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의 욕망과 해방

서로 충돌하는 욕망과 그 욕망의 해소를 따라가 봅니다. 소중한 인연과 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욕망의 충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성장은 체제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도구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시대는 생명정치 시대이기도 한데 생명정치에서는 지배함과 지배당함이 한 주체 내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난다. 그리하여 내부에서는 자기계발, 웰빙, 힐링, 심리치료, 정신분석, 미디어, 문화생활 등 자기연마를 하면서 잘 살도록 하는 반면 외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자율권력은 매우 치밀한 방식으로 신체에 침투하여 인간을 상품화하고 전문인력을 양산한다. 우정, 환대, 돌봄, 정동의 흐름은 약해진다. 근대적 인간상에 부합하는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여성, 자연, 생명, 소수자를 타자화하고 외부로 내몰게 된다.

기후위기 시대의 욕망

욕망의 종류는 다양하다. 사회적으로 쉽게 수용되는 욕망이 있는가 하면 터부시되는 욕망도 있다. 그러나 욕망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친구들과 운영하는 밭 ‘푸실’에 심었던 감자. 흙은 순환의 원천이다. 흙을 만지다 보면 무해한 방식으로 욕망이 해소된다. 사진제공 : 보배
필자가 친구들과 운영하는 밭 ‘푸실’에 심었던 감자. 흙은 순환의 원천이다. 흙을 만지다 보면 무해한 방식으로 욕망이 해소된다.
사진제공 : 보배

검열된 욕망은 해방되지 못한다. 해방되지 못한 욕망은 내면에 고인다. 내가 아는 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욕망과,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았을 때 죄의식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욕망 둘 다 ‘욕망’이다. 나에게 있기를 혹은 없기를 탐하는 것이다. 두 욕망 중 어느 욕망이 더 바람직한지는 측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은 흔히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수행으로 비추어진다. 환경 분야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에 무심할 경우 비판을 받거나 죄책감을 갖기 쉽다. 예를 들어 채식을 안(못)하지만 환경 문제에는 관심 있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죄책감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의 경우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과 싼값에 달걀을 소비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다. 현재 닭을 키우고 있지 않지만 달걀은 먹고 싶고, 닭을 키울 형편이 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달걀을 잠재된 생명이 아닌 음식으로 대상화하고 있다. 달걀을 생명 이전에 음식으로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이 든다. 죄책감이 섞인, 그러면서도 합리화를 하려고 하는 모습을 동시에 발견하면 스스로가 실망스럽다.

위와 같은 마음의 문제는 행동의 동기가 ‘자율적 판단’에서 ‘부정적 감정 회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적 감정 회피란 앞서 말한 죄책감, 우울감, 무력감, 분노, 슬픔 등 ‘부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감정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감정을 방어하려는 기제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지만, 특정 행동이 매번 방어 기제로 작동한다면 그건 실천보다는 습관적 반복일 것 같다. 행동의 동기가 부정적 감정이나 피드백을 피하는데 맞춰져 있다면 부정적 감정을 직시할 마음의 힘을 기르기 어렵다. 또한 실천의 보람을 느끼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텀블러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선택하는 것과 일회용품 사용이 눈치 보이고 신경 쓰여 텀블러를 선택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둘 다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채식을 지향함으로써 탄소배출을 줄여야겠다고 하면서도 저렴한 가격에 달걀 맛을 보고 싶은 이의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 마음이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고.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는 밭 ‘푸실’에서 풀멀칭 중이다. 사진제공 : 보배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는 밭 ‘푸실’에서 풀멀칭 중이다. 사진제공 : 보배

덧붙이자면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작은 변화를 SNS에 게시하는 것, 친환경적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는 것, 당장은 조금 더 값을 주더라도 윤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 등 가시적인 실천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응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지속 가능한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긍정적인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무력감과 우울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질문하고 싶다. 한때는 나도 삶의 생태적 전환을 꿈꾸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지켜 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인위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나와 세상을 보고 싶다.

기후위기 시대의 해방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노동에 최대한 빚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삶을 꾸려가고 싶었던 적이 있다. 자급자족에 대한 열망이 정말 컸다. 노동력과 지식, 신체와 정신 모두 재화로 환원되는 자본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자연과 함께하는 전원생활에 낭만도 가지고 있던 때였다. 상상을 현실로 바꿀 방법을 찾다가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자급 자립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친구들(이하 농부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 삶의 전환은 본격화되었다.

우선 학교나 사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관계 맺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농부 친구들의 나이는 다 다르다. 나이는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언니/누나/형/오빠 등 성별과 나이에 따른 호칭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이름이 존재한다. 농부 친구들은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리고, 듣고 싶은 이름을 불러준다.

농부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있는 그대로 존재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자급 자립이 가능한 대안적 삶에 관심을 가지고 모인 것은 같았지만 친구들은 각자의 색이 뚜렷하고 독보적이었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중에 어쩌면 당연히도 다양한 의견이 엇갈렸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 공동체 상영/관람. 사진제공 : 보배
친구들과 함께 영화 공동체 상영/관람. 사진제공 : 보배

그동안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내 공통된 경험은 첫째, 리더가 있다. 둘째, 집단 내에서 공유하는 공통의 방향성이나 가치관이 있다. 셋째,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갈등을 해결하고 의견을 하나로 모으려고 애쓴다 였다. 농부 친구들 안에서는 위 경험들과는 다른 경험을 했는데 나는 그것이 ‘느슨한 연대’와 ‘환대’라고 생각한다. 리더는 없다. 집단만의 특정한 정체성이나 방향성도 없다. 그냥 관계가 자연스레 흘러가게끔 느슨하게 둔다. 오히려 그래서 뭘 하지 않아도 편안한 소속감이 든다. 다른 의견은 같은 의견으로 설득시키기보다 다른 채로 두었다. 그럴 땐 집단이 아니라 개인별로 활동하면 되었다. 순전히 내 감상일지 모르나 친구들은 자기와 다른 존재에게 마음을 열어두면서도 내면의 흐름에 충실했다.

혼자 모든 걸 잘하기보다 각자 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일을 맡아서 함께 하면 일이 척척 진행될 뿐만 아니라 더 즐겁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식사할 음식, 빗물받이 통, 샤워실, 햇빛건조기, 데크, 밭, 논 등을 함께 만들었다. 원래 나는 ‘잘’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농부 친구들과 함께라면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과정을 즐기게 되었다. 우리는 친구의 재능은 칭찬하고, 궁금한 점은 이리저리 물어보며 배우고, 낯선 부분은 같이 진행하며 배웠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님이 되었다. 가르치는 사람은 없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나의 능숙함과 미숙함을 다양하게 발견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세상을 너무 많이 생각하다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말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만큼 자신의 마음도 잘 돌보자고.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해보자. ‘나’와 세상은 연결되어 있기에.

보배

보배는 태명입니다. 대학생, 농부, 퀴어로써 세상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친구들과 @pulpusil 에서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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