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두 번째 여행지는 ‘민주주의’입니다. 지난 계엄과 탄핵, 극우와 여러 폭력들, 전례 없는 일들을 겪으며 과연 민주주의를 고쳐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 분들이 많으실 거라 짐작합니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도 이제 대의제 민주주의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과연 누구인지 묻습니다. 民(민)인가요? 아니면 몇몇 소수인가요? 따라서 이번 글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고, 민주주의의 원형이라 불리는 과거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앞으로 가야 할 오래된 미래를 발견해보려 합니다.
이런 글들이 대체로 딱딱해서 잘 안 읽히기 때문에,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의 대화 방식으로 작성했으니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회복의 모색
[등장인물: 시민대학교 국민주권학과 김민주 교수, 동 학과 박주의 학생(이하 김교수, 박제자)]
•김교수: 자네, 계엄과 탄핵시기를 겪으며 6개월 동안 어땠어? 괜찮은가?
•박제자: 교수님 말도 마세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배탈도 나고 불면증도 생겼어요. 그나저나 이번 사태를 겪으며 정치, 헌법,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 보면서, 정치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김교수: 아니, 주변에서 뭐라길래?
•박제자: 제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10가지 쯤 되는데요, 이런 내용들이에요.
“정치 엘리트들, 어차피 누굴 뽑아도 결국 다 똑같아. 양당제 지긋지긋해”, “정당들이 일은 안 하고 맨날 싸우고 정쟁만 일삼지”, “투표할 때만 민주주의지 뽑히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불공평한 선거제도로 거대정당만 뽑히지 서민 대변하는 소수정당은 늘 당선이 안 돼”, “돈 없으면 정치도 못해”, “기후위기 같은 문제는 장기적 정책을 세워야 하는데, 무슨 정권만 바뀌면 다 뒤집어”, “공약 약속하면 뭐해, 지키는 꼴을 못 봤어”, “다수결이면 다야, 소수의견은 왜 무시해”, “선출도 안 된 엘리트 관료들이 뭔데 지들 맘대로 해”, “국회, 정치인 다 썩어빠졌어. 정치? 이제 신경 끌래”.
여기서 핵심은 “깊은 좌절감은 느낀다.”, “우리가 뽑은 대표들이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라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궁금한 게 생겼어요. 정치라는 게 결국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느냐의 문제잖아요. 그래서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요. 정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교수: 자네가 들은 말에 정치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생각들이 모두 들어있군. 그래도 이번 경험이 건설적인 고민으로 이어져서 천만 다행이구만. 사실 많은 전문가들도 이제 대의제민주주의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평가하고 있어. 고쳐 쓸 수 없다는 거지. 중병이 든 몸에 수혈을 한다고 환자가 치료될 수는 없듯이 말이야.
하나하나 풀려면 참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의외로 해답은 간단할 수 있어. 바로 본질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거든. 실제로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의 어원인 그리스어 demokratia는, demos(인민, 민중)와 kratia(통치, 권력)가 결합된 말로, ‘시민(인민)에 의한 통치’를 뜻해.
그리고 이미 우리 헌법 1조 2항(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주권자 국민에게 그 주권이 실질적으로 주어지게 하는 거야. 그냥 상투적이고 옳은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이건 민주주의의 원조로 알려진 그리스 아테네 정치를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것이기도 한데, 그게 바로 ‘시민의회’라는 방식이야.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라고?
•박제자: 아테네 민주주의는 조금 들어봤지만, 시민의회는 처음 들어봤어요. 그게 대체 뭔가요?

사진출처 : pixahive
•김교수: 우선, 아테네 민주주의는 민회, 평의회, 시민법정, 행정관의 네 가지 주요 기관으로 운영이 되었어. 민회는 1년에 6천여 명의 시민들이 40회 이상 모여 의제들을 심의했고, 평의회는 1년 임기 5백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민회에서 논의할 안을 정리하는 일종의 운영위원회 같은 역할을 했어. 시민법정은 오늘날 법원과 헌법재판소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고, 행정관은 민회와 법정에서 내려진 결정을 시행하는 행정부 역할을 맡았어. 이중 특정한 역할(군사, 재정 등)을 하는 행정관들만 선거로 뽑고, 나머지는 모두 추첨으로 뽑았던 거지. 놀랍지?
그리고 시민의회란, 무작위 추첨된 일반 시민들이 공공 정책을 숙의하고 결정하는 기구야. 이는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아닌, 사회를 대표하는 다양한 시민들이 공론장을 통해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식이지. 시민의회는 일정 기간 동안 운영되며(약 1년 내외), 참여자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충분한 정보를 습득하고, 토론한 후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게 돼. 한 마디로(하긴 어렵지만), ‘추첨 숙의 참여민주주의’라 할 수 있어. 또는 현재의 ‘선거 대의제’와 비교하여 ‘추첨 대의제’라고 할 수도 있고.
•박제자: 오 이런 제도가 다 있네요! 뭔가 좋은 건 다 모아놓은 거 같은데, 저는 솔직히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추첨으로 뽑는다는 게 잘 납득이 안가요.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는 말도 있듯이, 이런 건 선거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교수: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지. 그런데 선거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란 건 비교적 최근에 갖게 된 생각이야. 충격받지 말고 잘 들어. “우리 인간들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시도한 지는 거의 3,000년이 되어가는 반면, 선거라는 단 한 가지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한 건 고작 2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어.1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사상가, 정치가들은 대체로 ‘선거는 귀족적이고, 추첨은 민주적이다’라고 여겼었어. 몇 가지 사례를 보여줄게.2
“추첨으로 공직을 임명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과두정치였다”(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28~348, 〈정치학〉 4권, 1294a).
“통치권이 한 사람에게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군주제라고 부른다. 선택된 특정한 사람들에게 통치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귀족정이라 부른다. 통치권이 민중의 손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키케로;기원전 104~43, 〈국가론〉 1권, 41권, 42권).
“~대표자를 추첨으로 뽑는 것은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대표자를 선거로 뽑는 것은 귀족정의 방식이다”(몽테스키외;1689~1755, 〈법의 정신〉 2권, 2장)
“추첨에 의한 선발방식은 본성이 민주적이다”(루소;1712~1778, 〈사회계약론〉)
이 외에도 홉스, 시에예스, 버크, 매디슨 등의 사상가, 정치가들도 유사한 이야기를 했어.
또 한 가지, 어원을 통해서도 이러한 개념을 엿볼 수 있어. 선거(election)와 엘리트(elite)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뽑다’, ‘가려내다’ 등의 뜻을 가진 에리고(Eligo)와 엘리게레(Eligere)인데, 두 단어의 어원이 같아. 즉 선거는 필연적으로 엘리트를 뽑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지.
대체 ‘민주주의’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박제자: 기원전 5세기부터 19세기까지 2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런 생각이 일반적이었다니 잘 믿겨지지가 않아요.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민주주의의 의미가 선거를 통한 대의제로 바뀌게 된 것인가요?
•김교수: 좋은 질문이야. 복잡한 과정들이 있었지만,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라는 신화는, 중산층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공인받고, 사회를 경영하는 것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온거야. 즉 민중이 교육을 받지 못했던 시절에 안정된 중간계급 정부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공하기 위했던 것이지. 특히 1800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기점으로 혁명가들, 신흥 중산계층, 지식인과 학자들에 의해 선거제가 꾸준히 전파되었고, 마침내 1920년경에 이르러 사회 일반에 수용되기에 이르렀어.3
프랑스 정치학자 베르나르 마냉은 자신의 책 『대의 통치의 원칙』에서 “현대의 민주국가들이란 민주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일부 인사들이 제안하고 정립한 통치 형태에서 비롯되었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해.4 실제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에 열렬히 반대했고, 자신들이 ‘민주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어. 이런 믿기지 않은 말들을 했지. “민주주의는 언제나 소요와 논쟁의 도가니였다.”(매디슨, 1787). “민중이 스스로 숙의하고 결정했던 고대 민주주의는 좋은 정부의 특징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해밀턴, 1787). “민주주의는 낭비적이고 기진맥진하게 만들며 끝내 자멸한다.”(존 애덤스, 1814). 왜냐하면 이들은 ‘소수에 의한 통치’에 기반한 공화정을 원했거든.5
마냉은 선거가 도입된 건 민주주의로 인한 소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면서, “대의 민주주의 통치는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들이 그들을 뽑아준 유권자들과 사회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고귀한 시민들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세워졌다”고 했어.6 알던 내용과 달라서 자네 머리가 좀 어질어질 하겠구만.
물론 여성과 흑인들이 참정권을 가지게 된 건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이미 민주주의의 개념이 왜곡된 이후였던 것이지. 결론적으로 선거대의제가 민주주의라는 생각은, 고상하게 말해서 특정한 이념적 가정과 권력 역학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어.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박제자: 그런 과정이 있었군요. ‘선거=민주주의’라는 생각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게 너무 놀랍고 충격적이에요. 그래도 여전히 의문인 건, 선거도 아니고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김교수: 그럼 내가 역으로 질문 하나 해볼게. 현재 22대 국회의원들의 구성은 대표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박제자: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김교수: 현 22대 국회 구성을 보면, 전체 의원 중 남성비율이 80%(여성 20%), 연령대는 50~60대가 약 70%로 압도적으로 많고(50대 40%, 60대 29.7%), 학력은 소위 ‘SKY’ 출신이 43%이며(서울대 25%), 평균 재산 33억 3000만 원으로 일반 시민의 7.6배로 나타났어. 즉 선거로 뽑힌 의원들은 ‘보통의’ 시민들을 ‘대표’할 수 없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인 거지.7
이에 반해 시민의회는 전체 인구를 여러 계층으로 나누고 각 계층에서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하는 ‘층위 무작위추첨’ 방식으로, 성별, 연령, 지역, 소득 등 인구통계학적 대표성 확보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 시민들을 고루 대표할 수가 있어.
•박제자: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왜 나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법은 안 만들어질까 라는 의문이 늘 들었는데,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 구성이 소위 일반인들이 아니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네요.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의원님이 계신데요, 꽤 괜찮으신 분인데 자신이 속한 정당에서 정한 당론이 있다 보니, 그 분 평소 소신대로 법안을 내지 못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현재의 정당구조도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가로막는 것 같아요.
•김교수: 맞아. 그게 바로 현 정치 구조의 대표적인 한계야.
추첨이라는 방식이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잘 부합할까?
•박제자: 그런데 시민의회를 구성하는 추첨이라는 방식이 좋은 것 같긴 한데, 그게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잘 부합하나요?
•김교수: 이것도 아주 좋은 질문이야. 민주주의의 고유한 정의는 공직을 포함한 사회적 재화들이 시민들에게 동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인데8, 현실은 제도적으로 기회의 평등은 있을지 모르나, 재력가나 유명인처럼 정당, 돈, 인맥 등이 없으면 공직 출마가 불가능한 상황이야. 따라서 기회의 평등을 넘어 실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추첨방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지. 또한 시민의회는 민주주의의 7가지 핵심가치인 자유, 평등, 합리성, 대표성, 공공선, 통합, 시민덕성에도 잘 부합해.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기본원칙’인 ‘자유’가 취해야 할 두 가지 형태 가운데 하나로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는데9, 추첨방식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거야.
•박제자: 그렇군요. 제 친구 중 한 명이 정치를 한다고 작은 정당에 들어가서 출마를 하려고 준비를 했었는데, 아무리 돈을 최소로 써도 국회의원 기탁금 1,500만원 포함, 선거비용을 최소로 잡아도 총 3천만원 이상 들어가서 결국은 포기했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빽이나 배경이 없는 청년들은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공직 출마 자체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피선거권이 있어도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인거죠.
•김교수: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군. 맞아 그게 현실이지.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을까? 정치는 전문가가 해야…
•박제자: 교수님 설명 듣고 보니 시민의회에 대해 꽤 관심이 생기네요. 그런데 만약 제가 추첨으로 뽑혀서 시민의회 구성원이 된다고 생각해보니 ‘과연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어요. 저 같은 보통의 시민이 어떻게 그런 중요하고 복잡한 정책들을 결정할 수 있을까요?
•김교수: 충분히 이해가 돼. 하지만 시민의회는 여론조사와 달리 바로 뭔가를 결정하는 방식이 아니야. 일정 기간 전문가를 통해 다양한 견해들을 공부하고, 여러 번의 토론을 거치며, 공청회나 sns를 통해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정리하는 긴 숙의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기초학력을 가진 시민이면 누구나 충분히 역할을 해낼 수 있어. 충분한 정보와 논의시간이 주어지면 일반인도 전문가 수준의 정책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여러 연구들도 있고.
사실 현재 국회의원들도 본인이 아는 특정 분야 외에는 일반인과 지식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아. 특히 법안의 기술적인 부분들은 현재 국회의원들도 국회 보좌진과 입법조사처, 법제실의 도움을 받아서 하고 있는데, 시민의회도 마찬가지로 그런 점은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으면 돼.
사실 자네의 고민이 시민의회를 반대하는 아주 강력한 반론이야. 정치는 유능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 하지만 민주주의의 규범적 측면에서 이는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이야. 만인은 그 능력과 천성에 있어 같다는 전제에서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민주주의 원리가 도출이 되거든. 즉 ‘강한 평등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토대이기에 보통 사람의 참여를 부정하는 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지.10 우리 스스로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효과적이고 검증된 시민의회의 실제 사례
•박제자: 그럼 시민의회가 도입되면 어떤 점이 좋을까요?
•김교수: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현재 대의제는 정당의 이해관계 때문에 공익보다 당리당략이, 유권자의 의사보다 기업의 이익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고, 선거 주기가 짧기 때문에 기후위기 대응 같은 장기적인 정책보다는 단기적 인기 영합 정책이 선호되고 있어. 무엇보다 정치과정에서 시민들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루소는 선거제도에 대해서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어.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정당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고, 숙의 과정을 통해 공익을 고려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 또한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정책 논의가 가능하지. 이렇듯 시민의회는 다양한 시민들이 정책을 직접 논의하고, 결정할 기회를 제공하여, 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어.
•박제자: 그럼 현대 사회에서 실제로 시민의회의 사례, 특히 효과를 거둔 사례들이 있나요?
•김교수: 물론이지. 대표적인 국가가 아일랜드(2012~2018)인데, 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시민의회를 통해 동성혼 인정과 낙태 허용 관련 국민투표가 이루어졌고,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어 통과되었어. 개헌을 통해 법제화를 한거지. 프랑스(2019~2020)의 경우는 노란조끼 시위에 대응하여 대통령에 의해 기후시민의회가 구성되었어. 150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기후시민의회는 9개월 동안의 숙의를 통해 정리한 460쪽짜리 보고서에서 149개의 기후변화 대응책을 제안하는데, 일부 정책들이 채택되기도 했어. 특히 시민의회가 제안한 헌법 1조에 기후변화 대응을 국가 의무로 명시하는 조항을 추가하는 방안을 하원에서 가결하기도 했지. 영국에서는 의회에 의해서 기후시민의회가 구성되었고, 탄소중립 실현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어. 556쪽짜리 보고서에는 50여 개의 제안이 담겼어. 이런 흐름이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독일, 스페인 등으로 이어지고 있고, 특히 스코틀랜드는 100여 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어린이 기후의회’를 만들기도 했어.11 국가 단위뿐 아니라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온타리오주, 미국의 캘리포니아, 벨기에의 브뤼셀 등 도시 차원에서도 이어지고 있어.

무엇보다 확실한 사례는 ‘배심제(Jury System)’라고 할 수 있어. 배심제는 일반 시민들이 무작위로 선발되어 법정에서 유·무죄를 판단하는 제도로, 그 핵심 원리는 시민의 대표성을 보장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거야. 배심제는 수백 년 동안 시민이 직접 판단하는 방식이 효과적임을 증명한 제도로, 이 원리는 현대 시민의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고, 특히 숙의민주주의의 실효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어. 특히 (완전하진 않지만) 배심제와 유사한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제도’에 대해 분석한 업무성과 자료를 보면, 배심원의 평결과 재판부의 판결 결과가 90.6%나 일치했다고 나와. 이는 일반 시민의 판단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지.12
조작될 위험, 특정 세력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박제자: 배심제 얘기를 듣고 보니 추첨시민의회가 그렇게 낯선 제도만은 아니었네요.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시민의회에 대해 점점 확신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교수님, 저 또 한 가지 고민이 있어요. 실은 이번 계엄과 탄핵시기를 지나면서 한국사회에 극우 세력이 이렇게 많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추첨이 조작될 위험이나, 또는 극우세력 등 추첨으로 뽑힌 특정 집단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을까요?
•김교수: 정말 좋은 지적이야. 그래서 추첨 과정은 독립적인 기관이 공개적으로 관리하여 조작 가능성을 차단해야 해. 또한 시민의회를 운영하는 기관은 정부나 정당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전문가와 공익 단체들로 구성된 기구가 관리해야 하지. 독립 기구는 참가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외부 로비나 정치적 개입을 감시하고 차단할 수 있어야 하고. 실제 사례가 있는데, 캐나다의 온타리오 시민의회 구성원 선발은 독립적인 선거기구인 온타리오 선거기구(Elections Ontario)에 의해 이루어 졌어.13 이런 사례들을 잘 참고할 필요가 있어. 특히 특정 집단이 조직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를 감지하고 방지할 시스템(예: 배경 조사, 공정성 검토 위원회)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고.
시민의회, 현대 사회에서도 가능할까?
•박제자: 설명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요. 그런데 시민의회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수록 자꾸 의문이 많아지는데요, 고대 아테네와 달리 오늘날처럼 인구가 많은 현대사회에서 시민의회 같은 추첨식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할까요?
•김교수: 물론이지. 국민 전체가 영향을 받는 큰 사안에 대해서는 국가 단위에서 할 수도 있지만, 실제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책에 대해서는 시도광역, 읍면동 단위에서도 할 수 있어. 그렇게 작은 단위로 쪼개면 인구와 상관없이 실행할 수도 있어.
또한 기술의 발전과 제도적 혁신을 통해 인구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참여 플랫폼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시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거든. 예를 들어, 스페인의 온라인 플랫폼 ‘디사이드 마드리드’는 토론과 제안, 참여예산 정보, 투표 기능을 제공하고 있고, 16세 이상의 시민이라면 간단한 가입 절차를 거쳐 누구나 마드리드 시의 정책 및 입법을 제안할 수 있어. 토론(debates) 기능으로 시민이 자유롭게 주제를 제안하고 함께 토론을 진행하게 되며, 제안(proposals) 기능으로 마드리드 유권자의 1%의 동의(찬성)를 얻은 제안을 국민투표(찬/반)에 부치고, 여기에서 과반의 동의를 얻으면 실제 정책이나 입법으로 진행돼. 실제로 마드리드를 100% 지속가능한 도시로 만들자는 제안과 하나의 승차권으로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하자는 제안이 투표까지 통과해 정책으로 결정되기도 했어.14
•박제자: 오! 생각해보니 한국은 세계적인 IT 강국인데, 어쩌면 이런 점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더 잘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문득 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요, 추첨으로 선택된 이들은 아무 노력도 없이 선택되었기 때문에 보통의 공직자에 비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안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교수: 아 그렇지 않아. 실제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선거개혁시민의회의 경우, 11개월의 기간 동안 161명의 구성원 중 오직 1명만이 중도 하차했고, 출석률은 거의 100%에 가까웠어. 시민들의 확고한 책임감을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사례이지. 다른 사례들도 비슷해.
•박제자: 우리 시민들 대단하네요. 아참 교수님,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도 ‘공론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회 비슷한 것들이 있었던 거 같아요. 예전에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라는 것도 있었고, 지자체마다 ‘주민자치위원회’도 있고요. 이런 것들이 좀 더 활성화 되면 되지 않을까요?
•김교수: 물론이야. 하지만 자네가 언급한 곳들은 제대로 된 시민의회라 볼 수 없어. 공론화 기간이 너무 짧아 제대로 된 숙의를 할 수 없거나, 실질적인 권한을 주지 않아 정부가 거부해버리면 묻혀버리는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야. 아무리 시민의 주민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말해봤자, 실질적인 권한을 주지 않으면 말뿐인 걸로 끝나고 말지.
그래도 선거제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박제자: 그런데 교수님, 저는 여전히 선거도 중요한 거 같은데, 선거제도 없이 추첨으로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요?
•김교수: 자네는 어쩜 그렇게 핵심 쟁점들만 잘 짚어내는지… 역시 내 제자야! 실은 선거와 추첨, 두 가지 제도 모두 필요해. 레이브라우크는 ‘이중대표체제’를 제안하는데, 이건 선거와 추첨을 결합해서 대표성을 강화시켜주는 모델이야. 두 제도는 각각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직업 정치인들의 역량과 선거에서 당선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민들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야.
이중대표체제는 선거대의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여러 전통들의 장점들을 취하기에 이상적인 대안으로 볼 수 있어. ‘포퓰리스트 전통’이 지닌 가장 좋은 점(현실 사회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는 대표제에 대한 염원)을 활용하면서도, 일사분란하게 단일화된 민중이라는 위험한 환상은 배제해. 그리고 ‘관료주의 전통’이 지닌 가장 좋은 점, 즉 선거로 당선되지 않은 전문가들이 지닌 기술적 역량을 배려하는 측면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그렇다고 이들에게 최종 결정권을 주는 것은 아니야). 또한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지닌 가장 좋은 점(열린 토론을 중시하는 수평적 문화)은 살리되 이 전통의 약점인 반의회주의적 요소는 배제해. 마지막으로 ‘고전적인 대의 민주주의’가 지닌 가장 좋은 점(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위임의 중요성)은 유지하면서 거기에 늘 붙어 다니는 맹목적인 선거 숭배와는 거리를 두지. 이런 요소들이 서로 결합하면 현 민주주의가 놓치고 있는 ‘정당성’과 ‘효율성’이 동시에 증대될 거야.15
새로운 정부의 시작과 우리의 자세
•박제자: 그렇군요! 뭔가 과거와 미래의 조합 같은 느낌이랄까요. 가슴이 두근두근해요. 아참 교수님, 이제 새로운 대통령도 뽑히고 이번 정부는 ‘국민주권정부’라고 하면서 국민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조금 기대도 되는데, 교수님은 어떻게 보세요?
•김교수: 그건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을 보면 되는데, 10대 공약 중 민주주의 관련 내용은 안타깝게도 ‘직접민주주의 강화 등을 통한 책임정치 구현’,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도입’밖에 없어. ‘K-민주주의 위상 회복으로 민주주의 강국을 만들겠다.’라는 두 번째 공약 제목과는 맞지 않게 초라하지. 추상적이고 소극적인 공약 내용이야.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시절 “국민의 도구가 되겠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아도 결국 국민이 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이게 레토릭(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시민에게 실질적 권력을 주어야 한다고 봐. 나 역시 새로운 대통령께서 잘해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하지만 아마 그냥 되지는 않을 거야. 따라서 이번에 우리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외쳤던 것처럼 실질적 주권을 되찾기 위해 계속 외쳐야 할 것 같아.
루소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 지금의 선거제도는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이제 그런 민주주의는 수명을 다했다고 봐. 시민들이 상시적인 주권을 가져야 해.
내가 정말 좋아하는 문장 하나 알려줄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했던 말이야. “다수는 비록 한 명 한 명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였을 때에는 전체로서 가장 훌륭한 소수의 사람들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 그들은 다수이고, 각자로는 나름대로 탁월함과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평범한 우리 시민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 “우리 스스로를 믿읍시다. 또 동료 시민들을 믿읍시다. 우리가 집단지성을 발휘한다면 훨씬 더 나은 결정을 하고 훨씬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말이야.
•박제자: 오랜만에 교수님 말씀을 듣고 나니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p.66. ↩
이보 모슬리, 『민중의 이름으로』, 김정현 옮김, 녹색평론사, p.15-18. ↩
이보 모슬리, 앞의 책, p.35, 54, 244-245. ↩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앞의 책, p.94. ↩
이보 모슬리, 앞의 책, p.23-25. ↩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앞의 책, p.95. ↩
박제민, “’사회 축소판’ 아닌 22대 국회… 시민 대표할 수 있나”, 오마이뉴스, 2024년 7월 5일 ↩
이지문·박현지, 『추첨시민의회』, 삶창, 2017, p.37. ↩
이지문·박현지, 앞의 책, p.38. ↩
이지문·박현지, 앞의 책, p.193-194. ↩
서혜빈, ““헌법 1조, 국가는 기후변화와 맞서 싸운다” 바꿔가는 시민들“, 한겨레, 2021년 4월 5일. ↩
이지문, 『추첨민주주의 강의』, 삶창, 2015, p.28-29. ↩
Citizens’ Assembly on Electoral Reform (Ontario) #Reaction ↩
조희정, 『민주주의는 기술을 선택한다』, 더가능연구소, 2022, p.197-198. ↩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앞의 책, p.20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