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5년 1월 17일(금) 생태적지혜연구소 주최로 진행된 〈[제18회 콜로키움] 리바이어던 – 기술과 환경, 정치의 교차점에서〉의 발표문과 논평문을 《생태적지혜》에 차례로 싣는다. 이 행사는 『기후 리바이어던』과 『그린 리바이어던』 두 책을 가지고 기후 위기 상황에서 세계의 정치 미래를 조망하면서, 국민국가, 인공지능, 기술과 환경의 미래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글은 두 번째 책 『그린 리바이어던』을 다룬 글 「[콜로키움 특집] ③ 자유와 규제가 균형을 이루는 제3의 길을 모색하기- 『그린 리바이어던』 과 AI」에 대한 논평문이다. |
1. 그린 리바이어던과 글로벌 거버넌스

그린 리바이어던(위로부터의 통치)과 글로벌 거버넌스(아래로부터의 협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저자는 통치와 협치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가가 의문이다. ‘전 지구적인 제국적 협치’는 2000년대 후반 이후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미국 정부의 일방적인 정치 질서가 국제적이고 국내적인 위기 즉 이라크 전쟁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일국의 정치적 결정만으로 전 지구에서 발생하는 무수하고 다양한 사태들에 대응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나타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지배체제이다. 이러한 체제의 구축에는 몇 가지 계보학적 과정이 있는데, 다자간 경제협력 체제로서의 80-90년대의 WTO 중심 체제, 미국에 의한 전 지구적 협력체제의 거부로서의 일방주의의 등장(전 지구적 체제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반작용), 양자 간 경제협력 체제로서의 2000년대 초중반 이후의 FTA 수립 체제, 정치-경제-에너지-기후(팬데믹을 포함하는) 등 다양하게 발생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미리 수립된 법령(국제법)에 의존하지 않고 전 지구의 지도자들이 일시적이고 임시변통적인 대응책을 그때그때 수립하기 위해 결집하는 전 지구적 제국적 협치 체제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이러한 계보학이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지배 질서 구축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투쟁 형태, 주체성 생산 형태, 경제 생산의 패러다임 변화, 유통의 전 지구화(지구적 로지스틱스 체제)와 그에 따른 각국의 정치 질서 변화의 세부 내용들이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성 형태 속에서 현실주의적인 대안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저자는 녹색의 멋진 신세계라는 녹색 파놉티콘의 세상을 넘어설 대안이 있는가?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세계 질서 구성이 정당해 보인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정당한가? 비록 저자가 그러한 홉스식의 문제의식이 권위주의에 함몰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한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여러 노력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세계 질서를 구성할 힘의 원천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한 그러한 권위주의를 넘어설 근거를 제기하는 일은 어려워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유토피아적 방향으로 나아간다.
3. AI와 넛지

AI는 오늘날 인류 및 자본이 도달한 ‘기술적 구성’(맑스의 의미에서)의 가장 최근 형태이다. 그것은 수공업-대공업 체제를 거치면서 구성된 오늘날의 ‘자본 합성’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계를 생산하는 기계 생산 체제’가 구축된 이래로 AI는 노동하는 인간의 두뇌 및 신체와 기계가 합성되고 접합된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또한 인간의 삶을 통제 감시할 수 있는 자동장치로서 기능한다. 누가 어떤 세력이 기계를 전유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AI가 전 지구인들의 공통장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 지구인들로 하여금 사적 소유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이자 도구로 기능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전략이 동반되지 않는 기술주의적 논의는 공통장을 둘러싼 갈등과 적대의 문제를 외면하기 쉽다.
4.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자유에 대한 고전적인 두 가지 개념으로 문제를 풀어가기에는 오늘날의 세계는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소극적 자유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적 책임과 비인간 존재와의 연대를 통해 실현되는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는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건전한 문제의식일 수는 있지만, 인간 행위의 다양한 측면이 복잡하게 뒤얽힌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에서 자유에 대한 이러한 간단한 대비만으로 대안을 논하기에 충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