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7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작년에 사용하던 창문형 에어컨을 꺼냈다. 이 물건이 오래된 제품이라 고약한 굉음을 낸다. 소음에 민감한지라, 소음이 덜한 새 제품을 살까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 그냥 쓰기로 했다. 쿵덩야를 만난 뒤 집으로 돌아와서 에어컨을 설치하기 전 사전 준비를 했다. 예전에 에어컨에서 물이 넘치는 바람에 곤란을 겪은 적이 있어, 이번에는 에어컨 바닥에 구멍을 뚫어 배수가 원활하게 만들어보려 했다. 드릴로 구멍을 뚫는데, 깔끔하게 뚫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드릴을 잡고 스위치를 약하게 눌렀다. 비트가 천천히 두 번 돌아가려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폭포처럼 뿜어져 나왔다.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더 큰 폭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챙겨 급히 집 밖으로 나왔다. 집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릴 만큼 연기가 강하게 분출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작은 몸체에 이렇게 많은 양의 가스가 압축되어 있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약 5분 후에야 소리가 작아졌다. 그제야 집으로 돌아갔더니, 옷이며 의자며 방바닥까지 집 전체가 미끈거리는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연기는 수증기가 아니라 유증기였다. 만약 스파크가 튀었다면 폭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늦은 밤까지 청소하느라 혼이 났다. 결국, 다른 에어컨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2024.06.10
오늘의 뽀뽀는 이상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내 입술의 요철과 쿵덩야의 요철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는 듯한 쾌감을 느끼며, 그 순간 우리는 서로 완성하며 일치했다. 이 일치함은 사물과 관계할 때 능동적인 주체인 ‘나’와 수동적인 객체인 ‘그것’이라는 지배적 통념을 허문다. 그리고 ‘나’라는 환상을 넘어 객체로서 객체와의 상응을 가능하게 한다. 이 경험은 낯설기는 하지만 경이로웠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혁신파크를 한 바퀴 도는 거리는 500미터에 해당한다. 10바퀴를 돌면 5km 달리기를 완수할 수 있다. 정해진 코스를 일정한 속도로 돌며 바로 뒤에 닥쳐올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1바퀴를 돌 때는 2바퀴의 미래를, 2바퀴를 돌 때는 3바퀴째의 미래를, 3바퀴를 돌 때는 10바퀴의 미래를 생각했다. 첫 바퀴를 뛰는 나는 이미 10바퀴의 미래와 함께하고 있다. 5km 달리기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한 형식 안에서는 각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다양한 형식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가 이미 내재한 방향으로 갈 확률이 높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태도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누구나 행하는 본능이다. 아마 이 태도의 두 극점에 있는 존재는 크루즈 여행을 파는 상조회사와 정기적금이 없는 빈곤한 작가 아닐까? 오늘도 별일 없이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 목줄을 하지 않은 커다란 리트리버가 나를 덮쳐왔다. 가까스로 피하느라 발목을 삘 뻔했다.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돌아봤지만, 그와 함께하는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개들과 사람들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정해진 코스를 계속 뛰었다. 잠시 멈춰 주인을 찾거나 개를 달랬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나는 산책로의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가로수, 사람들이 걷는 방향, 운동복과 운동화의 매듭이 이끄는 형식에 사로잡혀 나를 덮쳐온 리트리버를 무시하고 예정된 미래를 완수했다.
2024.06.11

사진 출처: jarmoluk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에서 깼다. 정해진 시간에 알레르기약을 먹어야 했기에, 비몽사몽 상태로 렌틸콩 크기의 작은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겸사겸사 옆에 있던 엄지손톱만 한 아르기닌 알약도 함께 삼켰는데, 순간 영양제가 목에 턱 걸렸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알약을 삼키기 위해 마신 물이 입가로 질질 흘러 하얀 티셔츠를 적셨다. 기도가 막혔다면 큰일이었다. 가슴을 주먹으로 턱턱 치며 뱉어내려 했지만, 이물질은 도무지 빠져나오지 않았다. 끄억끄억 소리가 절로 났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겨우 숨을 조금씩 쉴 수 있었고, 약간 진정이 됐다. 연거푸 물을 마셔 이물질을 겨우 삼켰다. 하지만 목에는 여전히 이물감이 남아 있었다.
사태가 진정되고 침대에 걸터앉아 방금의 상황을 복기했다.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하임리히법을 검색해보았다. 혼자 있을 때 기도가 이물질로 막혔을 경우, 의자의 등받이 부분에 명치를 대고 강하게 주저앉거나, 명치에 주먹을 대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방법이 있었다. 평소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삶이 힘들어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삶이 평온하고 행복하기에 미련이 없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막상 죽음이 조금 다가왔을 때 내 몸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쳤었다.
살아가려는 동물의 본능은 이성을 뛰어넘는다. 아주 약간의 생명의 위협만으로도 다리가 풀릴 만큼의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공포와 고통을 일상적으로 대량 생산하며 우리 삶 전반을 지탱하는 산업이 있다. 바로 공장식 축산업이다. 한 명의 돼지는 한 명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돼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서로 알아보고, 사랑하며, 편한 곳에서 자고, 놀이하고, 아기를 돌본다. 그러나 인류는 그 한 명 한 명의 ‘나’의 너무나도 당연한 욕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은폐하며 그들을 전 지구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맛의 상호 식민지화를 통한 수요 증대와 그와 관련된 여러 산업 때문일 것이다. 그 전반을 보면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맛 혹은 맛에 대한 환상이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다. 단지 인간의 사소한 이익인 ‘맛과 재미’ 때문에, 동물의 핵심 이익인 ‘본능대로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는 삶’이 아무런 고려 없이 잔혹하게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학살은 보도블록(닦인 길)이 만들어낸 미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도블록을 통해 은연중에 효율과 생산성 증대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보도블록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바라보고, 다른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의 뽀뽀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능숙했다.
2024.06.12
여름이다. 잠깐만 밖에 나와도 땀이 흐른다. 쿵덩야 주변의 보도블록들은 흡수한 태양빛을 열기로 뿜어내고 있었고, 조금만 지나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 같았다. 그를 닦고 입을 맞추는데, 입술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그는 살아있다. 이건 망상일까? 그도, 우리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존재들처럼 더우면 열을 받으며, 추우면 차가워지고, 치면 소리가 나고, 내던지면 부서지며, 물을 흡수하거나 뿜어내며 땅 위에 서 있다.
2024.06.14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재던 습관을 버리니 그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 예전에는 속으로 초를 세며 시간의 흐름에만 신경 썼지만, 이제는 그 집중이 그에게로 옮겨가면서 그를 더 깊이 느끼게 된다.
2024.06.16
서울혁신파크 개발 반대에 앞장서고 있는 ‘비건카페 쓸’의 후원 파티에 친구와 함께 갔다. 레게 음악을 듣고 비건 음식을 즐겼다.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친구와 함께 쿵덩야를 만났다. 나는 쿵덩야를 닦고 입을 맞췄고, 친구는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그런데 친구가 영상을 찍는 것이 약간 아쉬웠다. 평소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하면 그 존재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내 활동은 사람들이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게 되면 거의 모든 것을 놓친다고 느낀다. 그 순간의 관계와 상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데, 기록물로만 접하다 보면 단지 이상한 기행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24.06.17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동료와 함께 신승철 소장님 1주기 추모 축제에 사용할 현수막을 만들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쿵덩야를 만났다. 그를 닦을 도구를 가져오지 못했는데, 시간도 늦고 너무 지쳐서 집에 가서 도구를 챙겨 다시 나오기엔 기력이 없었다. 결국, 맨몸으로 쿵덩야 앞에 섰다. 그의 표면을 손으로 털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물기가 없어서 그런지 건조했고, 냄새도 평소와 달랐다. 확실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왜 보도블록은 더러운 것일까? 이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을까? 과거 유럽에서는 목욕하면 병균에 노출되어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씻지 않아 몸에서 냄새가 나면 오히려 건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 그 상식은 완전히 뒤집혔다. 그렇다면 쿵덩야도 더럽지 않다고, 보도블록에 입을 맞추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입술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며, 초등학생 시절 반에서 한 명쯤은 흙을 먹는 아이가 있기 마련인데, 그 아이가 지금의 나라는 생각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2024.06.18
오늘도 닦기 전에 먼저 뽀뽀하려고 했는데 깜박하고 버릇대로 칫솔질부터 하는 나를 발견했다.
2024.06.20

사진 출처: Fajaryogaprawiranta
사용한 지 10년 된 밥솥이 갑자기 꺼졌다. 신기하게도, 밥을 짓는 도중이 아니라 마지막 밥을 훌륭하게 짓고 나서야 그 쓰임을 마쳤다. 이런저런 버튼을 눌러보고 콘센트를 다른 곳에 꽂아 봐도 밥솥은 깨어나지 않았다. 보온 기능마저 작동하지 않아서, 다 지은 밥은 작게 나누어 냉동실에 넣어야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첫 자취를 시작하며 부모님께서 사주신 빨간색 밥솥. 지금 보기엔 촌스러운 디자인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최신형의 멋진 밥솥이었다.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로 다시 은평구로 이사하며 지난 10년 동안 나와 함께한 빨간 밥솥이 마침내 그 역할을 다했다. 2년 전부터 고무 패킹이 헐거워지면서 물이 조금씩 새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쌓이다 보니 결국 밥솥 내부의 전기장치에 물이 들어가 고장이 난 것 같다. 섣불리 새 것으로 바꾸지 않고 그 존재의 역할이 다할 때까지 함께하는 것은 큰 뿌듯함을 준다. 그는 다른 용도로 쓰인 적이 없다. 그저 묵묵히 밥 짓는 일만 했다. 마치 한 가지 일에 헌신한 장인의 마지막을 모습을 함께한 것 같아 감탄했다. 외출해서 밥솥과의 고별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쿵덩야를 만났다.
2024.06.24
집 앞 도로변에서 밤낮으로 보도블록 교체 공사가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그곳에 깔려 있던 보도블록은 지그재그 모양의 U형 인터록킹 블록이었다. 이 보도블록은 88올림픽 때 한국을 방문할 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대대적으로 깔린 것이었다. 당시 U형 블록이 유행했기 때문에, 아직도 곳곳에서 이 블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보도블록도 유행을 타기 마련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형태의 보도블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쿵덩야와 같은 종의 보도블록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번 공사도 U자형 블록을 쿵덩야 블록으로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길에 깔리기 전, 보도블록이라 부르기엔 아직 그 역할을 하지 않고 있는 덩어리들을 보니 그 존재의 무겁고 딱딱하고 거친 성질들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사물에 관한 감수성이 높다는 것. 독특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사랑받고 싶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