령(세경본풀이)〉 독후기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예컨대, 반복을 한다든가, 크게 외친다든가 하는 방식들이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흔한 방식이다. 그렇지만 속삭임을 통하여 중요한 것이 전하여지고 보존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 또한 이야기꾼들은 알고 있을 것 같다. 옛 이야기를 읽으며 그러한 속삭임을 찾아본다.

제주 농경신들의 이야기인 〈세경 본풀이〉

제주의 서사 무가 가운데 하나인 〈세경 본풀이〉에는 자청비(自請妃)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파란 많은 곡절을 겪는다고 평가되며, 하늘 옥황에서 오곡씨를 가져와 제주의농경신인 중세경이 되는 인물이다.1

〈세경 본풀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진국과 조진국 부부가 자식이 없어서 걱정하던 중, 동개남 은중절 중의 권유로 자식을 얻기 위한 기도를 하기로 하고는 서개남 무광절에 가서 기도를 한 후 딸 자청비를 얻는다. 같은 날 같은 집에서 하녀 정술데기는 아들 정수남을 낳았다. 자청비와 정수남은 나란히 그러나 전혀 달라 보이는 궤를 따라 자랐다. 자청비는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인 문도령을 만나 적극적으로 사랑한다. 문도령은 부모가 정한 바에 따라 서수왕아기와 결혼하고는, 이내 신부를 외면한다. 이 와중에 자청비는 정수남을 죽이지만, 정수남이 없는 세상에서 그가 하던 역할을 해 보고, 정수남이 인간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었음을 깨닫고, 서천꽃밭 사라대왕의 도움으로 정수남을 살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대왕을 속이고 그의 셋째딸아기와 혼인하고는, 곧 떠나버린다. 자청비는 문도령을 다시 만나고, 문도령의 부모가 낸 가혹한 시험을 자청비가 통과하자, 문도령의 부모는 문도령과 서수왕아기 사이의 혼인을 취소하고, 서수왕아기는 부부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새’가 된다. 이 이후 혼례를 할 때면 신부가 상을 받고서 숟가락을 들기 전에 이 새 몫으로 음식을 조금씩 걷어서 내려놓는 풍습이 생겼다. 문도령과 함께 살게 된 자청비는 자신이 기만하고 떠나온 사라대왕의 셋째딸아기와 보름 만 살림을 살아달라고 문도령에게 부탁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문도령이 사라대왕의 셋째딸아기에게 가서 보름을 넘기면서 사라대왕의 셋째딸아기와 함께하는 생활에 빠져버린 듯한 기미를 보이자, 자청비는 이내 문도령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린다.

〈세경 본풀이〉의 결말 부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천하궁으로 나아가 옥황상제께 청하여 하늘 옥황 갖은 곡식 종자를 얻어서는 하늘 옥황을 떠나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부모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부모님을 찾아가 살아온 사연을 다 고하자 아버지가 말을 했다. “설운 아기야. 네가 살려온 종이라도 데리고 가거라.” 자청비는 정수남을 데리고서 세상 농사를 돌보러 나갔다. 자기네를 알아보는 사람들한테 밭도 갈아주고 하늘곡식 종자를 나누어주어 풍년이 들게 하니, 자청비는 중세경 정수남이는 하세경, 농사의 신이 되었다. 그렇다면 상세경은 누구인가? 자청비 본남편 문도령이 상세경 자리를 차지했다. 자청비가 하늘에서 갖은 곡식 종자를 받아올 때 메밀씨를 깜빡 잊고 안 가져와 뒤에 다시 올라가 받아왔으니, 지금껏 메밀이 다른 곡식보다 늦게 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2

이야기 속에서 자청비는 곡식 종자를 가지고 하늘에서 인간세상으로 이동한 후 정수남과 함께 세상농사를 돌본다. 자청비와 정수남은 각각 중세경과 하세경이라는 농사의 신이 되었다. 제주에서 가장 중요한 곡식인 메밀은 다른 곡식보다 늦게 된다.

자청비

자청비라는 여신의 이름에는 비를 부르는 주술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해석도 있다. 사진출처 : Franz26

〈세경 본풀이〉는 천상 존재 문 도령, 인간 자청비, 목동 정수남의 관계를 통해 풍농 실현의 원리와 규범을 풀어낸 신화라고 할 수도 있다.3 이 〈세경 본풀이〉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자청비는 가장 주목을 받아왔다. 제주 여자들이 이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여 갔기 때문에 자청비가 특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졌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4 부모가 ‘스스로[자(自)] 청(請)하여 낳은 자식’이라고도 해석되는 이름의 인물 ‘자청비’는 미모뿐 아니라 지혜도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있기도 하다. 요약에는 빠져 있지만 원래 〈세경 본풀이〉에서 자청비는 필요에 따라서는 남자로 변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처세술과 남자 못지않은 용기,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서천 꽃밭으로 가는 담력과 돌파력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그런 자청비가, 하늘 옥황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제주의 무속 신화 속 여신들처럼 당당하고 자주적인 삶을 살기 위해 오곡씨를 가지고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5 자청비는 많은 고난을 겪는데 이로써 지모신(地母神)의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는 해석이 있다. 자청비는 남장(男裝)을 하기도 하는데 이로써 남녀 양성의 성결합 상태 곧 양성구유(兩性具有) 상태가 되어 우주적 풍요를 가능하게 한다는 해석이 있다.6 자청비라는 여신의 이름에는 비를 부르는 주술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설명도 있다. 이 입장에서는 자청비라는 이름을 ‘자청해서 비를 부르는 신’으로 풀이한다고 한다.7

문도령

이야기 속 하늘나라에서는 자청비의 미모가 소문나면서 많은 선비가 자청비를 납치하려 하고, 그 와중에 하늘사람 문도령이 죽고, 자청비는 남장을 하고 서천꽃밭으로 가서 환생꽃을 가져다가 문도령을 살려낸다.8 문도령이 귀해 보이기보다는 자청비가 훌륭해 보인다.

〈세경 본풀이〉의 많은 부분이 자청비와 문도령의 연애와 사랑 이야기이다. 이는 성교에 따르는 재생산을 통하여 풍요로운 농경을 선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하늘사람인 남자는 풍요의 한 조건인 기후 특히 비 내림을 대신한 표현일 수 있고, 출산을 하는 세상사람 자청비는 농업의 풍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풍요는 불가능하다. 농경기원 신화에 있어 남녀 두 신이 각기 하늘과 땅의 존재로 설정된 것은 농경은 땅과 하늘이 함께 주관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씨앗은 땅에 심지만 햇빛과 비는 하늘에서 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 이렇듯 남녀는 둘 다 풍요에 필수적이지만, 왠지 〈세경 본풀이〉에서는 남자인 문도령보다 여자인 자청비가 훨씬 더 멋있고 중요한 존재로 그려진 듯하다.

정수남

하늘에서 오곡종자와 메밀을 가지고 내려온 자청비는 농경기원신(農耕起源神) 자격을 얻는다. 사진출처 : Aurel_Cham

오곡종자를 가지고 지상으로 내려왔으며 다시 하늘에 올라가 메밀을 가지고 온 자청비가 농경기원신(農耕起源神)으로 보이는 데 비하여, 소와 말을 어쩔 수 없이 잡아먹어야 하였으나 그 전에는 소와 말을 키웠던 정수남이 하세경이라는 농경기원신 자리를 얻었다면 그가 관장하게 된 것은 소와 말의 사육이었을 듯하다. 〈세경 본풀이〉에서 정수남은 자청비네 집에서 키우는 소와 말을 잡아 먹어치운다. 그리고 문도령을 만나게 해준다고 꼬드겨 자청비와 함께 산에 가서 자청비에게 성폭행을 하려다가 자청비에게 죽는다. 그 일로 자청비는 일 잘하는 종을 죽였다고 집에서 쫓겨나고, 서천꽃밭으로 가서 공을 세우고 생명꽃을 얻어 정수남을 살린다. 그러나 부모는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가 살린 딸을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10 자청비의 부모는 거듭하여 정수남의 존재 의의를 상기시켜주고 부각시켜주는 듯하다. 마치 이야기 속에서 내내 욕받이 역할을 하는 정수남이 소외되지 않게 하려고 이야기를 한 무당이 노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농경신에 대한 본풀이에 목축신에 대한 내용이 함께 설명되고 있는 것 그리고 목축신이 되는 정수남이 자청비네 집의 하인으로 설정된 것은 농업을 위해 마소가 이용되던 것의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분석이 있다.11 이수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울러 이들이 주종관계로 된 것은 가축 사용을 농경의 종속된 수단으로 파악한 것이다. 또 마소의 힘을 이용한 것이기에 목축신은 특히 힘의 상징인 남종으로 형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12

제주 사람들이 중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수렵과 목축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다가 점차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농경과 어로로 생활하게 되었다면, 목축은 제주의 역사 속에서 점차 부차적 산업이 되어갔을 것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농경을 가져오는 자청비의 이야기는 이런 산업의 변화를 보여주는 면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에서도 자청비의 부모가 정수남을 죽인 딸 자청비를 질책하는 장면을 본풀이 속에 넣은 것은 이 본풀이를 향유해 온 제주 사람들이 변화 속의 여러 국면들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고자 한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지만 중요한 것

〈세경 본풀이〉를 보고 나니, 그것이 자청비를 뚜렷한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문도령이나 정수남 특히 정수남도 어느 정도 조명을 받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비하면 본풀이 끝 부분에 삽화처럼 잠깐 등장하는 메밀은 이야기를 향유한 사람들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다소 엉뚱하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시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미미하지만 중요하다면,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거나 후대에 전하여지도록 할 수 있는 책략이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공기나 물 같은 경우,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지만, 너무나도 생활과 밀착되어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쉽게 잊는 듯하다. 〈세경 본풀이〉를 읽다보니, 왠지 작지만 소중한 것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는 책략의 성공적인 예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자청비의 욕받이 정수남이 은근히 자청비 부모의 두둔함을 받는 것 또한 그 예 같았다. 이런 분위기는,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지만 메밀이 대대로 제주에서 중요한 곡물이었음을 외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과연, 중요하지만 약해져가고 위축되어가는 뭔가를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고,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그런 것을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채 삶의 일부로 가지고 있게 할 수 있는 이야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모두가 뭔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 때, 홀로 일어나 다른 것의 중요성을 속삭일 수 있는 능력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일까를 돌아볼 수 있었다.


  1. [네이버 지식백과] 자청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네이버 지식백과] 자청비와 문도령(세경본풀이)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3.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이수자]

  4.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네이버 지식백과] 자청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6.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집필: 좌혜경]

  7.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이수자]

  8.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집필: 좌혜경]

  9.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이수자]

  10.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이수자]

  11.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이수자]

  12. [네이버 지식백과] 세경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이수자]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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