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소비 속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아서 – 『성장 이후의 삶』을 읽고

성장이 우리에게 정말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 성장은 그 결과를 골고루 나누지도 않는다. 소비를 통해서만 그 결과를 아주 약간 맛볼 수 있다. 그 소비로도 행복이 보장되지 않으며, 성장으로 인한 환경 파괴는 전 지구적 위기를 불러온다. 소비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안적 즐거움을 상상해 본다.

환경 생태 위기에 관한 많은 책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책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에서도 빈번히 다뤄지며 중복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익숙하게 접하는 내용이 많다. 기후 위기나 종의 감소와 관련된 내용은 모든 미디어에서 너무도 많이 다루는 바람에 누구에게는 지루함이 되었다. 그래서 환경문제에 생소한 독자가 아니면 정확한 내용은 아닐지라도 대강의 문제가 무엇인지 안다. 문제만이 아니라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어떤 것들을 해야 하는지 독자들은 어렴풋하지만, 알고 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제시된 해결책들은 구체적 실천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 문제와 해결책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아니다.

왜 이런 걸까.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문제가 정말 문제가 아닐 수도 있으며, 문제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다. 해결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결책이라고 하는 게 오답일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문제에서 해결에 이르는 길이 많아 그 중간을 헤매다 지친 경우도 많고 중간에 포기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성장 이후의 삶』은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해결책을 실천할 수 있는 한 가닥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고삐 풀린 지구 온난화, 생태계 파괴, 불평등을 문제라고 여기는 데는 크게 이견이 있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현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상황이 다르다. 전 지구적 위기를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 모두의 절멸 위기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 현상을 단순히 인류의 진보에서 하나의 부수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전 지구적 위기를 단순한 부작용 정도로 치부한다. 따라서 이들에겐 이 위기도 인류가 진보를 통해 해결될 무엇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지속적인 성장이다. 성장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기술 유토피아는 이런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예를 들어 이들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방법으로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화석연료를 대체할 그 무엇의 에너지를 찾는 것이다. 내연기관 자동차 대신 전기 자동차, 화력 발전 대신 태양열이나 핵발전(그리고 핵융합 발전)으로 “진보”된 무엇을 계속 찾는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기술로 해결하려 한다. 이런 기술 유토피아 ‘지상주의’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되어 있을 거라는 추측은 주변의 갑남을녀들과 일상 대화를 나눠보면 쉽게 할 수 있다. (늘 이 대화의 끝은 우주 개발이다.)

기술 유토피아 ‘지상주의’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되어 있다. 
by Harsch Shivam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vr-2007647/
기술 유토피아 ‘지상주의’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되어 있다.
사진 출처 : Harsch Shivam

인류의 역사를 따져보면 산업혁명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동안 많은 기술이 나타났다. 산업혁명의 시작을 대략 18세기 후반이라고 하면 250년의 기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간이 인간 한 개인이 길게 느낄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250년 전이면 영‧정조 시대다. 이걸 가깝고 짧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 세대의 평균 수명을 넘어버린 시간을 한 인간이 짧게 느끼는 게 과연 쉬울까. 게다가 최근 몇 십 년 동안의 기술발전은 매우 빨랐다. 그런데 젊은 층들은 이렇게 기술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기술은 언제나 빠르게 발전하는 것이었다. 그들로선 그들 평생 일어나고 있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인구의 젊은 층들은 더욱더 기술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술발전 속도에 대한 감수성이 생물적인 것에 기반 한다면 오히려 빠른 기술변화를 어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기술과 성장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옆에서 낮잠 자고 있는가.

기술이 단순히 기술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기술의 발전에 가속을 더한 것은 자본주의를 만나고 난 이후다. 산업혁명을 왜 혁명이라는 단어까지 붙어서 그 의미를 강조했겠는가.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력을 감축하고 생산성을 늘리기 위해 당시 첨단의 기술이 쓰인 것이고, 이것은 지금이라고 다를 바 없다. 문제 좀 더 넓게 얽힌다. 이렇게 기술과 자본주의 덕에 세상에 나온 물건들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것들은 상품으로서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소비자를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유혹해야 한다. 상품 말고 어떤 무엇이 이 서로 모순되는 단어를 한 몸에 받아들이겠는가. 상품의 유통은 자본의 축적이다. 상품 순환의 절정은 소비다. 소비를 통해 자본은 축적된다. 소비라는 행위만이 자본을 증식시키진 않는다. 어느 상품에 ‘인기’라는 라벨이 붙여지는 순간 그것을 만든 회사는 상품 이외의 자본을 추가로 얻을 수 있다. 신용, 발행 주식의 상승, 추가 투자 유치 등등등. 상품의 소비가 충만해지면 자본이 있는 곳에선 마법은 일어난다.

기술과 자본주의는 성장의 압박이라는 공통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기술은 새로운 것을 앞세우려 한다. 자본주의는 이윤이라는 성장만을 목표로 한다. 이 둘은 합쳐져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찾게 된다. 이 과정이 지난 3세기 동안 진행된 것이다. 지금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쳇바퀴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의 평균 기대 수명보다 오래 유지 되었으니 말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같이 정해진 것 질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류는 3세기만 살았던 동물이 아니다. 역사를 가지고 산 기간도 6000년이 넘는다. 인간이 주어진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기술뿐만 아니라 상상력이다. 우리는 다시 무언가를 해결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기술과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장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유는 아주 간명하다. 기술과 자본주의가 합쳐 이룬 성장의 원료는 지구다. 그 성장은 무한을 꿈꾸는 데 지구는 유한하다. 지구가 종료되면 기술과 자본주의는 자동 종료다.

『성장 이후의 삶』이 제안하는 것들은 의외로 간단하다. 성장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따져 물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있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해도 말이다. 구체적 실천은 소비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소비의 변화가 성장의 신화를 종료시킬 수 있는 시작버튼이기 때문이다. 이전 정통 좌파들이 소비라는 행위를 단순히 자본에 포섭된 개별자들의 무의미한 행위로 폄하한 것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시대는 분명 바뀌었다. 전통적 노사대립의 전선은 지금 널려있는 많은 환경‧생태 문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 임금 올려주면 멸종이 멈춰지는가. 전통적 의미의 노동조합은 종종 반환경생태적 노선으로 기울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유한 계급들이 더 친환경적인 경우도 있다. 이런 전통적 대립 구도로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소비는 좀 다르다. 소비에 방점을 두면, 실천의 주체가 소비자가 된다. 소비의 선택 혹은 중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에 속한다. 소비자, 시민, 노동자, 여성, 소수자 등등 어려 겹의 능동적 주체로 복잡한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따로 사회적 정체성을 강제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 저자는 소비자로서 할 수 있는 소비의 축소와 중지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것은 금욕적 절제가 아니다.

우리가 성장과 기술발전을 추구하며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회복하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성장 이후의 삶』에서 나오는 대안적 쾌락주의의 알맹이다. 저자가 자주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교통수단은 자전거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자전거는 적절한 속도를 통해 회복시켜준다. 동력도 인간 그 자체다. 저자가 자전거를 통해 이야기하려는 실천의 방법은 느림이다. 빠른 속도가 인간에게 허용하는 감각은 시각이다. 비행기, 자동차,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 우리는 이동하는 동안 이동통로(장‧단거리 여행, 출퇴근을 포함한 모든 이동)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시각적인 것만이 유일하다. 빠른 이동 상태에서는 촉각, 후각으로 장소에 대한 경험이 쌓이질 않는다. 기껏해야 차 안의 방향제가 외부의 경관이 무엇이든 제공되는 유일한 화학적 즐거움이다. 느림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감각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물론 저자도 지금의 모든 기술을 포기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장거리 여행이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도 한다. 인생에 몇 번 이국적 경험을 하는 것에는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 1년에 한두 번 비행기 타는 사람 말고 주말마다 런던과 뉴욕을 오가며 쇼핑하는 사람들이 비판의 대상일 것이다. 영국의 예로 부유한 15%가 항공 여행의 70%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일부가 과잉적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을 보여준다. 빠른 교통수단과 이동 목적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 말고도, 저자는 공유 경제, 세금, 노동에 대해 대안적 즐거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모두 정답이거나 정확한 관점일 리는 없다. 세상 사는데 정답이 존재하기나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저자가 주장하는 몇 가지 관점들을 취해보는 것은 개인의 삶에서 여유를 주지 않을까 한다. 느림은 속도의 경쟁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수단이다. 속도가 더 빨라지면 이탈자는 더 늘어간다. 이탈자가 많아지면 시대의 흐름도 바뀐다. 이탈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역사적 변화는 개인의 의도적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때가 많다. 물질적 환경의 변화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임박해 있는 환경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압박이다. 선택이 어려울 때 밀려서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끔 주관식보다 객관식이 고민을 덜어줄 때도 있다. 정해진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찍어라.

김영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만 하다가 2, 30대가 지나가 버린 아저씨. 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옆에 있는 경기도에 사는 지구인. 행복을 찾아 아직도 고민 중인 호기심 많은 호모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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