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성장통 –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를 만났을 때

젊은 호모사피엔스를 대하는 우리 늙은 네안데르탈인의 자세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옛날에 봤던 한 다큐에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를 만났던 장면이 있었다. 약간 작은 키, 다부진 몸의 네안데르탈인들은 섬세하고 세련된 호모사피엔스 무리를 보고 놀란다. 호모사피엔스들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조아 질하오에 의하면 사실 네안데르탈인도 화장을 했다고 한다) 머리에 장식을 했으며 노래를 불렀다. 즉 ‘예술’이라고 하는, ‘생존과 무관한’ 행동들을 그들은 했다.

2022년 7월 7일 생명사상연구소에서 마련한 “또 다른 생명워크숍”에 참석했을 때, 나는 마치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를 만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와 다른 인류 무리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김단과 그의 친구들’로서, 해남에서 제주를 거쳐 정읍까지 왔다고 한다. 그들은 늘 그렇게 이동하며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만 하면서도 용케 굶지 않고 잘 살고 있었다. 그림 그리고, 작곡하고, 노래하고, 농사짓고, 맥주 만들고, 연주하고, 춤추고, 농담하고, 웃고, 그러면서도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무표정 또는 인상 쓰면서, 평생 일하고 공부하고, 바쁘게 사는 게 열심히 사는 줄로 알고 살아온 내가, 그 순간 네안데르탈인인 줄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우리는 간섭이 싫었고 명령이 싫었고 단언하는 말이 싫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려고’ 든다.
사진출처 : Ave Calvar
우리는 간섭이 싫었고 명령이 싫었고 단언하는 말이 싫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려고’ 든다.
사진출처 : Ave Calvar

그들은 무엇보다, ‘젊었다!’ 젊음이란 것이 나이든 이를 얼마나 주눅들게 하는 것인지, 꼭 늙어봐야 알리라. 심지어 참석한 이들 중 한 분(나처럼 나이 지긋한 분)은 ‘위축된다’는 표현을 ‘꼭 집어서’ 썼다. 평생 일하며(또는 싸우며) 사는 것이 최고인 줄 알았던 산업화(또는 민주화) 시대의 주역 또는 그 자손인 우리들 꼰대 네안데르탈인이, 자유롭고 예술적인 젊은 호모사피엔스들을 만나 놀랍고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인류는 진화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난 그 자리에서 느꼈다.

그렇다면 젊은 호모사피엔스를 대하는 우리 늙은 네안데르탈인의 자세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정답이 있다. 모든 종교와 사상이 똑같이 말하고 있는 그것, ‘역지사지’다. 우리가 젊었을 때 나이든 이들에게 무엇을 바랐는가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우리는 간섭이 싫었고 명령이 싫었고 단언하는 말이 싫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큰소리치는’ 부모님이 싫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려고’ 든다.

최근 또 역지사지의 진리를 깨달은 것은, 2022년 8월 생태적지혜연구소의 다시배움터 ‘생태민주주의’ 강의에서였다. 정유진 님이 녹색당에 대해 강의할 때였는데, 토론시간에 민감한 이야기가 나왔다. 누구도 꺼내고 싶지 않은 이름, 나왔다 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상처받는 이름,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처럼 입에 올리면 큰일 나는 이름. ‘박원순’이었다. 예상대로 약간의 갑론을박이 있었고 그날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네안데르탈인 입장에서 그는 어쨌거나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잘못을 크게 했지만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욕할 수만은 없는, 정말 ‘식은땀 나게 하는’ 존재다. 사건 초기에 나는 그를 옹호하는 말을 종종 했고(물론 작은 목소리로), 그 때문에 젊은 여성들에게 크게 비판받았다. 그들과의 대화와 토론, 또 깊은 자기성찰과 반성 끝에 이제 나도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려고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역시나 역지사지다. 나는 이승만, 박정희를 무조건 옹호하는 꼰대들이 너무 싫었다. 그가 이러저러한 잘못을 했지만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켰고, 배고픈 우리 국민들을 배부르게 했다는, 판에 박힌 그런 말들이 너무 싫었다. 그러나 알게 됐다. 내가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독재자와 박원순을 비교하면, 민주화의 후예들은 당연히 발끈할 것이고 나 역시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박정희를 그토록 지지하고 인기 1등의 대통령으로 숭배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더 그를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는 것을. 즉 박정희의 과오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를 극성스럽게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그를 비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박정희가 그렇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재판을 받고, 죗값을 치르고, 반성을 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가 비록 악독한 독재자였지만, 잘한 일도 있었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만델라가 말하는 ‘진실과 화해’란, 가해자가 진실을 말하고 참회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원순은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죽음을 택함으로써 ‘진실과 화해’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의 공을 구구절절 읊으며 옹호하는 우리 민주꼰대들 때문에 더 화가 나는 것이다. ‘공과를 다 같이 보자’는 말을 많이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이야기를 할 때 특히 그렇다. 그런데 가장 우선 필요한 것은 ‘과’에 대한 고백과 그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박원순을 옹호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그것이 없었던 거다. 이전 꼰대들처럼, 변명만 풍년이었다.

이제 민주꼰대에서 생태꼰대로 넘어오는 전환의 시대다. 생태꼰대란 말도 다시배움터의 한 참여자 분이 언급했고 우리는 그 순간 모두 박장대소하며 공감했다. 예컨대 생태꼰대란 이런 분이다. 대체로 나이 많고 점잖고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는데 현재는 생태, 생명운동에 전념하는, 사실은 매우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여전히 목에 힘이 들어가 있고 한번 마이크 잡으면 놓을 줄을 모르고 가끔 눈치 없이 성차별적 또는 나이 차별적 발언을 하고 훈계하듯 말하고 자기자랑에 열심이다. 사실 나도 가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그런 점을 지적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고 얼른 사과하고 반성하고 나를 돌아볼 자세를 갖추려고 한다. 사실 그런 비슷한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속으로는 많이 아팠지만 덕분에 성장했다고 느낀다. 경제는 탈성장해야 하지만, 꼰대는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인 성장통도 달게 겪자.

이나미

한국의 정치이념과 정치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정의가 구현되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해법은 무엇인지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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