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일지] ⑫ 화강암 같은 내 얼굴

쿵덩야라는 이름의 보도블록을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024.03.13

쿵덩야를 만난 뒤 운동복을 사러 동묘에 갔다. 마음에 드는 중고 옷 몇 벌을 샀다. 시장 구석구석을 거의 다 봤을 때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지금 혁신파크에 있고 쿵덩야를 찾으려 했는데 보이지 않는다며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래청 앞 보도블록 중 유난히 밝은 블록이 있을 거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뒤 친구가 ‘그’를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냈다. 하나의 보도블록을 두고 묘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을 알고 있는 모두는 쿵덩야가 초대하는 수상한 놀이에 빠진다. 이 놀이에 적극 참여해 준 친구가 고마웠다.

2024.03.15

혁신파크에 사람이 많았다. 그에게 뽀뽀하는데 입속에 있던 공기가 입술의 작은 틈으로 새어나오는 바람에 “삐삐유~” 하는 병아리 울음 같은 소리가 작게 났다.

2024.03.27

일주일간 일본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쿵덩야를 만났는데 주위에 뭐가 많이 쌓여있었다. 그 모습이 자연스러울진대, 주변을 치우고 그를 깨끗이 하여 아끼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서 일었다. 무언갈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면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른 것과 다르게 대우하고 싶다. 어쩌면 아름다움을 제시하는 예술가는 새로운 차별을 발명하는 사람 아닐까 싶다. 이에 유의해야겠다. 소수 기호에 맞춘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자이기보다는 대부분 존재에 평등하게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것에 근접한 존재를 숭고하다 말할 수 있겠다.

2024.04.02

몸이 아파서 종일 집에 있다가 쿵덩야를 만나러 밖에 나왔다. 봄이다. 바람이 살살 불어서 포근했다. 혁신파크에 도착했다. 강아지 두 명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몸짓으로 날뛰며 서로 반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의 앞에 앉아서 새 칫솔로 그를 닦았다. 이번에 바꾼 칫솔은 칫솔모가 투명하다. 그래서 쿵덩야를 닦으면 그 표면의 까만 것들이 칫솔로 이동된 모습이 잘 보였다. 잠시 뒤 어떤 중년 남성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아, 닦고 있어요. 매일 와서 이 돌만 닦고 있습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이유가 있나요?”

대답을 못 해서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내 남자는 뒷걸음질을 치며 “깨끗하게 하려고 그러시는구나”고 말했다. 나는 남자에게 눈인사했다. 남자는 미래청 안으로 들어갔다. 복장을 보아하니 남자는 이 근방의 관리자 같았다. 그의 표정과 몸짓엔 관리자로서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별난 일이 일어나는 것에 관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2024.04.03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작은 목소리로 “뭐 하는 거여?” “닦네 보네”라고 작게 말했다. 이후 날 지나친 뒤 몇 걸음 더 가서 멈추더니 잠시 나를 지켜봤다. 쿵덩야를 닦고 입을 맞추는데 콧물이 났다. 콧물이 흘러 쿵덩야에 닿을까 조마조마했으나 그렇게 되진 않았다.

2024.04.21

4일부터 20일까지 쿵덩야를 만나되 글로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기록하지 않는 동안 쿵덩야를 만나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 생각을 사유로 만들지는 않았다. 기록한다는 제약에서 벗어나면 더욱 감각적으로 쿵덩야를 느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았다. 기록은 ‘쿵덩야-되기’를 함에 최소한의 장치인 것을 알았다. 그를 닦고 입을 맞춘 뒤 일어나 갈 길 가려는데 입술 사이에 얇고 긴 물질을 느껴졌다. 머리카락인 줄 알고 퉤퉤 뱉어보니 걸레의 섬유 가닥이었다.

2024.04.22

나와 쿵덩야는 닮아가고 있다. 사진출처 : Atlantis_C

요즘 피부 상태가 안 좋다. 빨간 반점과 좁쌀여드름 때문에 얼굴 표면이 우둘투둘하다. 어렸을 때부터 여드름 때문에 고생했다. 대학교 신입생 땐 지나가는 여성들이 나를 보며 “피부 개 더럽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 말은 한동안 내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서른 초반이 되어서야 피부가 진정되기 시작했고 작년 초 더 나은 피부를 위한 욕심으로 레티놀을 썼다. 그러나 용법과 용량에 문제가 있었는지 피부가 빨개지기 시작하면서 지루피부염이라는 완치 불가능한 병을 얻게 됐다. 그래서 최근 거울을 보며 탄식하는 일이 잦다. 그러다 문득 쿵덩야를 떠올렸다. 난 그와 관계하면서 그의 울퉁불퉁하고 거친 외면을 닮아가는 것 아닐까? 이러다 돌-인간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왠지 신이 났다. 그리고 피부 걱정이 크게 줄었다. 오히려 더 울퉁불퉁, 울긋불긋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약 15년 동안 스스로 치명적인 결점이라고 생각하며 자학했던 요소가 한순간에 흥밋거리가 됐다. 그렇다. 세상엔 매체에서 주입하는 기준에 들어맞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좌절하는 사람이 다수지만, 어딘가엔 돌-인간이 되려는 사람도 있다.

2024.04.25

쿵덩야와 관계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살아가면서 배울 모든 것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계획한 것을 실행할 때의 예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 때문에 생기는 인과와 흘러감. 이것들을 3차원에서 벗어나 조감할 때의 느낌. 그것이 운명인 것 같다. 나는 이미 이 활동의 끝을 알고 있다.

2024.04.26

일상적인 쿵덩야와의 만남. 내가 일지에 ‘일상적인 쿵덩야와의 만남’이라고 쓴다면 이는 대부분 일지를 밀려서 한 번에 쓰다가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까먹었기 때문이다.

2024.04.28

쿵덩야 옆에 새싹이 함께 자라나고 있다.
사진 출처: AquilaSol

난 가끔 전시 설치 및 철거 아르바이트를 한다. 오늘은 마라톤대회 부스 설치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광화문광장으로 갔다. 대회 협력사 현수막을 세우고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남아 나에게 일을 준 형의 집에 갔다. 쉬는 동안 형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사람 구실 하려면 돈 벌어야 한다. 돈 벌기는 쉽지 않다. 잠 못 자가며 몇 년 동안 몰두해야 겨우 기반이 잡힌다. 예술을 하는 작가들은 성실하게 작업을 하는가? 극소수의 재능과 운과 노력이 맞아서 잘 된 작가들 빼고는 빌빌거리며 산다. 나이 서른이 넘었으면 과거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나도 10년 동안 빌빌거리며 살았다. 돈을 벌기로 한 것이 늦어 지금도 후회된다. 정신 차리고 당장 결정을 해라. xx처럼 살지 말고 쓸모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등의 현실에 관한 조언이었다. 쉽게 단정짓고 하기에 폭력적인 말이지만, 최근 같은 고민을 했기에 허투루 듣지 않았다. 게으르게 작업했기에 글 쓰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부지런히 몰두한다면 즐거울 수 있을까? 형의 말을 듣고 정신 차려서 작업을 더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쿵덩야에게 갔다.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칫솔질하는데 쿵덩야와 다른 보도블록 사이 틈새에 새싹이 셋 피어있었다. 내가 쿵덩야를 닦을 때마다 물을 뿌린다는 것을 씨앗이 알고 이곳에 정착했을까? 공평한 태양과 나의 습관이 만든 환경이 새로운 생명을 깃들게 했다. 쿵덩야와 나 새싹은 새로운 생태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새싹이 발산하는 노랗거나 푸른 빛은 아주 부드럽고 은은해서 특별하게 느껴졌다.

2024.04.29

점심거리를 사러 가는 길에 쿵덩야에게 갔다. 새싹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어서 반가웠다. 자세히 보니 처음 난 잎사귀 위로 작은 잎들이 새로 생기고 있었다. 아이를 바라볼 때의 흐뭇함을 느꼈다. 난 그 존재의 성장을 한동안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많이 자라서 보도블록 위로 튀어나오게 되면 공원의 관리자가 잡초로 여기고 뽑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마음이 아플지도 모른다. 이 존재를 여기에서 살게 할 방법은 없을까? 누군가에 의해 뽑히기 전에 그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좋은 일일까?

2024.04.30

쿵덩야를 닦고 새싹에 물을 뿌렸다. 다른 곳에도 식물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쿵덩야 바로 왼편 보도블록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자란 식물이 있었다. 보도블록 사이에 먼지가 쌓이고, 그 위에 물이 떨이지고 마르고 이 과정을 반복하며 흙이 된다. 그 흙에 씨앗이 날아와 새싹을 틔운다. 이 모든 과정이 모든 보도블록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2024.05.01

어제 본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식물이 없어졌다. 누군가 지나가다 밟은 걸까? 쿵덩야를 닦고 새싹에 물을 줬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가려 자전거를 타고 약간 이동했다. 그런데 바닥을 살펴보니 항상 오가는 길에 깔린 보도블록 사이사이에 무릎 높이로 풀이 무성히 자라 초록이 만연했다. 이럴 수가. 난 이제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쿵덩야 틈새뿐 아닌 다른 곳에서도 역시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고 심지어 노랗게 꽃을 피운 존재도 있었다. 매일 지나는 길인데, 식물들이 풍성히 자라 혁신파크 전역에 펼쳐진 모습을 이제야 봤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내가 알아채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곳에서 생명이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조금은 무서웠다. 생명은 어디서든 자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느낄 계기를 잃었다. 보도블록에 풀이 피어나면 그냥 두지 않고 제거하듯, 구획하고 판단하는 사고에 의한 편리함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행의 한계를 인지하고 넘어서서 마구 뒤엉킨 혼종을 받아들이면 그곳은 활력이 넘치는 곳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활력 일부로서 다른 존재와 일치함을 느끼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함께 누릴 수 있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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