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권고-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독후기

인과관계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과관계를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일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한강의 소설들은 사람들에게 때때로 인과관계를 보다 넓은 시공으로 확장해 볼 것을 권하는 글로 볼 수도 있다.

인식의 미시사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사진: John Sear

지난 2024년 12월 말, 한강이 노벨상을 받고 나서 한 강연에서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이 말은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가 다루고 있는 소재인 5·18광주민주화운동(1980)과 제주4·3사건(1948)이라는 과거가 현재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달리 말하자면, 그때의 죽음들이 지금의 한국 사람들 나아가 세계 모든 사람의 삶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의문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 학생이던 1970년대 말,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실린 여러 글을 통하여 거창양민학살사건과 제주4·3사건 등 태어나기 전 10년 안팎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즉각적으로 그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저 ‘그런 사건이 있었구나’하는 느낌이 든 정도였다. 그러다가, 1979년 대학에 입학하고, 그해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소요’를 문무대(당시 대학생들의 단기 병영체험장)에서 훈련 사이 휴식 시간에 훈련교관으로부터 전해 듣고, 10월 26일 문무대에서 퇴소하였고, 박정희가 죽던 시간에는 군대체험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가지고 집에서 이른 잠에 빠져들었던 듯하다. 박정희의 죽음은 27일 아침, 신문을 통해서 비로소 알았다. 12·12 군사반란은 그것이 일어나고 며칠 지나서 그저 그런 소란 정도로 느끼며 지나갔었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1980년 봄이 되고 나서야 12·12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취해지면서 휴교령이 떨어지고 학교에 공수부대가 진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군인이 통치한다는 것이 극단의 억압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해로울 수 있겠다는 느낌을 확연히 가지게 되었던 듯하다.

그런데도, 내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은 황석영이 항쟁 참여자들을 포함한 체험자들의 증언을 모아 정리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를 읽어보고 나서였다. 그 책을 접하였던 1985년은 학교에서 ‘최현대사’하는 기이한 이름을 걸고 상영된 ‘광주 비디오’를 본 해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읽게 된 홍희담의 소설 『깃발』(1988)은 ‘넘어 넘어’(『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전해주었던 정보들을 넘어서서 나의 인식에 총체성을 부여해 주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거창양민학살사건과 제주4·3사건 등에 대하여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제주도 태생인 친구의 어머니가 두 번 결혼해야 했던 사연을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이후였고, 26년생인 어머니가 ‘서청’(서북청년단)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음색이 조금은 달랐었다는 것을 새삼 기억해 낸 것도 그 이후였다. 이것이 20세기 한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비극들에 대한 어떤 개인의 인식 속 미시사(微時史)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그래서였을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나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같은 말을 한강이 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한강이 대단한 말을 한 것처럼 여기저기 ‘복사 붙이기’하는 세태가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고, 오히려 황석영과 홍희담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 그리고, 권위에 순종적이었던 나를 조금이라도 변화시켜 주었으나 나는 전혀 겪지 않은 어려움을 감내하며 순탄한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던, 모든 학번에 걸쳐 있었던 선후배들이 새삼 고마워졌었다. 그래서인지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를 굳이 읽어볼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손가락 끝 미세 접합수술을 하려고 병원에 입원한 누나가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2007)를 읽었다기에, 누나를 덜 심심하게 하기 위한 화제를 만들까 하는 마음에, 병원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 그 연작을 읽게 되었다.

공기처럼 퍼져있는 폭력을 숨 쉬며, 잘못된 만남을 이어가는 삶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 불꽃」 세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두 자매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월남전에서 훈장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안고 돌아와 가정을 꾸리고 소도시에서 자영업을 하며 살아가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딸들로 태어나 자랐다. 자영업을 그럭저럭 유지했음에도 딸들을 ‘그 흔한’ 대학에도 보내지 않은 것이 자매의 성장 환경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어주었다. 큰 딸은 상경하여 혼자 힘으로 자영업자가 되었다가 전업 미술가와 만나 결혼하고, 작은 딸 경혜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를 원한 나름 유능한 남자 회사원의 선택을 받아들여 부부가 된다. 나에게, 「채식주의자」는 작은 딸 경혜와 나름 유능한 남자 회사원 사이의 잘못된 만남을, 「몽고반점」은 작은 딸 경혜와 큰 딸의 남편인 전업 예술가 사이의 잘못된 만남을, 「나무 불꽃」은 큰 딸과 전업 예술가 사이의 잘못된 만남을 알려주는 이야기로 읽혔다. 이 만남들은 순간순간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기이하거나 기구하게 어긋난’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만나면서 이어가는 그들 모두의 삶은 한순간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았다. 두 자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보자면, 그들의 부모 특히 아버지의 폭력성과 억압성이 자매의 모든 선택에 영향을 준 듯하였고, 소설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행동의 대부분이 그런 영향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 같았다. 큰 딸이 일찌감치 부모 곁을 떠난 것과 작은 딸 경혜가 지극히 평범한 여자가 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연작 속에서, 전업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적 이상의 완성을 위해 아내의 동생과 성교하다가 아내에게 들킨다. 그 과정을 읽으면서 나는 그 예술가가 아내, 자녀 등 모두에게 각기 다른 느낌의 폭력을 행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남편이 동생과 성교한 현장을 목격한 큰딸은 앞뒤를 따져보지 않고 앰뷸런스를 부른다. 이때 큰딸의 내면을 소설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쁜 새끼.” 아내는 낮은 목소리로,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 …… 저런 애를”1

여기에서 동생을 그저 아픈 존재로 생각한 것은 지극한 선의일 수도 있지만 일방적인 규정이고 폭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을 ‘애’라고 생각한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때 큰딸이 전업 예술가 남편과 동생을 나란히 앉혀놓고 ‘왜들 그랬어? 이유가 있을 꺼 아니야?’ 라고 차분히 물어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상식이라고 대략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여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이 이 연작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식주의자』가 갑자기 유명해지다 보니, 경기도 교육 당국이 이 소설을 청소년이 읽기 적합하지 않은 글이라고 판단하였었다는 것이 뒤늦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또한 상식을 차분하게 되묻는 계기가 될 듯하였다.

『채식주의자』가 제기하는 이런 문제들은 꽤 많은 한국인을 비참하고 우울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글에 국제적인 상을 주는 것을 보면, 한국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 소설의 문제 제기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문제적 상황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는 추론도 가능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주위를 돌아보니, 극단적 차별과 조롱의 언행을 고래 물 마시듯 행하는 권력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상당히 씁쓸한 느낌으로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차별과 조롱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을 때, 작가는 그 이면에 있는 억압과 폭력을 보고 그것을 드러내는 글을 써 온 것 같았다.

때때로 멈춰 돌아보라는, 평범한 권고

그러고 보니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가 주목받은 이유도 알 수 있을 듯하였다. 내가 40여 년 전에 간접적으로나마 알았다거나 직접적으로 체험했다고 치고 고이 접어두었던, 40여 년 전 광주의 비극과 70여 년 전 제주의 참극을, 작가는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반추하고 소설로 정제해 왔던 것 같았다. 40여 년 아니 70여 년이라는 시간은 어떤 기억을 퇴색시키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던 듯하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매일매일 기억을 취사선택하면서 독립과 자유를 가능하게 하여주는 먹이활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삶을 강요당한다. 여기에 변화의 가속화가 더해지는 현장이 지금 여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 즉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가를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온해 보일 듯하다. 이런 사람에게서 개인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모습까지 배어 나온다면 그는 아마도 몹시 외로워졌을 것이다.

광주 망월동 묘역, 사진: Rhythm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경구(警句)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쓰였던 적이 있다. 어떤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이 말을 남기신 것이 아닌데도, 이 말을 인용할 때마다 그 근거로 그분을 들먹이는 것이 무식해 보인다는 냉소가 꽤 넓게 퍼져있는 듯하였다. 세계화라고 하든 지구촌화라고 하든 노동력의 이동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살림살이가 변모하면서, ‘민족’이라는 말의 실체성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냉소를 강화한 듯하다, 이런 냉소가 아니었더라도, 역사적 상상력의 적용 범위와 방향을 적절히 설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만큼이나 배제와 억압의 기준을 강화하는 부작용을 허용하는 빌미가 되곤 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상상력을 스스로 억제하면 그 사람은 아주 좁은 인과적 사고에 갇히게 된다. 일상의 삶은 주변의 여러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적절히 연결하는 가운데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지금과 멀리 떨어져 있는 때에 벌어진 사건을 나의 삶에 직결되는 인과관계에 끌어들이는 일일 수 있어서, 놀이 혹은 몽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상상을 인과적 사고에서 배제하려는 경향은 오랜 시간에 걸쳐 복잡하게 설정될 수밖에 없는 여러 관계를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 버려서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빈약하게 만들 수도 있을 듯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는 40여 년 전과 7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돌아볼 것을 권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쁜 일상에서도 때때로 멈춰 돌아보라는 평범한 권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권고를 작가는 소설 밖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등의 의문문으로 다시 표현한 셈이다. 작가가 그런 의문을 새삼 발설한 것은 사람들이 좀처럼 멈춰 돌아보지 않거나 못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 「몽고반점」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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