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사상가]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주의와 한국에서의 수용 논의

생태주의가 사회운동이 되기 위한 이론적 계보는 무엇일까? 머레이 북친은 인간이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라고 믿으며 사회생태주의 이론을 정립한다. 이후 녹색당 창당에도 참여한다.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체제 전환을 요구하고 근본생태주의는 영성적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변화를 주장한다. 근본생태주의와 사회생태주의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으며, 둘 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다. 한국에서 민주화운동 이후 새만금 반대운동, 탈핵운동, 마을공동체운동 등의 경험을 쌓으며 사회생태운동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1. 한국에서의 사회생태주의 수용의 역사

해방 이후 사회생태주의의 등장은 민주화운동 이후에 맑스주의가 도입되면서부터 구체화되었다. 생태맑스주의의 경향은 90년대 말 이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생태주의는 반자본주의, 아나키즘, 생태맑스주의 등의 사회변혁운동과 에너지전환, 기후변화, 생물 종 다양성 등의 생태주의의 만남으로부터 구체화되었다. 이에 대한 핵심 키워드는 ‘사회적 관계와 배치’, ‘기술의 재전유’(친환경 기술사용).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 네트워크운동과 정보기술의 수용, 마이크로크레딧, 적녹연정, 반권위주의 운동, 반자본주의, 사회적 에코페미니즘 등을 망라할 수 있다. 90년대 초 한국에서는 사회생태주의자인 문순홍 박사의 노력으로 북친이 소개되고, 존 벨라미 포스터와 같은 생태맑스주의자들도 함께 소개되면서 수용되었다. 여기서는 문헌학적인 연구와 더불어 담론분석을 통해서 사회생태주의의 수용과정을 설명하려고 한다. 사회생태주의의 핵심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사회생태주의 핵심 키워드들.

한국에서의 사회생태운동의 역사는 성장주의/개발주의에 반대했던 새만금 반대운동으로부터 부안의 탈핵운동, 밀양의 송전탑반대운동, 강정의 평화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또한 2010년 초에 성미산 등을 필두로 한 도시에서의 마을공동체운동의 발흥은 사회생태주의의 전략인 친밀도가 높은 공동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와 배치를 바꾸려는 운동의 면모를 드러내보였다. 마을공동체운동의 발흥은 주거권운동, 공동체주택운동, 젠트리피케이션반대운동, 도시재생 제도 등으로 이어지면서 녹색전환의 도시를 실천하고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사회생태운동의 조류는 기후위에 대한 비상한 대응방법을 사회적 배치의 변화와 함께 체제전환으로 이루려는 방법론으로 향했다. 기후정의 비상행동, 기후정의동맹, 멸종반란 등 기후행동에 나선 대부분의 그룹들이 바로 사회생태주의와 생태맑스주의 등에 기반을 둔 연합체라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이 된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뿌리를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 보는 문화적 에코페미니즘을 넘어 사회적 에코페미니즘으로 급진화되면서 이행했다. 바로 가부장제, 권위주의, 남성중심주의, 폭력주의, 파시즘 등에 저항하는 에코페미니즘운동이 여성환경연대의 창립으로부터 구체화되었다. 에코페미니즘은, 권위, 차별, 배제, 분리 등에 저항하는 자연과 생명의 대리인으로서의 인간사회의 진보가 바로 여성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의 사회생태주의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먼저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근본생태주의 중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역편향으로 생명중심주의로 향했던 바가 오히려 인간에 대한 배제와 괄호치기로 향하는 환경파시즘이라는 극단주의 비판으로 향했다. 북친은 진보, 이성, 과학기술, 반국가주의, 반자본주의 등의 기존 진보주의적 전략을 사회생태주의에 다시 수용함으로써 근대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사회생태적 전략으로 향했다. 이러한 북친과 더불어 한국에 수입된 생태맑스주의의 대표주자가 존 벨라미 포스터인데, 그는 맑스에 대한 교류양식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자연의 한계와 자연과 인간의 메타볼리즘(Metabolism) 다시 말해서 신진대사에 따라 사회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생태맑스주의자들이 좌파맑스주의자와의 차이점을 갖는 부분은 바로 자원-부-에너지 등의 유한성에 입각한 진보노선을 그려낸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적색의 미래는 녹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을 사회생태주의는 보여준다. 즉, 1972년 로마클럽에서 발간한 『성장의 한계』를 기반으로 하는 진보사상인 셈이다. 이에 따라 무한한 발전과 성장에 기반한 진보노선이 아니라, 유한성으로서의 녹색의 한계태제 속에서 움직이는 적색 즉 적녹연정의 정치전략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특히 기술 매개적인 사회생태주의 담론의 수용은 뜨거운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사회생태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기술발전을 재전유할 수 있다는 관점에 있다. 이른바 친환경기술이나 녹색기술이 가능하는 것인데, 이는 적정수준으로 기술을 제어하고 인간의 통제권 하로 두겠다는 근세 초 도제조합의 전통에서 유래한 적정기술의 철학과 함께 기술매개적인 생태주의의 양 갈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두 갈래 기술에 대한 태도는 기술이 인간을 배제하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기술을 통제하고 제어해야 한다는 적정기술이라는 한 측면과, 기술의 발전에 생태, 생명, 자연, 인간의 가치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녹색기술이라는 다른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최근 공동체운동의 현대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 네트워크운동에 있어 기술의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와 배치, 이 속에서 발생되는 집단지성과 생태적 지혜에 대한 재전유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는 일관된 방향성이 형성되면서 기본소득운동과 조우하고 있다. 이는 오픈소스운동으로 알려진 정보공유운동과 해적당의 리퀴드민주주의 등은 기술체계가 만든 생태계 속에서 색다른 대안사회의 모색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적 지혜와 집단지성과 같이 기술혁신에 도움이 되는 생각의 경로와 사회질서, 집단지성 등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당과 기본소득을 주는 것이 첨단기술사회에서 더 적합하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사회생태주의 파트에서 기술매개적인 생태계가 구체화되는 현 시점에서의 기술 재전유와 적정기술 양측의 다양한 운동양상과 삶의 방식 등을 점검하고 지도제작하는 것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2. 북친의 사상적 전회와 역사적 배경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2006). 사회생태주의를 창안하고 사회주의운동에 생태주의를 도입한 사람이다. 인간해방과 사회변혁을 통한 생태주의의 가능성을 바라본 그는 세계적 지평에서의 인간해방운동을 강의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사진출처 : Luisa Michel

그렇다면 어떤 배경에서 북친이 근본생태주의를 환경파시즘으로 규정하였는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자. 미국 사회주의자이면서 생태주의자인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2006년 6월 30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한때 근본생태주의자들을 환경파시즘으로 간주하면서, 인간을 암적인 존재로 보거나, 인간이 없어진 지구는 깨끗할 것이라는 생각에 도전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사회생태주의’는 사회변혁과 생태문제를 연결해서 사고하는 사상이었다. 다시 말해서 생태문제를 일으킨 인간에게 사회변혁을 통해서 생태문제를 해결할 열쇠도 갖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는 철학과 생태 정치학에 중요한 논쟁의 지점을 제시하였다. 반자본주의자 북친은 1921년 뉴욕의 맨하탄에서 러시아 출신의 이민 2세대로 태어났다. 북친의 부모는 러시아 혁명에 동참했던 유태계 사회주의자들이었으며, 북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년 시절부터 그는 맑스주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였고, 청년이 되어 공장에서 일하면서 공산주의 조직에 가입하였으며, 산업별 조직의 조직 활동가가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전체주의화된 스탈린주의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가담하면서 급진적인 출판물 발간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감명을 받아 아나키즘의 성향의 조직에 가담한다. 그는 청년시절 동안에 주물공장과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면서 아나키즘 조직에 헌신하였고, 아나키스트 클로포트킨의 사상과 조우하면서, 50년대인 이 시기에 아나키즘이 주장한 생태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60년대 그는 자유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고, 환경문제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69년에 발간한 “맑스에 대해서 주의하라”라는 팸플릿에서 독재의 사상으로 돌변한 맑스주의가 아닌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꼬뮌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미 자신은 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대중들 앞에 공표하였다. 1971년 그는 사회적 생태주의 기구를 구축하면서 적극적으로 환경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정치적 급진주의를 통해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으며, 당시에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그는 독일 녹색당 창당에 깊이 관여를 하였고, 유럽에서의 녹색당 창당의 움직임에 대해서 지도하였다. 그는 1982년 『자유의 생태주의』라는 책을 통해 생태주의운동에 영향력을 미쳤고 각국의 생태주의운동에 대해서 실질적인 사상적 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책은 근대적인 인간중심주의적 사상이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도구적 합리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난 대안적 세계관인 근본생태주의가 유기체론적이고 전일적이며, 순환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위장된 기계론이나 위장된 환원주의일 수 있다고 비판한다. 또 다른 편향으로 인간을 암적 존재로 여길 에코파시즘으로 향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는 생태환경을 변혁할 수 있는 인간의 주체적인 체제전환의 능력을 무시하고 신비주의나 영성주의에 빠진 반합리주의적 근본생태주의는 또 다른 편향을 낳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과학기술을 대한 입장에 있어서도 환경파괴적인 기술이 아닌 친환경적인 기술이 적용될 수 있으며, 그것은 자본주의를 인류가 극복하는 적극적인 체제전환의 행동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편협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생태중심주의가 자칫 환경파시즘으로 향할 수 있다는 그의 지적은, 환경문제를 인간이 만들었듯이 그 문제의 해결에도 여전히 인간이 있으며, 인간에게 생태환경을 재구성할 수 있는 합리적 능력이 있고 그것은 사회변혁의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었다.

1999년 북친은 하나의 사상적 전기를 맞이한다. 자유주의적 아나키즘에서 코뮌주의로 사상적인 변화를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자치에 기반한 코뮌이라는 공동체의 새로운 양식에 대한 긍정하고 도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설적으로 탈근대의 시대에 철학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하여 변증법적 자연주의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능력을 통해서 자연과 유기적으로 종합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2000년대 탈근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휴머니즘과 계몽적 이성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사상적 지반이 취약해져 갔다. 그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가 문제라는 근본생태주의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창시하였고, 그것은 인간 중심의 생태주의 즉, 사회생태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주요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 3의 혁명』이라는 책을 발간하는데, 그것은 유럽과 미국에서의 혁명운동의 해방적 가능성을 다룬 책이었다. 그 책을 통해서 인간해방과 사회변혁을 통한 생태주의의 가능성을 바라본 그는 세계적 지평에서의 인간해방운동을 강의하면서 말년을 보냈으며, 2006년 심장발작으로 집에서 사망하기 전까지도 해방운동에 대한 강의를 계속 하였다.

3. 생태주의의 혼종적인 전개와 다시, 인간

“잡초의 생태학이 있는 것처럼 잘못된 사상의 생태학도 있다”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말처럼 근대의 사상에 기반한 지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인간이든 모두가 고통의 질서를 지나 치료의 수술대에 올라가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했던 인간의 풍요로운 삶은 매우 퇴행적인 근대적 도시위에서 살아가면서 위축되고, 경화되어 있고, 환경은 급속히 열악해지고 있다. 기후위기 상황에서 인간을 포기하고 비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인간에 대한 오만을 지적하면서도 스스로는 어떠한 기후행동과 사회적 실천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심각하게 문제가 될 여지가 다분하다. 여기서 우리는 지구는 무한한 약탈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고 아주 비좁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그것이 더욱 확정적인 이 시점에 지구라는 행성에서 실업자, 소수자, 주변인, 고독한 노인, 불안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최첨단 과학기술과 생명위기에 사로잡힌 생명체간의 공존을 만들어낼 것인가?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인간이 세계 그 자체(물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것(현상)만을 알 수 있다는 인식의 한계와 경계를 보여줌으로써 근대적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였다. 그 이래로 ‘인간’은 스스로의 외부를 인식할 수 없는 인간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외부에는 풀, 꽃, 새, 돌, 바다와 같은 자연이 있었고 그들은 인간에게 계속적인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었다. 인간은 그 자신의 외부에 있는 자연이 알려주는 신호에 대해서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재앙과 같은 기후위기와 환경의 역습에 인간이라는 철학적인 정체성마저도 문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기술의 고도성장은 수천발의 핵탄두가 저장되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수십 번도 더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능력을 인간이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환경의 악화로 멸종되어 가는 동물과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식물을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은 주지 못했다. 기술문명을 제거해야지만 자연환경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근본생태주의가 도래하게 되는 이유에 그것에 있다. 애초부터 생태환경을 자원, 원료나 대상으로 삼아 가공함으로써 본연의 질서를 파괴하도록 추출하고 채굴하고 약탈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환경파괴에 따른 인간의 절멸의 위협이라는 극단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근본생태주의의 도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기후위기에 대해서 행동하지 않는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대적 인간형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 외부와 소통하지 않고 유기체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잊은 채, 단기적인 이익에 눈먼 나머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파괴하려는 편협한 도구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 근대의 도구적 이성에 따르면 자연은 기계적 인과론에 따라서 움직이는 자동장치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늘 인간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간주되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 전부라는 오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며, 인간이 자연을 창조할 수 있다는 환상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의 창조적인 능력의 산물일 뿐이다.

나치의 파시즘은 인간의 내부에서 숨 쉬고 있는 자연의 능력을 동원하여, 다시 도구적 이성으로 돌아가게 한다. 인간 속에서 숨어 있는 욕망, 도취, 황홀경, 경탄 등의 자연의 능력을 선동하여 고취한 다음 파괴적인 전쟁의 수단과 전시경제의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도구적 이성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인간중심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파시즘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반파시즘의 사고가 인간을 개미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극단주의, 원리주의, 근본주의로 왜곡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환경파시즘으로 공격받은 것은 근본생태주의 사상의 원래의 발생학적 기원에 대한 무지와 유사 근본생태주의적인 사이비 지식인들의 논변에 해당한다.

지구는 무기체, 유기체, 기계로 구성된 복잡계이며 프랑스 녹색당 활동가인 가타리에 따르면, 근본생태주의는 마음생태, 사회생태주의는 사회생태, 환경관리주의는 자연생태의 다양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사회생태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사회변혁과 코뮌주의에 대한 요청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근본생태주의에 대해서 환경파시즘의 혐의를 두고 지적했던 사회생태주의가 서로 대립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생태주의는 신비주의로 경도된 근본생태주의의 종교화를 거부하고, 사회변혁의 현실적인 힘으로 바꾸고자 했던 점에서 매우 타당하며, 근본생태주의의 유기적인 발전의 하나의 중요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종차별적이고, 자연을 대상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는 반파시즘적인 의미를 넘어 인간이 그 문제의 해법이지, 인간을 혐오하는 것이 해법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환경파시즘이라는 논쟁적 개념과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동시에 근본생태주의는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운동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데 사회생태주의와 대립되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주의자들은 환경파시즘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여기서 근본생태주의와의 불교의 연기론이 통하는 측면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 연기론의 입장에서 생태주의를 재구성한다면, ‘관계성’, ‘순환성’, ‘전일성’으로 이루어진 유기적 세계관을 사고할 수 있다. 불교의 생태주의는 동, 식물, 생명체를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인간이 육화될 수 있는 윤회라는 차원에서 바라봄으로써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근본적으로 사유한다. 윤회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미물로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며, 보다 근원적인 생명사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불교에서 인간은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선택받고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중심주의는 기각된다. 선불교에서는 인간이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극복될 수 있는 영적인 성숙과 초월의 가능성을 수련과 득도의 과정으로 본다. 선불교의 입장도 인간이 자연만물의 감성적 기반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라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뿐, 동일한 속성을 타고난다고 바라본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전반적으로 동물과 식물 등의 자연을 수단과 대상으로 보거나,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과 순환성의 차원에서 영성적 존재의 의미로 본다고 할 수 있다.

4. 사회생태주의는 인간해방의 코뮌주의

그런 점에서 근본생태주의의 유기체론의 입장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근대인들이 자연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으로 보았다. 즉, 인간의 행위가 자연 파괴적일지라도 자연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복구되므로 고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그것이다. 그런 근대적 사유체계 내에서 인간은 자연을 급속하게 파괴하였고, 인간사회를 위협할 수준에 이른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그것의 수준은 인간이 예상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브라질 열대우림의 파괴와 온난화에 따른 이상기후, 수질, 토양오염과 화석에너지 고갈에 따른 전쟁 등 재난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자연은 매우 연약하고, 쉽게 파괴되며 회복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생태에 대한 고민 없이 무조건적인 성장과 개발의 논리로는 인간 자신마저도 절멸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인 사유가 탈근대 사회의 개막을 앞두고 제기되었으며, 인간의 행위에는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고려한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근본생태주의는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하였다는 데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근본생태주의자의 독특한 철학자인 펠릭스 가따리가 세 가지 생태학으로 제기한 마음생태, 사회생태, 자연생태는 서로 대립된다기보다는 상호보충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생태는 근본생태주의에 따라 영성적 차원에서의 마음의 생태학적 지도를 만드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생태는 인간해방의 차원과 인간사회의 재 구성력에 기반 한 사회생태주의의 지도라고 할 수 있고, 자연생태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일반의 신진대사와 관련된 환경관리주의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북친은 사회생태를 강조하면서 마을생태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근본생태주의에 대해서 환경파시즘에 경도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자연생태와 사회생태, 마음생태는 서로 대립된다기보다는 하나의 본성에 대한 세 가지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을 파괴하고, 대상화시키는 도구적 이성은 당연히도 사회생태 내부에서 사회적 소수자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하고 수단화시키려 들 것이 분명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마음생태를 위협하는 교육을 시키려 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친의 지적은 하나의 극단주의에 대한 우려로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근본생태주의자들에 대한 정확한 비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근본생태주의의 영성은 어떤 삶의 태도일까? 꽃과 별과 나무와 짐승의 생태적인 영토는 영성적 의미에서 다가오는 측면이 있으며,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가 합리적 방식이 아니라, 영성적 차원에서의 교류양식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과학적 합리성과 다른 형태의 교류양식이 될 것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라는 자연생명체와의 교류가,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영성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물들과 정을 주고받는 것은 영성적 차원으로 인간의 심성을 고무시킨다. 마찬가지로 숲에서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곤충생태계를 연구하는 사람, 바다의 심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연과의 교류가 단순한 합리성의 차원을 넘어선 영적 차원의 소통양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반합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합리성이냐 혹은 반합리성이냐 라는 차원으로 인식의 차원을 단순화하는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근대 합리주의가 수행한 적극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한계가 분명해진 상황에서 다시 중세정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탈근대의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한 측면에서 영성적 세계관과 인식론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친은 체제전환으로서의 반자본주의를 중요시한다. 북친이 언급하였듯이 반자본주의운동에 있어서 생태주의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사회와 지구를 파국으로 이끌지 않는 능력이 바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신념에 기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증대적인 맹목적 성장의 힘을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파국으로 향한 비관론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반자본주의적인 사회변혁으로 향할 것인가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생태주의는 비관론적 종말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종말로 치달아가는 현실의 운동에 개입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저항세력으로 머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현실적 대안사회를 보여주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꿈과 이상으로 비추어지는 미래적 전망을 바로 지금 만들어내고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며, 대안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5. 근본생태주의의 전개와 발전, 그리고 사회생태주의와의 조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도 이미 권리의 주체이며, 미래세대가 누려야 할 행복을 파괴할 권리를 누구도 갖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4차 탈핵희망버스.
사진출처 : Energy Justice Actions

근본생태주의에 가장 획기적인 운동이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이었다. 서울에서 경주에 이르는 고속철도를 통해 더 빠른 이동을 하기 위해서 천성산을 파괴해야 한다는 인간의 편리에 기반한 생각이 사실상 개발주의와 성장주의에서 계속 진행되어 온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너무나도 빠른 속도중심주의적인 경쟁적 환경은 느림에 기반하여 꽃피고 있는 자연의 회복능력을 압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연환경을 파괴할 권리를 누구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나 시장이 그것을 결정할 수 없으며, 말 못 하는 생명체의 권리를 인간이 위임받을 수 있고, 대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생명권은 인권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생명권의 입장에서는 말 못 하는 꽃이나 도롱뇽, 개구리, 나비도 권리를 가진 주체이며, 그것을 파괴할 권리는 누구도 갖지 못한다. 생명권의 입장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도 이미 권리의 주체이며, 미래세대가 누려야 할 행복을 파괴할 권리를 누구도 갖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은 근대의 성장주의와 개발주의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하는 근본생태주의의 심원한 행동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가이아이론은 지구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본다. 그러므로 가이아 지구가 파괴되면 인간도 살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의 전일적 세계관은 모든 문제를 하나의 것으로 환원하려는 환원론과는 다른 지평일 수 있다. 물론 사회생태주의는 복잡 다양한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전일적 세계관의 측면에서 보려는 것을 환원주의라고 비판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근본생태주의가 자연의 다양한 표현으로서 다양체의 생성의 가능성을 배제한 전일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상당히 빗나간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근본생태주의의 전일적 세계관이 다양성과 차이의 생성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적 세계관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근본생태주의의 전일적 세계관은 지구라는 행성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쓰레기를 재활용하거나, 냉ㆍ난방기를 틀거나, 자동차를 운행하는 등의 사소한 행위에도 지구 행성은 늘 전일적으로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곳곳에는 파시즘의 선동으로 가득하다. 파시즘의 선동은 대중에게 내재된 충동적 본성 – 학자에 따라 동물적 본성이라고도 한다- 을 동원하고, 고취하고, 경탄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나 그 충동적 본성은 곧 위대한 독일민족을 위한 수단이 되며, 충동적으로 고취된 대중은 전쟁의 도구이자, 경제의 수단으로 규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대중의 충동적 본성을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중심주의적인 도구적 합리성을 도모하고자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근대이성의 최종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매우 비합리적인 체제라기보다는 합리성이 고도로 고취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시즘이 대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자연 상태의 충동적 본성을 이용한다고 해서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파시즘이 도달하고자 한 궁극의 본질에 대해서 간과하는 것이다. 파시즘은 자연성을 발견하면서도 그 자연성을 권력의 수단으로 철저히 포섭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파시즘은 어느 시스템보다 인간 중심적이며, 자본주의적인 도구적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에서도 유사파시즘 상황에 도달했던 황우석 사태와 같은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과학기술에 대해서 객관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과학의 가치중립성론의 입장에서, 인간사회와 무관한 진보적인 발전으로 바라보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에는 가치론이 도입되어야 하며, 생태파괴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과학이 퇴출되고, 생태친화적인 과학만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므로 연구디자인의 시점에서 가치론은 도입되어야 하며, 이것이 생명윤리나 생태적인 의미에서 좋은지 바쁜지에 대한 가치론의 입장에서의 선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진보의 원동력이 아니며, 사회적 윤리와 가치에 의해서 연구디자인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술주의적 파시즘으로서의 생명공학의 유전자조작은 유전자코드가 형성되기까지의 환경 생태적 요인이라는 결정적 요인들을 단순화시켜 실험실의 진공관 속에서 이것을 조작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구환경이 조성한 외적 조건은 생명체의 유전자 속으로 각인되어 그것의 변형을 만들어내는 진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조건의 결정요인을 배제한 진공상태의 변조는 생명의 원리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실험실 밖으로 나올 경우 순환적인 자연환경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 환경이라는 생명의 외부조건은 생명의 내적조건과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생명윤리는 환경윤리와 내포와 외연의 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장제일주의로서의 파시즘 역시도 사회를 병들게 한다. 경제성장은 자연물과 에너지 등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재생 불가능한 자원으로 그것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순환적 자연환경에서 앤트로피를 증가시켜 지구의 에너지의 사용을 팽창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근본생태주의가 가장 성장주의적인 근대의 패러다임을 문제시 하는 것은 욕망을 증폭시킴으로써 주변 환경을 파멸적인 상황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일만 년 된 산을 단 몇 년 만에 개발하면서 파괴하는 것은 산과 숲이 갖고 있는 순환적 의미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한한 지구환경에 대해서 무한한 개발과 성장의 욕망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구는 매우 좁고, 자연은 유한하며, 정복하거나 약탈할 자원은 한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구환경의 순환의 모델은 엔트로피를 극소화하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의 이용을 확장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이러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한국사회는 생태계위기, 생명위기, 기후위기 등에 직면해 있다. 기후붕괴로 향하는 폭염, 물부족, 생물 종 대량멸종 등 이상기후로의 변화의 원인은 온실가스 배출에 있다. 이러한 이상기후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사용이나 온실가스를 방출하는 에너지원에 대한 전환이 필요하며, 그렇게 만드는 삶의 양식의 변화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에너지를 낭비하면 동시에 에너지가 순환되지 못하고, 그것이 열역학 2법칙의 에너지 즉,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변모하여 지구생태의 온도를 높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북극의 빙설이 급속히 녹는다거나, 알프스고원의 빙하가 녹는다거나 하는 이유도 온실가스의 방출로 인한 이상기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업과 국가의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더불어 대중들의 에너지를 줄이고,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는 삶의 형태가 요구되는 것이다.

*더 읽어야 할 책

  • 『사회생태론의 철학』(솔, 머레이 북친)
  •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민음사, 머레이 북친)
  • 『휴머니즘의 옹호』(민음사, 머레이 북친)
  • 『생명학』(화남, 김지하)
  • 『환경윤리』(자작, J. R . 데자르뎅)
  • 『현대 생태사상의 이해』(따님, 송명규)
  • 『지율, 숲에서 나오다』(숲, 지율스님)
  • 『가이아』 (갈라파고스, 제임스 러블록)

이 글은 신승철의 첫 저작 『에코소피』(2007, 솔)에 수록된 내용을 수정한 글이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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