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①

한부모가족인 내게 아버지는 불안한 존재였다. 아마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 장본인쯤 되겠다. 고등학생인 내가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광진구 구의동의 방 두 칸짜리 반지하에 살 때, 만취 상태로 겨우 귀가한 아버지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좁은 부엌에 뻗곤 했다. 불안해하며 아버지를 기다리던 나는 혹여 그가 죽진 않았나 코에 손을 갖다 대보았다.

Ⅰ. 자격의 문제

지금의 나는 ‘가족돌봄청년’이라는 자격을 상실했으므로 어쩌면 이 글을 쓸 자격 역시 상실했을지 모른다. 엄밀하게 보면 나는 법에서 정한 ‘청년’이 아니게 되었고, 그 전에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된 아버지를 돌봤던 시간이나 역할 또한 비교적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돌봄 수행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게 ‘아버지 돌봄’은 현실이기보다 돌아보고 기억하고 기록해 내야 하는 과거의 경험에 더 가까워졌다.

Ⅱ. 예고된 가족돌봄청년, 한부모가족

며칠 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전화했단다. 무려 22년 만에. 어머니는 22년 전, 그러니까 2000년 여름 무렵 집을 나갔다. 내가 16살, 7살 어린 동생은 9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와 나와 동생, 세 명의 남자를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 그 후로 22년이 흐른 지금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단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보다 없던 시간이 더 길었다. 낯선 존재다. 내게도, 동생에게도, 어쩌면 병원에 있는 아버지에게도. 종종 그 낯선 존재의 이름이 현실에 소환될 때가 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혼인 상태다. 어머니의 가출 이후 실종신고도 하고 실종선고심판청구도 했으나 법적 이혼 상태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에서 동생과 나는 한부모가족이 아니었다. 가족관계증명서에 엄연히 적혀있는 그의 이름은 덕분에 ‘한부모가족’이라는 자격 역시 얻지 못하게 했다.

나의 아버지 돌봄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truthseeker08
나의 아버지 돌봄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truthseeker08

법적으론 아니라지만 실제 한부모가족인 내게 아버지는 불안한 존재였다. 아마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 장본인쯤 되겠다. 고등학생인 내가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광진구 구의동의 방 두 칸짜리 반지하에 살 때, 만취 상태로 겨우 귀가한 아버지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좁은 부엌에서 뻗곤 했다. 불안해하며 아버지를 기다리던 나는 혹여 그가 죽진 않았나 코에 손을 갖다 대보았다. 그의 숨을 느껴보려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죽음을, 죽음 이후의 내 삶을 가끔 상상했던 것 같다. 그가 죽으면 나와 내 동생은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 그의 장례식은 또 어떻게 치를 것인지 따위의 생각들. 어머니의 가출 후 이미 수년 동안 아버지가 밤늦게까지 귀가하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을 때면 그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부터 상상하곤 했다. 그의 죽음을, 조금은 바랐던 것도 같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초조하게 기다릴 일은 없을 것이므로.

나의 ‘아버지 돌봄’은 그때부터 예고된 것일지 모른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때부터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오래 전, 아버지가 형틀목수로 일을 할 때부터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의 신변 변화와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 산업재해가 번번이 발생할 때로부터이거나. 예상된 돌봄 상황은 그러나 실제론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2016년,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5월 4일에 그토록 불안해했던, 어린 시절 철없이 조금은 바라기도 했던 아버지의 사고가, 죽음이라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의학적으로는 죽지 않았지만 그를 이루는 어떤 부분은 죽었다. 그날 이후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날, 그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사고 발생일로부터 불과 한 달 전인 4월 초에 그는 급성 장염 등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홀로 끙끙 앓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안 나는 곧장 아버지 홀로 사는 순천 시골집으로 내려가 그를 모시고 병원에 가 진료를 받게 하고 약을 타 왔다. 그는 정말 삐쩍 메말라 있었다. 거동도 힘들 만큼. 처음이었다. 그렇게 앙상한 아버지를 본 것은. 마지막이었다. 사고 전에 본 아버지의 모습은. 한 달 새 얼마나 회복되었기에 일을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앙상한 몸에서 얼마나 살과 근육이 붙었기에 일을 나간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벌겠다고 기어이. 나라도 곁에 있었으면 말렸을 텐데. 돌봤을 텐데. 6년이 지난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그는 2016년 5월 4일, 전라남도 여수시의 한 빌딩 건축현장에서 형틀목수로 일하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단다. 그리 높지도 않았다는데 머리를 크게 다쳐 뇌수술이 급하다며 수술 동의를 구하는 의사의 전화가 “아버지”란 이름으로 퇴근하는 내 휴대폰에 걸려왔다. “아버지”란 글자를 보자마자 전화를 받기도 전에 그야말로 ‘쎄한’ 느낌. 직관은 빗나가지 않았다.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위중한 아버지의 상태와 이에 따른 의사의 시급한 수술 권유에 나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한 채 뇌수술에 동의했다. 당시 일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던 나는 의사와의 통화가 끝나고 잠시 멍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단 내려가야 했다. ‘수술 전에 아버지와 대화 한 마디라도 나눠야, 아니 말 한마디라도 들어야 할 텐데…….’ 서울에서 순천에 있는 병원까지는 족히 5시간은 걸릴 테다. 동생에게 아버지 소식을 전하고, 바로 기차표를 예매하려 했으나 매진이다. 그날은 5월 4일 수요일이고 다음 날인 목요일은 어린이날로 징검다리 연휴였던 까닭이다. 겨우 표를 구해 심야버스를 탔다. 내려가는 중에 순천에 사는 동생 친구에게 연락해 수술실 들어가기 전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봐줄 수 없겠냐며 부탁했다. 통화라도 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다행히 수술 전 도착한 동생의 친구 덕에 아버지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버럭 화를 냈단다. 의식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싫었던 것인지 내려오지 말라며. 저 지랄 맞은 성격을 어찌할까. 그래도 수술실 들어가기 전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 통화 이후 당신의 지랄맞은 성격과 입에 달고 살던 욕지거리마저 그리워지게 될 줄이야. 도착했을 때 그는 의식이 없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채로 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누워 있었다. 2016년 5월 5일 어린이날, 그는 정말 어린애가 된 것만 같았다.

첫 번째 수술을 받고 얼마 못 가 다시 뇌수술을 받아야 했다. 
사진출처 : 12019  https://pixabay.com/images/id-79579/
첫 번째 수술을 받고 얼마 못 가 다시 뇌수술을 받아야 했다. 
사진출처 : 12019

외상성 경막하 출혈, 그의 최초 진단명이다. 첫 번째 뇌수술을 받고 얼마 못 가 그는 다시 머리를 열고 뇌수술을 받아야 했다. 뇌압이 높아져 출혈이 또 생기는 바람에. 그렇게 두 번의 뇌수술을 받고도 한 달 넘게 의식 없는 채로 누워 있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하루 두 번 면회를 할 때마다 동생과 나는 그저 일방적인 메시지만 전달할 뿐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텅 빈 시골집과 병원을 오가며 장기전을 대비해야 했다. 한달 여가 지나자 아버지는 자가 호흡과 의식을 조금씩 되찾았다. 적어도 일방적 전달로만 그치지 않을 정도로 나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다. 반사적 반응이 어떤 의미를 담은 불완전한 메시지가 되기까지는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다. 돌봄의 장기화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나와 동생은 놀라고 당황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슬프다가 우울했다가 기뻤다가 억울했다가 온갖 감정들을 헤집으며 ‘한부모가족’에서 ‘가족돌봄청년’이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동그랑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시인-되기’는 여전히 요원하고 문단에 등단한 적 역시 없다. 2016년, 목수로 일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상시 간병과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었고, 하던 일을 관두고 격주 주말마다 아버지를 돌보게 되었다. 이후 문화기획자, 커뮤니티 매니저 등 여러 개의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N잡러로 살다 그마저도 그만두어 백수로 지내다, 현재는 전통목조건축(한옥) 양식의 문화재를 돌보는 초보 한옥목수로 일하며, 다른 한편으론 서로 돌보는 공동체를 꿈꾸며 읽고 쓰고 말하고 있다.
* 필명 ‘동그랑’은 강화도에 딸린, 동검도에 딸린, 무인도 동그랑섬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섬 안의 섬 안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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