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문화 이면의 불안과 공포
화이론(華夷論)은 “중국 문명을 중화(中華)로, 그 외 다른 문명을 오랑캐[이(夷)]로 구분하고,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상”이라고 AI는 답한다. 달리 말하자면, “중국이 자국의 문화와 국토를 자랑스러워하며 타 민족을 배척하는 사상”1이라고 할 수도 있다. 화이론은 영어로는 ‘Sino2centrism’으로 번역된다. 이 번역은 화이론이 가지는 중국중심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는 말이 화이론 대신 사용되기도 한다.

중국(中國)이라는 말은 기원전의 문헌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나라 이름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 그러다가 1912년에 생긴 중화민국(中華民國)과 1949년에 생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약칭으로 중국(中國)이 사용되면서 중국이라는 말은 나라의 이름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중화(中華)라는 말도 이런 추세와 함께 널리 받아들여진 듯하다. 1912년 중화민국이 생길 때 그것을 주동한 정치가와 사상가들은 중화민국을 5족 공화(共和)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공언하였다고 한다. 이때 5족은 한족·만주족·몽골족·장족·회족이다. 이들을 포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50이 넘는 소수민족이 공존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 가운데 장족의 영토[티베트]와 회족의 영토[톈산산맥 남북]는 청나라가 병합한 것이어서, 청나라의 뒤를 이은 중화민국으로서는 그 병합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5족 공화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 듯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생긴 후 장족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무력 침공한 일 그리고 현재 회족을 대상으로 강제수용을 시행하는 것을 보면, 병합 상태의 유지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최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여러 이민족들이 중원이라고 하는 한인들의 생활공간을 번갈아 침략하였다. 몽골[원] 여진[금·청] 등 이민족들이 중원을 차지하고 왕조를 유지했던 기간도 길었으며, 중원에 정착한 이민족인 선비족이 왕조를 창건하여 유지한 때[수·당]와 여러 이민족들이 한인들의 생활공간을 차지하기 위하여 쟁패하는 가운데 많은 왕조가 명멸한 때[위진남북조·5호16국]는 한인들의 생활공간에서 발생한 문화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시대였다. 줄여 말하자면, 수도가 장안이었고 실크로드를 통하여 세계와 연결되기 시작한 당(唐) 시대부터 비로소 중국 문화는 세계 최고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찬란한 문화의 이면에는 그것이 발생한 공간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삶을 물들였던 불안과 공포가 있었다. 특히, 통일국가들의 지속기간이 5백여 년을 넘나든 한반도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지속기간이 2백 년 안팎에 불과하였던 당·송·원·명·청이나 수십 년에 불과했던 위진남북조·5호16국의 역사는 불안과 공포를 직감적으로 떠올리게 하여준다.
평천하라는 이름의 가부장제
불안과 공포는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이고, 그 시대가 낳은 문서로, 제목이 ‘큰 사람이 되려면 닦아야 하는 학문’이라는 뜻인, 《대학(大學)》의 대미를 장식하는 평천하(平天下)라는 말에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이 문서는 큰 사람 즉 최고 권력자에게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것을 요구한다. 혈구(絜矩)라는 것은 나무나 쇠를 이용해 90도 각도로 만든 ‘ㄱ’자 모양의 자라고 한다. 이를 곱자라고도 한다.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혈(絜)은 잰다는 뜻이고 구(矩)가 곱자라는 뜻이니, ‘혈구’는 ‘곱자로 잰다’로 풀이해야 마땅한 말일 수도 있다. 옛날에는 목수들이 이 도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며 집을 지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나의 마음’을 곱자 삼아 그것을 기준으로 남을 헤아리는 태도라고, 혈구지도를 설명할 수 있겠다. 《대학》 전10장은 혈구지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윗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뒷사람에게 가하지 말며, 뒷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앞사람에게 따르지 말며, 오른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왼쪽에게 사귀지 말며, 왼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오른쪽에게 사귀지 말 것이니, 이것을 일러 구(矩)로 재는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3
주희는 《대학장구》에서 혈구지도라는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잡고 있는 바가 요약하면서도 미치는 바가 넓으니, 이는 천하(天下)를 평(平)하는 요도(要道)이다.”4
모두의 내면에 깃들어있는 밝은 덕[명덕(明德)]을 밝히는 데서 시작하여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濟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 이어지는 대인군자의 길을 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보편수양론이 《대학》의 핵심 취지이기는 하지만, 평천하가 그러한 수양의 목표라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때 평천하는 긴 춘추전국이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준 불안과 공포의 치유책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학》은 이러한 평천하의 가능성인 밝은 마음[명덕]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기에 불멸의 고전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더하여, 《대학》은 평천하를 실제 사회 속에서의 인간관계와 관련하여서도 설명하여준다. 다름 아니라 천하가 하나의 가족이라는 식의 고대적 사고와 관련하여 평천하를 설명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학》은 《시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즐거우신 군자여, 백성의 부모이다.”하였으니,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며, 백성들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함, 이를 일러 백성들의 부모라 하는 것이다.”5
주희는 《대학장구》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백성의 마음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는다면, 이는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는 것이어서 백성들이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할 것이다.”6
이와 같은 주희의 설명은 천하를 한 집안으로 보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부모가 있고 부모의 역할이 있다는 것은 집안의 필수 요소인 동시에 제약점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주희의 설명은 특정한 형태의 가족이라는 조건에 의하여 규정지어지고 제약되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주희 당대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춘추전국시대에는 가족에 여러 형태가 있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조건을 고려하면서 살펴보면, 《대학장구》에 보이는 주희의 설명에 따른 평천하뿐만 아니라 《대학》 원문에서의 평천하도 천하를 한 집안으로 보는 상태를 지향하였다고 볼 수 있고, 이와 같은 지향은 특정한 하나의 가족 형태를 모든 ‘나라’들에 적용되는 기준으로 받아들일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특정 가족 형태는 가부장제(家父長制)에 다름 아니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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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는 “가장인 남성이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고 가족구성원을 통솔하는 가족형태”7 또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가장의 지배를 뒷받침해 주는 사회체계를 일컫는 제도”8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렇듯 가족형태인 동시에 사회체계이기도 한 가부장제는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존속되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지역적 문화적 조건의 차이에 세부적 특성을 달리하지만 핵심적인 속성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다양한 가부장제가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지만, 농업사회를 조건으로 하며 오륜(五倫)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인륜체계를 갖춘 고대 중국의 가부장제는,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농업사회를 이루고 정착하려는 집단들에게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제도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어떤 집단이 강한 힘을 가지고 중국을 정복하고 왕조를 세웠음에도, 주된 산업을 농업으로 바꾸고 정착하면서 문화적 인륜적으로 중국에 포섭되다가, 점차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을 잃어가면서 중국적 가부장제에 순치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이런 경우를 가지고, 《대학》 원문에서의 평천하의 실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기후와 풍토 등의 변화가 중국이 먼저 이룩한 농업사회를 중국을 둘러싼 여러 집단들도 받아들이게 하였던 듯하다. 이런 추세는 많은 집단들이 중국적 가부장제를 받아들이게 하였고, 그들의 인식 속에서 가부장제와 그것에 수반된 문화를 ‘표준적’인 것으로 여기게 한 듯하다. 그 문화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그 문화를 기준으로 세계의 다양한 변화상을 평가하고 문화의 우·열을 평가하는 문화중심 세계관은 이런 추세가 극단화된 결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화이론이 이런 세계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조선후기의 화이론; 농업기반의 가부장제에 수반된 문화를 기준으로 하는 문화우열론
조선에서,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더더욱, 화이론은 중화를 받들고 이적을 물리친다는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 주나라를 높인다는 존주론(尊周論)과 통하는 말이 되면서, 조선의 세계관과 대외정책에 골간이 되었다. 이는 조선이 유교적 도의문화의 핵심을 보존하고 그것을 현실화시켰다는 자부심으로 전개되어 소중화론(小中華論) 혹은 조선중화론(朝鮮中華論)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기도 하였다. 국권상실 직전까지 몰린 시기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 또한 앞서 말한 자부심이 수세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은 중국에서의 화이론에 대한 배우성의 다음과 같은 설명과 비교하여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화이론은 한족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족의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관용과 개방의 논리, 보편주의의 논리가 되지만, 오랑캐 왕조가 한족 왕조를 위태롭게 하면 매우 배타성 강한 논리로 돌변한다. 중화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오랑캐는 중화의 우월성을 꾸며주는 장식품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었다.”9
조선에서 유교적 교양인들이 화이론은 내재화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조선은 성리학에 내재한 화이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중화 세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기 자리를 정했다. 바로 ‘소중화(小中華) 의식’이다. 주자의 원전을 들여와 공부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가 중화와 얼마나 가까운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중국 대륙의 주인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자, 조선을 중화문화의 정통을 계승한 유일한 나라로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오랑캐에게 복수하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주나라의 문명을 높이는 쪽에 집중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지켜야 할 주나라의 문명은 결국 조선 자신이 계승해온 중화문명이다. 대보단(大報壇)은 이런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10
주자학을 들여올 때 주희와 공자 제자들의 초상화를 들여와서 마치 그들의 무릎 아래에서 수양과 강학을 시행하는 듯한 상황을 재현하려 한 것은 스승을 바로 곁에서 따라 배우는 주자학의 학문방법론의 속성 상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와 같은 방법론을 철저히 수행하는 것은 특정 문화의 절대화와 그 문화를 철저히 내면화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의 내용을 채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을 사대하면서도 청이 멸망시킨 명의 마지막 황제를 기리기위한 신성공간인 대보단을 왕궁 안에 설치하여 유지한 것인 대보단은 악조건 속에서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적으로 다짐으로써 유교적 도의문화를 더욱더 강고하게 다진 처사였다고 하겠다. 이렇듯,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화이론은 하나의 선진문화를 추종하는 것을 넘어서,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문화를 자기화하여 적정한 사회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바탕으로 삼는 도구로써의 성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자기화하고 더욱 정밀화한 도의문화를 만사를 평가하는 데 적용하려는 경향이 생겨날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었을 듯하다.
조선후기 화이론, 21세기 한국인의 문화관의 일부로 남다
가부장제 자체나 주자학적 도의문화가 처음부터 문화의 우·열을 가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지배적인 체제와 문화가 되어 광범위하게 힘을 발휘할 때뿐만 아니라, 그것이 존립을 외부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한 체제의 핵심이 되었을 때에도, 문화들의 우·열을 가르는 사고방식을 생성시키고 그 기준이 되는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주목하고 유의하여야 할 바가 되었다. 지금 한국문화는 지구촌 곳곳에서 상당한 수준으로 환영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문화생산자들이 의도적으로 한국문화의 우월성을 드러낸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 한국문화가 세계문화 속에서 가지는 자리에 관한 생각을 이야기할 때도 한국인들은 우월성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문화를 침략과 억압의 힘의 대척점에 놓는 사고 관습은 한국인들이 인용하기 좋아하는 글인 김구의 「나의 소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11.
하지만, 상당기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문화 말살과 그에 이어지는 미국문화의 중심성을 맹신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었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 더하여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면서 문화의 우·열을 당연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유포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현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선후기를 지배하였던 소중화론 혹은 조선중화론은 그러한 분위기를 강화시킬 수 있는 잠재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화이론인 소중화론 혹은 조선중화론이 자기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는 것을 넘어 문화의 우·열을 정하고 다른 문화를 무시하고나 이해하지 않으려고 드는 분위기를 만든다면, 그런 힘은 화이론에 내재한 가부장제에서 나온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이제 농업사회적인 사회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고대 중국을 둘러싼 여러 집단들이 농업사회가 되면서 농업사회와 연동되어있는 중국적 가부장제를 받아들이고, 중국은 힘의 열세에 있을 때조차 중국적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인륜체계를 바탕으로 화이론을 내세워 외부로부터의 다양하고 강력한 군사적 위협들을 제어하던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누군가 지금도 중국적 가부장제가 표준적인 것인 듯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직 농업사회적 사고에 갇혀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가 변화의 전반적 가속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에 스스로 걸림돌이 되는 것일 수 있을 듯하다. 조선 후기 화이론 특히 그 내부에 자리한 가부장제는 21세기 한국인들이 문화를 논할 때 작용하는 요소의 하나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는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문화들을 향유하고 연구할 때, 이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성찰하는 것이 한국인들에게 과제로 주어져 있다고 할 것이다.
《위키백과》 ‘중화사상’ ↩
여기에서 ‘Sino’가 파생된 근원인 ‘Sina’는 ‘Chin’, ‘China’와 마찬가지로 시황제가 세운 나라의 이름인 진(秦)이 로마에 알려져 알파벳으로 표음된 것을 기원으로 한 이름들이다. ↩
《大學》 傳10章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
朱熹[撰], 《大學章句》 傳10章 “所操者約, 而, 所及者廣. 此, 平天下之要道也.” ↩
《大學》 傳10章 “詩云: “樂只君子, 民之父母.”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此之謂民之父母.” ↩
朱熹[撰], 《大學章句》 傳10章 “…… 以民心爲己心, 則是愛民如子, 而民愛之如父母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가부장제’ [집필: 이종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가부장제’ [집필: 이종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이론’ [집필: 배우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이론’ [집필: 배우성] ↩
김구, 「나의 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