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를 혼자 미완성으로 만들고 온 사람의 보고서- 故 신승철 소장 1주기 추모축제 참여 후기

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에게 장례가 축제로 치러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빈소에서 술을 마시며 화투를 쳤고, 고인의 넋을 달래서 잘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행하여지는 굿은 다양한 연희의 조합이었다. 그렇다면 제사는 어떠하였을까? 가까워야 하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모처럼 모여서 가까움을 확인하고 즐기는 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집안의 제사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동제도 떠들썩한 축제였다. 그러니, 신승철 1주기가 축제로 치러진 것은, 제사의 그런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상할 것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밀당하기를 즐기다 – 승철다움

2024년 6월 29일 토요일,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생태적지혜연구소 소장이었던 신승철의 서거 1주기 추모축제 “지금 여기 가까이”가 펼쳐졌다. 조금 일찍 도착하였기에, 나에게 동국대학교 철학과 10년 후배인 승철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시간이 있었다. 승철은 철학-하기에 열심이면서도 철학과의 구심력에 종속되지 않은 철학도였다. 나는, 1989년 승철이 입학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승철이 결국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것을 환영하지는 않았었다. 승철의 동기 김문희는 승철이 ‘과 생활’에 열심이지 않으면서도 과 학생회실에 오는 날에는 논란을 만들어서 선배들과 끈질기게 토론하곤 하였다고 기억하였다. 1990년대에 내가 승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그 끈질긴 토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철학사에 포함된 여러 가지 것들 사이의 연속성과 그 연장선상에 구축되는 체계에 더 관심이 있었던 반면, 승철은, 철학사에서 균열과 빈틈을 보고, 체계화되었으므로 시시각각 낡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철학적 세계관에 ‘지금 여기’를 기준으로 한 비판을 가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서서야 승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어느 날 대학원생들이 학생회관에 고기를 구워먹으러 가자고 했다. 학내 동아리활동을 해 본 적이 없던 나는 호기심에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하여 맑스철학연구회 방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던 대학원생 승철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고, 다른 동아리방에 박혀있던 철학과 소속 죽돌이 죽순이 한둘을 합류시켜 돼지고기를 구워먹었었다. 이미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러 가지 경험도 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그날 나는 예전과는 다르게 승철의 언행을 꽤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승철은 나에게 철학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심력에 쉽사리 딸려들어가지 않은 모습을 언뜻언뜻 보여주었던 것 같다.

만약 자본이 관리하는 세계에서 중심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주변에 간신히 존재하는 것이 불안정적이긴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불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승철의 생활방식은 그런 사람에게 상당한 심적 위안이 되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축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스쳐갔다. 동국대학교 철학과 학생으로서 승철은 나름대로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하고 있던 20세기의 동국대학교 철학과와 철학 자체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구심력에 끌려들어가지도 않으면서 나름대로 명랑한 생활을 조용하게 즐긴 듯하다는 생각이 그 자리에서 들었었다. 승철은 어떤 구심력에도 쉽사리 딸려들어가지 않으면서 나름의 세계를 간신히나마 유지하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 갔다고 할 수 있겠으며, 자본주의의 세계 관리가 촌스러울 정도로 노골화되는 ‘지금 여기’에서도 자본의 강력한 구심력과 밀당하기를 즐기다가 갔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겉보기에 어떻든, ‘지금 여기’에서 가장 강력한 구심력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그것과 밀당을 즐기는 것. 이것이 승철다움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축제를 기다렸다.

가까이해야 할 존재들을 가까이[친친(親親)]하는 연대의 실핏줄 살리기 – 승철스러움

축제는 학술회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래서, 승철이 발굴하여 다듬어 즐겨 사용하였거나 창안한 개념어 하나하나와 직결된 발표들이 이어졌으나, 발표자들은 승철에 대한 추억 혹은 고마움의 표시로 시간의 대부분을 채워나갔다. 2부 사회를 보았던 임지연은 승철을 추억하느라 2부 발표자들이 미처 발표하지 못한 내용을 최선을 다하여 보완하여 주어야 했을 정도다. 그러는 가운데 발표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자들까지 공통되게 밝힌 것이 있었다. ‘영등포 지박령’ 혹은 ‘방구석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졌던 승철로부터 대단히 자주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휴대전화는 플랫폼을 가능하게하고 활성화하는 필수적 조건 가운데 하나이고, 플랫폼은 이미 오래 전에 자본주의가 당분간 지속될 수 있는 주요 조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휴대전화는 한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보청기를 써야 하는 사람보다 안경을 써야하는 사람이 많고, 다행히 안경을 쓰지 않고 있는 사람도 휴대전화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쉽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휴대전화는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승철의 전화하기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고 지키려는 승철스러운 습관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사진 출처 : Lisa Fotios

휴대전화는 자본주의의 구심력을 은밀하면서도 전격적으로 강화시켰다. 동시에 휴대전화는 어느새 사람 각각의 일부가 되어있기도 하다. 이런 휴대전화를 적극 활용하여 승철은 사람들이 글을 쓰게 만들고, 협업하여 책을 내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수년간에 걸쳐 유행한 역병은 물리적 생체적 거리두기를 세계에 강요하였고, 이러한 환경의 급변에 적응하여 살아남으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거리두기에 가장 쓸모있는 도구 가운데 하나인 휴대전화를 더 많이 활용하고 생활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구심력은 휴대전화를 도구로 하는 연결망을 조건의 하나로 하면서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이때 수시로 전화하는 승철의 생활습관은 거리두기를 강요하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극복하면서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연결망이 동시에 연대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실핏줄이 될 수도 있음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었다. 승철은 빈틈없어 보이는 자본주의에 틈이 없지 않음을 알아본 셈이고 그 틈을 자본주의의 구심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역병 유행 시기에 피할 수 없었던 물리적 생체적 거리두기가 권력과 자본이 심리적 거리의 관리를 강화하고 자의적 기준에 의거하여 정교화하는 계기로 작동한 것이라고 한다면, 승철의 전화하기는, 그런 관리와 같은 수단을 사용하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은 존재들과 자유롭게 더 가까워지기 위한 도구로, 전화를 적절히 사용한 성공적인 예라 할 수도 있겠다.

유교 경전으로 꼽히는 4서3경 속 몇 곳에 친친(親親)이라는 말이 박혀있다.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행동방침이다. 이 경전들이 사회적 의미와 정치적 구속력을 가지고 유통되었을 때,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 제1번은 가족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영원히 계속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을 정하는 데 기준이 되는 것을 잠시라도 생각하다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이윤추구에 도움이 되는 정도가 그 기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시대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승철의 전화하기는 가까이 하고싶은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고 지키려는 승철스러운 습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 말고 생태적 지혜-사랑-하기; 승철-하기

고대 그리스에 지혜[소피아(sophia)]에 대한 사랑[필로스(philos)] 즉 ‘필로소피아’라는 말이 있었다. 이 필로소피아가 철학이다. 그래서인지 20세기말의 어떤 철학과 교수는, 어제 갓 입학한 철학도들에게, 철학은 본래 철학함이라고, 오늘 힘주어 강의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철학-하기라 할 수 있다.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혜는 그 변화에 대응하는 것일 것이며, 그런 대응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거나 어느 경계에 의하여 한정되는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지혜의 성격을 사랑이라는 말이 고스란히 받아 안아주면서 지혜에 대한 사랑/지혜-사랑이라는 말이 형성되고 쓰였을 것이다. 소유하였고나 완전히 파악한 어떤 것을 사랑한다고 하지느 않는 다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그러다가 19세기말 이 말을 어떤 일본인이 철학(哲學)이라고 번역하였고, 20세기말에는 철학보다는 철학함이라는 말을 쓰자는 주장이 있었고, 21세기초에는, 온갖 명사와 행위방식 뒤에‘-하기’를 붙이는 말 버릇이 유행하는 가운데, 철학-하기 따위의 말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이 와중에 승철은 ‘–하기’에 앞서 ‘철학’에 주목하였고, 우선 철학 대신 생태적 지혜를 세계에 제안하였다. 거칠게 잘라 말하자면 철학이 개체의 독립성과 비판을 강조한다면, 승철은 생태적 지혜라는 말을 가지고 독립성 뿐만 아니라 관계성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권고한 듯하다. 승철은 지혜-사랑-하기가 지금 여기에서 뭔가 부족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 말 대신 생태적 지혜-사랑-하기라는 말의 사용을 제안하였다고 할 수 있다. 승철은 모든 것들의 연결되어있는 면에 오래전부터 주목하여왔는데, 21세기에 들어섰을 때 승철은 어떤 힘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든 존재들 사이의 연결을 끊임없이 은폐하거나 왜곡하거나 재구성하려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듯하다. 승철은 즉각적으로 그 어떤 힘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태적 지혜 등의 여러 말을 창안하게 된 듯하다.

이런 생태적 지혜가 대화의 대상이 되는 존재의 폭을 점점 더 넓혀가는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승철이 아직 살아있다면, 승철은 지금쯤 대화형 인공 지능 서비스 자체를 대화와 관계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좌충우돌하고 있을 듯하다. 지금 여기에 승철은 없지만 일찌감치 대화와 관계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존재의 폭을 넓혀 온 그의 지적 활동은 기능 면에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있는 대화형 인공 지능 서비스 따위의 것들을 대할 때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해질 수 있게 하여주고 떠나간 셈이다.

그런데 막상 축제에 나선 발표자들은, 승철이 창안한 개념어들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다들 승철과 쌓은 아름다운 추억 따위를 쏟아내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감정 과인인 듯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조금 생각해 보니, 발표자들의 그런 행태는 각자가 승철과 함께 하였던 시간 속에서 각자의 내면 속에 스스로 의식화한 생태적 지혜-사랑-하기 달리 말하자면 승철-하기에 다름아닌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춤; 아직 누구에게는 멀고도 험한 승철-되기

축제 참여자들은 거기에서 채식으로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 먹었는데, 정성껏 차린 좋은 음식이었다. 저녁 식사에 1시간 30분이 주어진 것도 좋았다. 20세기에 여러 학술회의에 참여하였고 학술회의를 조직하는 일도 깨나 해보았던 사람의 경험을 기준으로 볼 때, 이 축제의 사회자 세 사람들은 모두 적절한 역할을 해 주었다. 1부와 2부 사이에 천근성은 추모시를 읽었는데, 그 시는 승철과 함께 한 시간의 추억과 더는 승철과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의 아쉬움을 함께 느끼게 하여주었다. 김영준과 노래패 BTN(방탄노년단)의 공연은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악기 하나를 익혀두면 많은 사람과 공생공락(共生共樂)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사람들은 모두 축제의 장에서 생태적 지혜-사랑-하기를 여한없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사람들은 모두 축제의 장에서 생태적 지혜-사랑-하기를 여한없이 하고 있었다. 사진 : 추모제준비위원회

그럼에도 어느 순간 나는 축제를 벗어나야겠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춤 때문이었다. 축제 안내문에 축제의 거의 마지막 행사로 “함께 추는 춤, 써클댄스(가제) with 선후”가 소개되어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나는 ‘흠! 이거 하기 전에 귀가해야겠군’ 이라는 혼잣말을 했었다. 2023년 가을, 문래공원에서 선후가 주도하는 요가와 댄스에 참여하여 공원 잔디밭에서 여러 사람과 손을 잡아가며 춤을 춘 것은 나로서는 기록적인 일이었다. 나에게, 처음 보는 사람들과, 그것도 ‘손을 잡아가며’ 춤까지 추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축제의 날에도 그랬으며, 아직도 그렇다. 문래공원 댄스 이후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써클댄스를 할 시간이 임박하였다는 조짐이 보이자 나는 옆에 앉아있는 김문희까지 부추겨서 축제의 장을 빠져나왔다, 조급히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바닥에 놓여있던 누군가의 예쁜 스텐 물통을 쓰러뜨린 채 방치하기까지 하였다. 그 과정에 길목에 앉아있던 선후(써클댄스 주관자)와 맞닥뜨리기까지 한 것은 민망함을 더해 주었다. 매일 신체훈련을 하는 연극배우이면서도 춤에 동참하지 않고 나와 동행하여준 김문희가 없었다면 나의 탈출은 무척 비루하였을 것이다.

춤이 나쁜 것도 아니고 선후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내가 춤을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나이를 먹은 것뿐이었다. 그나마 나이가 50대쯤 접어들어서 춤을 머리로나마 조금 이해하게 되었지만, 나에게 아직도 춤은 두려운 것이다. 철학과 학부생이었을 때, 과학철학 강의의 보조자료인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의 『물리학의 도[Tao of Physics]』를 읽으면서, ‘원자가 춤을 춘다’ 따위의 말을 고대 인도의 누구인가 했다는 구절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려 들었다. 춤과 물리학을 연결시키는 것이 과학을 희화화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대단히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을 그나마 나아져서,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가져다준 쇼츠로 발리우드 영화의 군무를 보더라도 다행히 그것을 까닭없이 경멸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춤이야말로 생태적 지혜를 여럿이 함께 느끼면서 겉으로 드러내 주는 것일 수 있다. 춤은 마땅히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을 더 가까이 하게 하여주고, 가깝지 않았던 사람들 까지도 서로 가깝게 하여주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는 것 같다. 춤은 존재하는 것들의 연결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하는 듯하다. 승철이 했던 일이, 가능한 한 많은 존재들 사이의 연결을 통하여, 하나의 강한 힘에 의한 지배와 관리의 잔혹함과 누추함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다면, 낮선 존재들까지 서로 손잡는 춤이 그 일의 첫 장면일 수도 있고, 어쩌다가 그 일이 성공하였을 때 세상에 펼쳐질 수 있는 축제일 수도 있을 듯했다.

나는 승철과 춤을 춰 본 적은 없지만, 승철이 밤거리에서 누군가와 춤을 추는 것을 본 기억은 가지고 있다. 이제 그와 춤출 수는 없고, 그의 별세 1주기 축제에서도 춤판이 펼쳐지기 전에 도망쳤지만, 춤을 즐기고 춤 같은 것으로 더 많은 존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그야말로 승철-되기의 완성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 정도는 하게 되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댓글 2

  1. 감사합니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마땅히 가까이 해야할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게 하고, 가깝지 않은 존재까지도 가까이 하게 하는 계기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네요.
    한 가지 오류를 정정하자면 문래동에서 요가와 서클댄스를 안내한 이는 문윤형님이세요. ^^

  2. 아! 맞습니다. …… 하필 문윤형 님께서 지켜보고 계셔서 크게 당황하여 물병을 쓰러뜨리고 의자를 거칠게 밀어 소음을 내며 도주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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