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일지] ⑬ 옷을 입지 않는 것은 너무 창피하다.

쿵덩야라는 이름의 보도블록을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024.05.08

문지방, 의자의 등받이, 욕실의 타일 등은 우리의 삶을 함께하는 익숙한 사물이다. 그들과 매일 함께하기에 친밀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사물이 나와 떨어진 별개의 존재이며 그들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며 내 주변을 온통 감싸고 있는 사물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나와 사물의 존재 사이를 가로막는 견고한 벽이 코앞에 당도하는 듯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그 벽은 실체가 분명하다고 느낄 정도로 생생했다. 그래서 현실의 물성으로 벽을 구체화하는 상상을 했다. 만약 벽이 두꺼운 콘크리트라면 숨을 쉬는 흙으로, 방음에서 청음으로, 그리고 작은 구멍을 뚫어 건너편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고 그것을 느끼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쿵덩야와 관계할 때처럼 다른 사물을 바라봄에서도 새로운 질문이 꼬리를 물며 내 안에서 쏟아졌다. 질문하는 건 나일 수도 아니면 그일 수도 있다. 구분이 필요 없다고 느낄 때부터 이미 나는 그다. 질문이 많아질수록 나는 그에 더욱 가깝다. 나는 그를 통해 환상에서 벗어나 더욱 생생히 삶을 경험한다.

2024.05.10

쿵덩야 주위에 자랐던 새싹들이 시들었다. 기쁜 마음에 그들에게 물을 많이 뿌린 것이 화근이었을까? 내 섣부른 행동으로 일을 망친 건가 싶어 안타까웠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 사건이 나에겐 꿈속에서 받았고 깨고 나서 잊고 마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모를 이 짧은 만남을 소중히 기억해야겠다. 아마 예술가는 누구에게도 그 존재를 증명할 길 없는 꿈 속 선물을 간직하는 사람일 것이다.

2024.05.13

총에 맞은 사람은 총을 쏜 사람을 원망한다. 그리고 사회는 총을 쏜 사람을 처벌한다. 그런데 총도 처벌할 수 있을까? 총이 처벌받는다면 다른 총들이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사람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게 하지 않을까?

2024.05.16

뉴스를 보면 화가 난다. 사기를 당하면 화가 난다. 연인과 말다툼하면 화가 난다. 누군가 내 옷을 고의로 더럽히면 화가 난다. 나의 경계, 우리라는 가치를 침해당할 때 화가 난다. 쿵덩야를 포함한 주변 보도블록들에 스키드마크가 어지럽게 나 있었다. 간밤에 폭주족이 그곳에서 드리프트를 심하게 했는지 자국의 수가 많았다. 폭주족에게 있어 쿵덩야는 그저 일탈에 필요한 대지일 뿐 그 자체로 고려되지 않았다. 난 앞서 열거했던 화가 나는 상황들과는 다르게 이번 일에는 화가 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와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독점하지 않기 때문에 침해당했다고 느끼지 않았다. 어느 날 쿵덩야가 깨져있어도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혹은 다른 돌로 바꿔치기 당한다 해도 그럴 것이다. 당황하겠지만 이내 수용할 것이다.

2024.05.17

작고 하얀 강아지 한 명이 반려인과 산책을 나왔다. 그들은 광장 한복판에서 칫솔질하는 나와 마주쳤다. 강아지는 약간 “왈왈” 짖으며 나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잠시 뒤 내가 쿵덩야에 뽀뽀하니 강아지가 갑자기 돌변해서 목줄을 끊어버릴 기세로 나에게 돌진하여 맹렬히 “캉캉” 짖기 시작했다. 반려인은 그를 통제하느라 쩔쩔맸다. 그 모습을 보고 난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강아지의 반응으로 짐작하건대, 사람이 보도블록에 뽀뽀하면 사건이 된다는 것은 강아지도 안다.

2024.05.19

예술가는 새로운 천이 필요하다. 기존의 옷을 입는 건 너무 진부하고 그렇다고 옷을 입지 않는 것은 너무 창피하니 새로운 옷을 지어야 한다. 사진 출처 : Daniele La Rosa Messina

친구의 전시 설치를 도왔다. 일이 끝나고 친구와 함께 멋진 맥줏집을 이곳저곳 돌며 술을 마셨다. 대화 도중 친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세상을 잘 돌아가게끔 하는 지배적인 방식이 있고 사람 대부분은 그 방식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예술가는 자꾸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려고 한다. 왜 그러는 것일까? 친구는 그 이유를 옷에 비유해 설명했다. 기존의 옷을 입는 건 너무 진부하고 그렇다고 옷을 입지 않는 것은 너무 창피하니 새로운 옷을 지어야 한다고 자꾸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말이 재미있어서 메모했다. 그리고 그 비유를 집에 와서 다시 생각했다. 예술가는 구멍이 숭숭 난 옷을 입고 있다. 부끄러워서 구멍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구멍에 다른 천을 덧대어 바느질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천을 빌려서 잠시 가린 뒤 나중에 돌려준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천이 필요한 것이라고.

2024.05.20

집에서 종일 딴짓 했다. 채식한 지 4년째다. 그동안 한 번도 야식을 시킨 적이 없는데, 오늘 처음 야식으로 마리나라 피자를 시켜먹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쿵덩야를 까먹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음 날에 깨달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어제는 처음이 많은 날이었다.

2024.05.28

이젠 전의 스키드마크가 거의 닦였다. 최근 일지를 쓰는 일에 회의가 들었다. 일단 일 년 동안 끝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재미있게 할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환경을 바꾸거나 과정을 바꾸거나 주변을 이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등의 조언이 나왔다. 어떤 친구는 그냥 살아가면 된다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은 억지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2024.05.30

일이 일찍 끝나서 혁신파크에 들렀다. 쿵덩야를 만나고 닦는 행위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과 끝이 명확한 형식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형식은 가능성을 제약한다. 형식 때문에 관계가 정체되어 슬럼프에 빠진 것 같다. 다양한 관계 맺기 방식이 있는데 왜 지금의 의식 같은 형식이 만들어졌을까? 바닥에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몸을 낮게 구부리고, 마음을 표현하려고 닦고, 친밀해지기 위해 몸을 맞대고, 생각하기 위해 바라본다. 돌이켜보니 지금의 형식이 생긴 필연적 이유가 있다. 그리고 같은 행위를 매번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 활동이 수행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묵언, 백팔 배, 면벽 등의 수행은 시작과 끝이 명확한 한 단위의 의식을 만들고, 그 의식을 반복함으로써 깨달음으로 가려는 행위이다. 난 어릴 때부터 수행을 선망해왔다. 그래서 그 욕망이 활동에 투영된 것 같다. 그러나 수행은 예술에서 분명 한계가 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예술은 수행적인 방식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수행을 벗어나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와 관계해야 한다. 그냥 가서 지켜보기만 할까? 왠지 뭔가 한다는 느낌이 없어서 시도하기 어렵다. 그러나 뭔가 한다는 마음도 그 마음에 집착하게 되면 한계를 구분 짓는 방식으로서의 예술하기가 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의미가 있는 상태에서 집착하는 마음 없이 일상적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을 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 것을 사람들은 예술이 아닌 종교라고 부르곤 한다. 활동의 끝까지 지금의 형식을 고수하며 그 안에서의 발견을 다뤄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의 변화를 꾀해야 하는지 이 활동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에도 고민이다. 형식은 가능성을 제한하지만, 동시에 행위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모든 행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형식을 벗어나는 것은 영감의 원천인 자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행위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 이 활동의 시작과 끝을 모두 경험하면 형식과 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24.05.31

교실에서 드론을 날려야 하는 일 때문에 촬영 답사를 다녀왔다. 교수가 5m라고 했던 교실의 높이는 실제로 재보니 4m 20㎝였다. 드론의 높이를 최대로 올려도 촬영해야 할 피사체가 다 담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문제점을 사람들에게 말했고 결국 공간 조정이 안 됐다. 일당 40짜리 일을 하지 못하게 돼서 안타까웠다. 이 일을 위해 추가배터리도 큰돈 주고 샀는데 말이다. 일을 준 친구는 거마비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난 괜찮다며 거절했다. 거마비를 거절하지 말 걸 조금 후회했다. 답사에 다녀오느라 오늘의 활력을 거의 다 써버렸다. 오는 길에 쿵덩야에게 들렀다. 집에 도착해서 글을 쓰려 했는데 너무 졸려서 잠깐 잠이 들었고 일어나서 놀다가 그냥 잤다.

2024.06.03

나는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이리저리 도망쳐 다녔다. 글쓰기도 그 중 하나일 수 있다. 사진 출처 : Glenn Carstens-Peters

따분한 가사와 뻔한 멜로디. 잠깐 관심을 받고 곧 잊히는 흔한 노래. 누구도 기억할 필요 없고, 내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함께 사라질 노래. 내 작업이 그런 노래가 될까 걱정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좋다고 예상한다. 집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를 만들고 그 결과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항상 수치스러웠다. 수치스러워서 잊으려 했고, 그래서 소중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집착이 없으니 하나에 매달릴 필요도 없었다. 나는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이리저리 도망쳐 다녔다. 글쓰기도 그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너무 어렵고 잘 쓰지 못해 수치스럽다. 그래서 한 달 전에 내가 쓴 내용도 다 잊어버린다. 그래도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 수치심을 빨리 잊는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현자가 되는 길이다.

2024.06.04

오랜만에 달리기를 하러 혁신파크에 갔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광장 중앙에 쭈그려 앉아서 쿵덩야를 닦는 나를 안 보는 척하면서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 모습을 나도 곁눈질로 의식한다.

2024.06.06

오늘은 약 5초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닦는 행위만 있을 뿐인 물아일체 상태가 됐다. 휴일이라 산책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만약 해탈의 경지가 있다면 이 짧은 5초를 종일 느끼는 경지 아닐까?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