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탈주의 농사를 꿈꾸며

도시농업모임에서 만난 『천 개의 고원』 읽기를 통해 농사와 탈주가 만나는 지점을 정리해 보았다.

‘도시농업시민단체’를 통해 『천 개의 고원』 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에 놀랐다. 어렵다고만 알고 있던 책을 인문학 모임도 아닌 도시농업모임에서 만난다니! 더구나 강의 형태라 하니, 평소 궁금하던 내용을 들어나 보자는 식으로 신청하고 바쁜 농번기, 늦은 저녁 시간를 쪼개가며 강좌를 들었다. 조금 여유로운 농한기가 되어, 머리 한쪽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수많은 분량으로 머릿속 뒷공간에 쌓아놓던 내용을 일부 ‘정리해보자’라는 심정으로 에세이로 남기게 되었다.

들어가며

농사는 들뢰즈-가타리의 탈영토화가 관통하는 지점이 있다. 사진출처: YHBae
농사는 들뢰즈-가타리의 탈영토화가 관통하는 지점이 있다. 사진출처: YHBae

우선, 나는 농부인지라 온통 생각이 농사로 꽉 차있기에 농사로부터 시작하는 게 맞겠다. 대게 농사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를 우리는 농사 방법, 즉 농법이라 한다. 척박했던 땅에서 오랜 시간 동안 생태 순환을 기초로 이어왔던 전통 농법,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는 석유 기반 산업농을 통칭하는 관행농업, 나아가 친환경농법, 유기농법 혹은 자연농법 등등… 굳이 따지고 들자면, ‘백 명의 농부에겐 백 가지 방식의 농사법이 있다’는 말이 맞겠다. 나름 농부들에 따라 미세한 방식들이 다양해서 한가지로 획일화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방법들을 잘 살펴보면 각각의 중점사항이 다르다. 수확이라는 결과에 중점을 두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덜 수확하더라도 과정의 건강함에 포인트를 두는 경우, 원리에 충실한 방식 등 모두 제각각이다.

농사란 ‘흐르는 계절과 시간 속에서, 농부의 목적에 맞게 식물의 어떤 상태를 수확하는 방식’이다. 모든 농사의 기초에는 풀의 자연스런 ‘천이원리’가 있다. 이를 좀 더 사람의 효용에 맞게 각색한 작업이 농사다. 순리에 따라 흐르는 자연에 대하여, 어떤 지점의 용도를 달리한다는 지점에서 농사란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제시한 ‘탈영토화’라는 말의 쓰임과 비슷하지 않은가.

탈영토화로서의 농사, 재영토화로서 농법

그렇다면 우선 탈영토화란 사전적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자. 사전에서는 이를

‘어떤 사물의 용도가 하나의 구조나 체계를 벗어나려는 경향. 즉 억압과 통제를 벗어나 탈주하려는 분열적 흐름을 뜻한다’(다음사전)

라고 정의하고 있다. ‘영토’란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자 장소이며, ‘탈영토화’란 어떤 이유로 인하여 기존 공간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재영토화’란 또다른 공간에 삶의 터전을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말했듯 인간적 방식이 가감되는 농사란 자연스러운 생명 본위의 법칙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탈영토화이고, 나아가 농사의 다양한 농법들이란 다양히 재구성된다라는 점에서 재영토화와 일맥상통한다.

나는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기 전 다른 업을 가졌었다. 농사로 돌아오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도시농업 교육과정에서 친환경농법을 만난 것이다. 당시엔 관행 방식의 농업-석유 산업을 기반으로 한, 특히 기술발전이 이룩한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통해 불확실한 변수들을 제거하고 안정적 수확을 도모하는 농법-이 대세였다. 하지만 관행농법은 수확량과 결과에만 집중하다 보니 농산물들의 건강한 상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다. 더구나 기준치 이상의 농약이 사용된 수입농산물은 더더욱 사회적 문제가 되었었다. 꼭 이러한 이유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이슈와 더불어 친환경농법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특히 도심 텃밭을 통해 직접 다룰 수 있는 다양한 농자재 가공 방법들을 익혔는데, 직접 음식과 식물의 부산물들을 모아 식물의 영양분인 거름을 만들어보는 실습. 벌레를 쫓거나 곤충이 싫어하는 냄새 나는 식물 등을 이용하여 친환경 식물 농약을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 이런 다양한 방법을 오랫동안 친환경 농사에 적용시키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야말로 자연 친화적이었다. 또 이런 방법은 도심 인근 친환경 도시농업운동을 확산하는데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친환경농업은 주위 선배 농민들 눈에는 이상한 방식이었다. 퇴비와 영양제, 살충제, 살균제를 농자재 가게에서 쉽게 할 수 있는데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은 봄이면 부지런히 밭을 갈아 작물을 키우고 여름이면 땀 흘리며 작물을 관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가을엔 유기재배 된 김장배추를 팔고 가을무를 땅속에 묻었으며, 겨울이 와 땅이 얼기 전까지 월동작물들을 심었다. 그렇게 몇 년이 되자, 축척된 다양한 경험들은 나름 친환경 전도사로서 주위 도시농부들에게 그 역할들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재영토화 된 친환경농법에서의, 또다른 요구

지금까지의 친환경 농법도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받고 있다. 사진출처: jdhbiz
지금까지의 친환경 농법도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받고 있다.
사진출처: jdhbiz

하지만 매년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나의 농법에 대해 몇해 전부터 또다른 고민이 시작되고 있다. 특히 올해, 친환경농부를 후원하는 기업과 함께 펼쳐진 도심농부시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 시장은 ‘땅을 돌보는 농부, 지구를 돌보는 일’이라는 슬로건을 건고 진행되는 프로젝트였다. 최근의 기후위기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농사에 있어서도 총체적으로 지구환경과 공생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틀이 잡혀서 이어갈 듯했던 친환경농법이, 시급해져가는 기후 위기와 관련하여 또다른 점검과 답변을 해주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스스로의 농사에만 빠져 깊이 고민하지 못한 지점이기도 했다.

그럼 지구환경에 도움이 되는 농사란 어떤 방법일까? 공기 중에 떠다니는 탄소는 일부 관행의 농사를 통해서도 발생하지만, 땅을 뒤집는 친환경농업의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량의 탄소 포집하거나 순환 유지할 수 있는 흙에 대한 문제였는데, 바로 경운(밭의 흙을 기계를 통해 뒤집어 자연의 평형상태를 최초로 돌려놓는) 방법에 대한 지적이었다. 밭을 갈게 되므로 땅 속에 갇혀있던 유기물들은 외부로 노출되며,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하므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켜 온난화를 가속시킨다는 것이다. 밭을 갈거나 뒤집더라도 순환 유기물만을 가지고 재배하면 커다란 문제 없이 허용되었던 친환경농법은 이젠 더 이상 지속가능한 지구농사방법이 아니게 된 것이다.

탈영토화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되는 얼굴

다시 『천 개의 고원』으로 돌아와 보자. ‘얼굴성’에 이르러, 이를 정의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설명은 매우 독특하다. 농법이 농사로서의 탈영토화인 것과 같이, 인간의 손은 앞발의 탈영토화를 통해 생성되었고 얼굴 역시 동물의 머리에서부터 탈코드화, 탈영토화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동물이란 머리와 몸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얼굴성’이란 직립 인간이 머리 기관을 넘어, 주위의 풍경 조건 등의 요소들과 어울려서 어떤 도식된 사건이나 현상을 이끌어 낸다는 말이다. 권력이 욕망하고 있는 배치된 것에 따라 얼굴은 일종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7장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은 유럽인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예수를 백색인으로 정의하고 일탈시키므로 인종주의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만약 얼굴이 크리스트, 즉 어떤 보통의 백색인이라면 최초의 일탈, 최초의 유형별 격차는 인종적이다. 황인종, 흑인종, 두 번째나 세 번째 범주의 인종들…’

『천 개의 고원』, 340P

그런 점에서 백색인으로 대표되는 슈퍼스타 예수의 얼굴은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 권력을 지닌다. 백색인으로부터 모든 인종은 그들처럼 포섭되어야 한다는, 말하자면 ‘얼굴성’이 갖게 되는 정치 권력인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농사와 농법 역시도 도식화되었을 때, 사회적으로는 어떤 권력과 의미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최소한 농업 권력 사이에서는(구체적으로 어떤 권력일지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우나) 일단 고정되고 정형화된 사유 방식으로서의 주장 또한 위험할 수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탈주, 그리고 스스로가 자유로운 농사를 위하여

결론적으로 농사에 있어서 언제나 합리적이고 옳은 농법은 존재할까? 나의 답변은 단순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점에서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또 다른 부분에서는 잃고 마는 것이다. 모든 농사와 농법 자체가 다 인위적이기도 하지만, 그러하기에 모두 이유가 있다. 어쩌면 현재의 지구적 상황에서는 가장 자연스런 방식을 최소한으로 개입하며 거두는 수렵 농법 혹은 자연 농법이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연이 갖는 모든 수평성 때문에, 이런 농법들은 일정 인위 영역에서 기형적으로 다수확되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쩌면 가만두는 농법이란 수확을 목적으로 하는 방식이기보다는, 마음 내면을 다스리는 도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나는 스스로의 농사를 ‘도심 인근 노지 기반 유기재배상업농’으로 소개하곤 한다. 이는 ‘대규모 인구 밀집 지역인 서울·경기 도심 주변에서 비닐하우스와 같은 인공적인 시설 없이, 외부와 노출된 노지를 기반으로 농사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또 석유화학적인 무기물이 아닌 동식물의 부산유기물을 식물의 먹이사슬 기반으로 재배하여, 이를 수확해 판매하는 농사’로 풀어 설명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현장 상황에 있어서는 언제나 달라진다. 농사란 농부가 짓기도 하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란, 외부의 환경이 더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어떤 한 가지로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굳이 말하자면, “짬뽕농법” “멀티농법” “복합농법”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나가며

농사 방법의 다양함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쉽지 않지만, 모든 방법들은 시급하면서도 중요한 나름의 의미가 있다. 특히 아직까지도 관행농법은 현대 농사방식을 대표하며 급격하게 증가한 세계 인구에 대하여 농업경제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농부에게 있어 지구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경제적 생존과 농업 가치 사이에서 현실적인 저울질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고정된 방식이 갖게 되는 정형화된 권력이 더 문제인 것이다. 뭐 그렇다고 지구 걱정을 하며 세계 인구를 책임지려는 거창한 담론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오랫동안 한쪽 근육만을 키워왔던 10여년 차 농부로 분명한 건, 그저 작금에 재배치로 제시된 또다른 탈주를 위하여 스스로를 돌아보며 도주선을 그려야 하겠다.

찬우물

고양 화정인근에서 농사하고, 농한기엔 여행과 책읽기를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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