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잘 알지도 못하고 그리 즐겨보지도 않는 내가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재관람한 영화는 《벌새》(House of Hummingbird, 2018)였다.
“…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그때의 내 마음에 깊게 남았던 영화의 대사는 한 해 두 해 지나 기억 속에서 편집되고 변형되었고, 생각은 가끔씩 ‘정말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는데 무슨 소용이지, 그래서 뭘 할 수 있을까.’ 같은 습관적 비관으로 흘렀다. 그것이 내 미래에 관한 것이든, 기후위기에 관한 것이든 뭐든.‘
끌리는 일이 많지 않다. 새로운 시도를 꺼리는 편이다. 그렇게 생긴 대로 살다 보니 너무 별것 없이 살았나 싶었다. 올해부터는 할까 말까 고민될 때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많으면 그냥 해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입지 않는 니트 수선 워크숍에 간 것도 그래서였다. 평소라면 거리가 멀어 귀찮다거나 낯가림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주저했을지 모를 모임. 머리 부분 부분을 노랗게 탈색한 사람, 화장을 한 사람, 맨얼굴인 사람, 안경 쓴 사람, 머리가 짧은 사람, 긴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직접 짠 것 같은 손 워머를 끼고 온 사람, 텀블러를 들고 온 사람, 자수가 새겨진 면 마스크를 쓴 사람이 넓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운영자분은 텀블러를 챙겨오지 못한 나에게 작은 컵을 내주었다. 컵에 따라준 두유 짜이는 아주 연해서 향신료에 거부감을 느끼던 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모두 비건 간식이에요.”
비건 쿠키와 건망고가 담긴 화려한 무늬의 접시가 내 앞에 놓였다.
입지 않는 니트 소매를 잘라 손 워머도 안대로 오리고, 절개면을 반박음질로 이어 붙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시작했는데 이내 내가 손이 매우 느린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참 오랜만에 해보는 손바느질이었다. 끝부분은 코바늘 뜨개로 마무리해야 했다. 참여자 중에는 뜨개질까지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바느질을 아예 처음 해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몇 년 전에 해봤던 기본 뜨개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코바늘을 손에 쥐고 보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강사분이 옆으로 와 방법을 알려주고 나서도 금세 잊어버려, 진도를 많이 나간 옆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아 똑같은 부분을 몇 번이나 다시 물어봤다. 그는 기꺼이 다정하게 알려주었다.
낯을 많이 가리지만 가끔은 일회성 만남에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다시 만나기 어려울 사이기에 오히려 편하게 말할 수 있다. 맘껏 친절할 수 있다. 만남의 순간만큼은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종종 이런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편협한 선입견이지만, 왠지 이곳에선 내가 쓰레기 배출을 가장 많이 할 것 같고 환경 문제든 동물권이든 내가 제일 둔감할 것 같다. 나보다 더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 매번 불편해하거나 죄책감 느끼고, 예민한 사람 취급받을까 걱정하고, 타협하거나 포기하고 싶어지고, 귀찮아지는 것이 지겨웠다. 그래서 나는 이런 모임을 찾아온 걸까? 유난스러운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을 찾아서?

환한 조명 아래 피로한 눈을 깜빡여 가며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다 문득 ‘나 바느질할 줄 아네?’ 하고 생각했다. 삐뚤빼뚤하고 굼떠도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새삼스레 뿌듯해졌다.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다. 손가락을 움직여서 천과 천을 실로 엮는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도 워머 두짝을 완성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한쪽만 끼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엄지 부분이 나오지 않게 슬쩍 가리고서,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건 우리끼리 비밀로 하고 꼭 다 완성시키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