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⑲ 나선형으로 얽는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스피노자

흔히 노마드를 두고 전 세계를 자유롭게 유랑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고정관념을 통해 보지 않고 그들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는 것이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국지적 절대성’이라고 칭한다. 핵심은 현실을 뻔하고 비루하게 바라보지 않는 데 있다. 고정관념과 고정된 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똑딱거리는 일상뿐이다. 이는 스피노자식의 ‘삶의 내재성’ 개념과도 통하는데, 삶이 풍부하고 다양하며 그 깊이와 잠재성 속에 생명과 자연의 비밀이 내재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피노자, 아카데미를 벗어난 반철학의 철학

모처에서 특강 요청을 받고 증빙서류로 제출해야 하는 이력서를 작성하다 보니, 문득 내가 속한 아카데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우리 부부의 연구실인 철학공방 ‘별난’의 공동대표직을 내걸고 특강이며 세미나며 회의에 다니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를 하기에 어려움도 많고,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의외의 난관과 한계에 봉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간강사 자리 같은 작은 끈이나마 붙잡고 싶은 생각도 들곤 합니다. 하지만 최근 대학에서도 인문학 자체가 구조조정되고 퇴출되고 있는 상황이라, 사실상 인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대학은 기능정지에 빠져 있는 상황입니다. 인문학 연구자로서 이래저래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펠릭스 가타리는 “아카데미에 목을 축이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카데미는 체제와 문명이 요구하는 답을 내놓는 전문가들을 육성하기 때문입니다. 아카데미에서는 좋은 질문이나 날카로운 문제의식 같은 데는 그리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저 화려하고 세련된 대답이라는 고정관념을 논증과 추론으로 정돈해서 전달하는 전문가를 원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제가 아카데미에 발을 담그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는 대학 교수직을 거부했다지요. 당시 아카데미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치는 데카르트주의였다고 합니다. 대학에서는 스피노자를 조금 이단적인 데카르트주의자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스피노자는 안경알 세공과 『에티카』 집필을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하고 맙니다. 아마도 스피노자는 아카데미의 존립 근거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모든 것을 편편하고 중화되고 탈색되고 뻔한 것으로 보편화하는 아카데미의 원리와 작동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스피노자는 아카데미가 어떠한 자유로운 사상에도 기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거부합니다. 그는 안정된 삶을 살면서 학문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과, 자유정신을 맞바꾸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는 대학의 기능 정지와 인문학의 죽음에 직면한 현시점에 연구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야성성을 갖도록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대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극한적 사유, 경계인의 사유를 함으로써, 적당히 타협하는 길보다는 좁고 험난하지만 색다른 사유의 경로를 개척하라고 스피노자가 일갈하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이런 얘기를 하면, 주변에서 걱정하고 아마 아내에게 한소리 듣게 될 테지요. 그러나 야성성이 자율성이듯이, 야만적 별종이었던 스피노자의 길을 따라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 ‘주류 아카데미의 사유로부터 벗어난 반철학의 철학’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스피노자는 연구자, 철학자, 사상가로서도 시대를 선도했던 사람입니다.

스피노자와 두 종류의 노마드

들뢰즈와 가타리 중 누가 더 스피노자와 닮았는지 논쟁이 일었습니다. 들뢰즈는 30년 넘게 아카데미를 벗어나지 않고 같은 대학에서 강의했지요. 가타리는 그런 들뢰즈를 보고 “염소를 묶어두면, 한자리를 뱅뱅 돌며 풀을 뜯는다”라고도 말했다지요. 반면 가타리는 젊은 시절부터 유럽을 여행했고, 중년 이후에도 강연을 위해 세계 각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스피노자에 가까울까요? 가타리가 더 스피노자에 가까울까요? 아마 스피노자가 시골 마을에서 안경알 세공 작업장과 하숙집을 오가며 은둔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스피노자가 심오한 은둔자의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이지요.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에는 노마드(nomade), 즉 유목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유목민은 지역과 경계를 넘어 곳곳을 떠돌며 유목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드 개념은, 정주적이고 정체되어 있는 국가주의를 거부하고 자신을 사로잡은 경계와 구획, 고정관념에 전쟁을 선포한 전쟁기계와도 같은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욕망을 가로막았던 체제와 시스템에 저항했던 68혁명은 노마드의 혁명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겠지요. 실제로 68혁명 동안 많은 사람들은 권위주의와 지배질서에 저항하고, 자유로운 삶, 고정관념이나 권위와 위계가 없는 삶을 위해서 투쟁하는 전쟁기계 같았으니까요.

고정관념과 고정된 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똑딱거리는 일상뿐입니다. 사진출처. YHBae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노마드를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법’이라고 명시한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국지적 절대성’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국지적인 영역, 즉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고정관념을 통해 보지 않고 그들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것을 노마드라고 칭합니다. 어쩌면 스피노자의 삶이야말로 국지적 절대성을 구현한 삶으로 보입니다. 즉 삶의 내재성이 갖고 있는 깊이와 잠재성에 주목하면서, 그 위를 흐르는 정동, 사랑, 욕망을 지도 그리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강의 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색다름을 찾아야 할까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면서 색다름을 찾아야 할까요?”라는 이분법으로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둘 다요!”라고 말했지요. 사실 서로 대립하거나 배리(背理)되는 개념도 아닌 이상 두 가지 방법을 잘 배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들뢰즈는 국지적 절대성으로서의 노마드를, 가타리는 전 세계를 유목하는 노마드를 삶으로써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들뢰즈와 같이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법, 즉 국지적 절대성에 능통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문제는 현실을 뻔하고 비루하게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고정관념과 고정된 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똑딱거리는 일상뿐입니다. 스피노자가 주목한 삶의 내재성이라는 개념은, 삶이 풍부하고 다양하며 그 깊이와 잠재성 속에 생명과 자연의 비밀이 내재해 있음을 밝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어쩌면 노마드 이론에 최적화된 사람이 바로 은둔자로 불렸던 스피노자일지도 모릅니다.

스피노자는 발견주의인가? 구성주의인가?

스피노자주의자인 들뢰즈와 가타리는 마치 두 명의 분신처럼 스피노자 사상의 두 가지 측면으로 분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발견주의와 구성주의로의 분기입니다. 발견주의가 삶의 재발견이라면, 구성주의는 삶의 재창안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삶의 내재성 개념을 두 차원에서 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들뢰즈는 초월론적 경험론의 구상을 통해 외부로부터 사건이 다가오는 것, 즉 우발성과 외부성에 대한 발견이 앎이며 인식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이미 스피노자를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사유했던 알튀세르 같은 사상가들도 제기했던 측면입니다. 즉 정동, 사랑, 욕망이 발생론적으로 볼 때 외부로부터 다가온 사건에 의해 촉발되며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발견하고 재발견한다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외부와 접촉하는 신체는 그 잠재성과 깊이에 의해 하나의 특이한 사건으로 외부와의 마주침을 표현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들뢰즈는 “잠재성이 신체의 표면에서 흐른다”고 표현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체의 표면이 바로 사건이 발생하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사건성을 초월론적인 발견의 눈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성주의에 따르면, 100명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면 한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100개 혹은 100개 이상의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집니다. 사진 출처: eak_kkk

이러한 생각은 마치 불교의 지관법을 연상시킵니다. 지관법은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수하는 나로서의 1인칭의 나와 이를 지켜보는 나라는 3인칭의 나가 동시에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들뢰즈의 발견주의는 앞서 얘기했던 국지적 절대성과 같이 아주 국지적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깊이와 잠재성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방법론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잠재성은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과 유사하며, 마음속 깊은 심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표면 위로 흐르는 변용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어디에 접촉하느냐에 따라 꽃이 될 수도, 새가 될 수도, 강아지가 될 수도 있는 잠재성이 신체 표면 위로 흐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주의는 우리 신체 표면 위에 있는 ‘되기’의 능력, 즉 잠재성을 끊임없이 응시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내재성 논의를 앎과 사유의 측면에서 발전시킨 결과물입니다.

반면 가타리는 구성주의적 방법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을 전개해 나갑니다. 물론 들뢰즈도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과도 같다”라고 말하면서 구성주의의 단초를 제공한 바 있습니다.

구성주의는 생명의 유일무이성과 특이성에 따라 하나의 통합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구성한 세계가 따로따로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에 따르면, 100명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면 공동체가 한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100개 혹은 100개 이상의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을 더욱 급진적으로 전진 배치하여 인식론에 적용한 결과입니다. 스피노자 당시에는 특이성 개념을 창안했음에도 이를 구성주의로 발전시킬 수 없었지만, 칸트, 바렐라, 비고츠키, 피아제, 라투어, 가타리 등을 거쳐 특이성에 입각한 구성주의의 방법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가타리는 구성주의 중에서도 생명, 기계, 인간, 사물, 자연의 자기생산에 대해 탐색합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자기보존 욕구로서의 코나투스 개념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가타리는 생명활동의 목적과 과정, 결과물이 생명 자신임에 대해서 말하는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인 셈입니다. 가타리는 이를 계승하여 기계론을 정립합니다. 여기서 기계는 단순히 금속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도구로서의 기계가 아닙니다. 반복을 이루는 모든 것을 일컫는 말이지요. 우리 몸도 반복적인 움직임을 수행하여 맡은 일을 해나갑니다. 예를 들면 다리를 반복적으로 움직여 걸어가는 이동기계, 손으로 반복하여 글씨를 쓰는 필기기계, 위장이 반복적으로 움직여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소화기계 등등 셀 수 없이 많지요. 그런가 하면 아침-점심-저녁, 밀물-썰물, 봄-여름-가을-겨울, 지구의 자전과 공전, 핼리혜성의 도래 등 지구생태계를 넘어서 우주로까지 반복을 이루는 모든 것이 다 기계입니다. 그 반복의 추동력이 바로 욕망이고요. 지구나 핼리혜성이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의아한가요? 욕망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삶의 자기원인, 범신론에서의 신적 속성이라고 이해하면 어떨까요?

가타리는 이 모든 기계들을 관통하는 이론으로서의 기계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기계 역시 닫히고 폐쇄된 자동기계와 같은 기계(mechanics)가 있는가 하면, 열리고 자기생산하는 네트워크와 같은 기계(machine)가 있다고 말하면서 ‘기계(machine)의 자기생산’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러한 기계의 자기생산에 대한 구상은 사실상 네트워크, 사이버네틱스, 인공지능 시대를 예감하는 것입니다.

들뢰즈의 발견주의와 가타리의 구성주의는 스피노자 철학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창안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름이 펼쳐지는 과정처럼 스피노자의 사상에 잠재되어 있는 작은 단서와 아이디어가 전개되고 표현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삶의 내재성 개념은 삶의 재발견과 삶의 재창안에 따라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니체와 스피노자와의 결혼

스피노자주의자로서의 두 사람,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기점이 되는 지점이 있으니, 바로 니체에 대한 입장 차이입니다. 하나하나 내용을 살펴볼까요? 먼저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역능(force) 개념과 니체의 권력의지(will to power) 개념을 통합하여 사유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역능은 내재적인 사랑과 욕망의 능력이며, 초월적인 권력(power)의 힘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중의 역능인지 군주의 권력인지를 정확히 구분합니다. 사랑에 따라 그 일을 해낼 힘을 갖고 있는지, 권력에 따라 그 일을 해낼 힘을 갖고 있는지를 명확히 구분하자는 말이지요. 우리 주변에도 “내가 그 일을 해냈다”고 내세우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잘 살펴보면 그 공동체와 집단적 배치가 갖는 힘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공동체의 배치와 관계망이 갖는 능력인지, 아니면 판단하고 행동한 개인의 능력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 쪽에 자꾸 힘을 싣게 되면, 이는 곧 그 개인의 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겠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왜 스피노자의 역능 개념과 니체의 권력의지를 통합적으로 사유했을까요? 사실 니체의 선악의 계보학은 초인 스스로가 선과 악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 창조의 권력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선악이나 도덕, 윤리 등은 그것의 배치와 관계망이 갖는 ‘사랑과 욕망의 역능’에 따라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 쉽게 수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니체의 권력의지에서는 공동체적 관계망과 배치 속에서 유통되는 사랑과 욕망의 역능에 대한 고려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역능 개념이 적시하는 공동체적 배치와 니체의 권력의지가 적시하는 초인 개념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왜 스피노자의 역능과 니체의 권력의지를 무리하게 통합하려고 했을까요? 의문이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들뢰즈 자신의 사회적 배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는 철학자로서 사유하면서 공동체적 관계망이 가질 수 있는 보수적인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게 사유를 전개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아카데미에서의 지식인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심상은 바로 초인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즉 관계망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지식인이 가치창조와 가치판단을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물론 가타리는 니체의 사상에 대해 “약함을 넘어서는 강함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그것은 역능이 아니라 권력의 영역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처럼 가타리는 배치와 관계망으로부터 벗어난 초인의 설정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타리는 니체와 전혀 관계가 없는 스피노자로부터 사유와 실천을 진행했다면, 들뢰즈는 니체와 스피노자를 결연시키면서 사유와 실천을 진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스피노자를 계승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지만, 스피노자를 수용하는 데 있어 묘한 긴장감과 편차를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가타리의 기계적 무의식, 스피노자를 전진 배치하기

가타리는 무의식을 사회-역사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으로 봅니다. 즉 무의식 속에는 개인의 병리적인 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무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진출처 :rabedirkwennigsen
 
 

스피노자의 무의식 개념은 가타리에 의해 더욱 혁신적으로 재창조됩니다. 가타리는 스피노자의 무의식 개념이 “정신이 장악하지 못한 또 하나의 생각”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삶과 생명력과 욕망으로부터 유래된 강건하게 반복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프로이트와 라캉처럼 무의식 개념을 연약하고 흔들리고 병리적으로 보는 것과 차이를 보입니다. 후기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동물적 충동이 작동하는 이드(id)라는 관점으로 비하합니다. 초자아인 아버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아이들의 동물적인 본능이나 충동이라고 치부되지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발상은 무의식을 비하하고 환원하는 데 동원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로부터 가져온 스토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감추고 싶었던 병리적인 무의식이 정확히 해석되고 의식화되는 순간에 해방감이나 카타르시스가 찾아오고, 치료된다는 가설에 따라 정신분석을 수행합니다. 즉 동물적인 무의식이 의식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 이는 곧 억압이 있어야 문명이 성립된다는 생각으로 향합니다. 이런 치유가설은 결국 스피노자가 발견한 무의식 현상과 이러한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적인 삶을 천한 것으로 여기며 아버지, 국가, 신 등 지배질서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가타리는 무의식을 오히려 사회-역사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으로 봅니다. 즉 무의식 속에는 개인의 병리적인 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무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일제 강점기, 새마을운동, 광주민중항쟁, 1987년 민주화항쟁, 촛불집회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가타리는 프로이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만능열쇠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일침을 놓습니다. 가족주의 전망이 없는 젊은이들이 있을 수 있고, 가족의 형태가 단 하나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68혁명 세대를 예시로 듭니다. 또한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 개념을 제안합니다. 이를 통해 무의식은 부부의 침실에도, 텔레비전에도, 축구장에도 서식할 수 있다고 보면서, 무의식 자체가 사물, 기계, 생명에 깃들어 있는 세상의 작동원리라고 간주합니다.

이러한 가타리의 무의식에 대한 사유는 스피노자의 무의식 개념이 민중적 삶의 내재성과 생명 에너지와 활력, 욕망을 규명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생성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타리는 스피노자의 무의식 개념을 혁신하고 그 원래의 의미와 가치를 복원했다고 평가됩니다. 이를 통해 자연과 생명의 힘이 우리의 무의식과 욕망에 내재해 있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으로 더욱더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합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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