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빅데이터 시대, 환경위기를 다시 읽는 법

환경오염은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외부 사건이 아니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는 관찰 대상이기 전에 우리가 몸으로 얽혀 살아가는 장이다. 공기의 질은 곧 호흡의 질이고, 폭염은 단순한 기온 상승이 아니라 심장과 수면, 노동과 이동을 바꾸는 경험이며, 오염된 물은 생태계의 손상인 동시에 우리의 몸에 스며드는 조건이다. 과학이 오염의 메커니즘을 밝힌다면, 현상학은 그 오염이 우리에게 어떻게 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둘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것은 반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언어를 더 넓은 윤리와 정치의 언어 속에 다시 놓는 일이다.

숫자는 오염을 보여주지만, 우리의 세계까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 환경위기는 더 이상 자연 다큐멘터리나 뉴스 화면 속의 재난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진 출처: Chandler Cruttenden

오늘날 환경오염은 대개 숫자로 먼저 도착한다. 미세먼지 농도, 탄소배출량, 해수면 상승, 미세플라스틱 검출치, PFAS 오염 수치, 생물다양성 감소율이 그렇다. 이제 환경위기는 더 이상 자연 다큐멘터리나 뉴스 화면 속의 재난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센서와 위성,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은 오염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분류하며 예측한다. 그렇게 오늘날 환경문제는 경험되기 이전에 측정되고, 느껴지기 이전에 시각화된다. 이제 환경문제는 언론 보도에만 머물지 않고 정책, 기업 공시, 국제협약, 플랫폼 알고리즘, 위험예측 시스템 전반에서 과학적 지표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과학은 환경위기를 드러내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질문해야 할 것도 있다. 과연 환경오염은 수치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가.

위험을 읽는 관찰자로만 기능하는 인간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수치가 정밀해질수록 우리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한다고 믿지만, 정작 그 세계와의 살아 있는 관계는 더 쉽게 지워진다. 오염은 데이터로 관리 가능한 대상이 되고, 기후위기는 지표로 환산 가능한 위험이 되며, 인간은 그 위험을 읽는 관찰자로 남는다. 그러나 환경위기는 결코 바깥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사건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몸의 호흡, 피부의 감각, 노동의 리듬, 수면의 질, 불안의 강도를 바꾸는 삶의 조건 그 자체다. 과학은 이를 측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살아지는지까지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과학 자체가 아니다. 과학은 여전히 환경위기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언어 중 하나다. 문제는 과학을 넘어서는 모든 차원을 배제한 채, 측정 가능한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과학주의적 통치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자연은 분석 가능한 객체로 환원되고, 오염은 관리해야 할 변수로 축소된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수치의 정확성이지, 세계의 진실은 아니다. 데이터는 풍부해지는데 감각은 빈곤해지고, 정보는 넘치는데 책임은 희미해진다.

외부 환경이 지배하는 몸

인간의 몸은 세계와 맞닿아 있는 접면이다. 사진 출처: Andrea Seiler

바로 이 지점에서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을 세계 바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순수한 의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은 먼저 몸-주체다. 인간은 생각하기 전에 보고, 만지고, 숨 쉬고, 반응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계를 관념적으로 소유하기 전에 이미 몸으로 세계 속에 얽혀 있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지각의 우위란, 세계가 먼저 추상적 개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운동, 관계와 상황 속에서 주어진다는 뜻이다. 환경위기를 이해하는 데 이 통찰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겪는 폭염은 단순한 기온 상승이 아니라 몸의 리듬이 무너지는 경험이며, 오염된 공기는 통계 수치가 아니라 폐와 혈관, 피로와 두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제시된 살(flesh)의 존재론은 이 문제를 더욱 근본적으로 밀어붙인다. 메를로퐁티에게 세계와 몸은 완전히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를 스치고 관통하며 얽히는 하나의 존재론적 직물 위에 놓여 있다. 인간의 몸은 세계를 외부에서 해석하는 장치가 아니라, 세계와 맞닿아 있는 접면이다. 내가 공기를 들이마시고, 물을 마시고, 땅 위를 걷는다는 것은 이미 내 몸이 세계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때 환경오염은 더 이상 외부 자연의 훼손이 아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몸을 이루는 조건의 변형이며, 우리의 존재 양식 자체에 가해지는 침식이다.

방향적 지배나 관찰이 아닌 상호적 얽힘

메를로퐁티가 말한 가역성 역시 이 논의를 날카롭게 만든다. 오른손이 왼손을 만질 때,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은 고정된 주체와 객체로 남지 않는다. 둘은 언제든 자리를 바꿀 수 있고, 서로를 통해 서로를 드러낸다. 그는 이 관계를 통해 세계와의 접촉 역시 일방향적 지배나 관찰이 아니라 상호적인 얽힘임을 보여주었다. 환경문제를 여기에 적용하면 결론은 명확해진다. 인간은 자연을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동시에 형성되고 영향을 받는 존재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자기 존재의 조건을 훼손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현대의 기술 문명은 정반대의 환상을 강화해 왔다. 인간은 자연 밖에 서서 자연을 측정하고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다시 말해 세계를 완전히 대상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오늘의 환경 담론 역시 이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환경오염을 지나치게 자주 수치의 문제로만 말한다. 탄소배출량은 몇 퍼센트 줄었는가, 오염 농도는 기준치를 넘었는가, 데이터는 무엇을 예측하는가. 물론 이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누가 더 오래 노출되는가. 누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큰 피해를 감당하는가. 어떤 삶이 더 쉽게 오염의 비용을 떠안는가. 과학은 위험을 계량할 수 있지만, 그 위험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배분되는지에 대해서는 과학만으로 답할 수 없다.

삶의 방식과도 연관되는 환경위기, 기회일까

바로 여기서 환경위기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정치와 윤리, 존재론의 문제가 된다. PFAS와 미세플라스틱, 초미세먼지와 폭염, 기후재난과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수요 증가는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 현상들을 단지 과학현상으로만 다루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삶의 방식과 권력의 배치, 불평등의 구조,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놓치게 된다. 측정은 필요한 시작이지만, 결코 충분한 결론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과학이 아니라 탈-환원적 환경 인식이다. 과학적 데이터는 더욱 정교해져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데이터가 포착하지 못하는 감각의 차원, 관계의 차원, 체화된 고통의 차원을 다시 담론으로 불러와야 한다.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미래 세대를 위한 도덕적 당위 때문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자연과 분리된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지키려는 것은 바깥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조건이다.

결국 환경오염은 알 수 없는 바깥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들이마시는 공기, 흘러가는 계절, 먹고 마시는 물질, 그리고 서로에게 건네는 삶의 조건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인 사건이다. 숫자는 그것을 경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붙들어야 할 것은 숫자 너머의 관계다. 메를로퐁티의 말대로,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기 전에 세계에 닿아 있는 몸이다. 그렇다면 환경보호란 자연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자기보존의 실천이어야 한다.

동글이

철학과 환경커뮤니케이션, 생사학에 관심이 많다. 실제 철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공부했다. 환경적인 문제를 취재하고 기사화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외부 환경 생태와 우리 몸의 관계, 행복권, 자아와 객체 간의 관계 등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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