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먼저 “이 작품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이 작품이 가능해지기 위해 어떤 존재가 사라졌는가”를 묻게 되는 순간입니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상어 작품은 흔히 죽음에 대한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제목이 말하듯 살아 있는 인간은 자기 죽음을 완전히 상상할 수 없고 죽음이 눈앞에 놓여 있어도 그것을 끝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으로 설명됩니다.
저는 그 해석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묻게 됩니다. 그 죽음은 누구의 죽음으로 사유되고 있는가. 상어는 자기 삶을 가졌던 생명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면 인간이 자기 죽음을 상상하기 위해 빌려온 이미지로만 남는가.
동물이 예술의 재료가 될 때 그 동물은 너무 쉽게 ‘작품’이라는 말 안으로 들어갑니다. 몸은 형식이 되고 죽음은 개념이 되며 생명은 작가의 메시지를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살아 있었던 존재의 죽음을 작품의 효과로 바꾸는 일이 정말 예술의 자유로 설명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예술은 불편한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폭력과 죽음, 잔혹함을 다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폭력을 비판적으로 재현하는 것과 실제 죽음에 기대어 작품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예술과 죽음을 재료로 삼는 예술은 같지 않습니다. 이 차이가 지워질 때 미술관은 고통을 사유하는 장소가 아니라 고통을 세련된 이미지로 소비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기를 먹으면서 왜 상어의 죽음을 말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먹는 행위 역시 윤리적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동물의 죽음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책임지는가입니다. 문제는 동물과 아무 관계도 맺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을 상품, 재료, 이미지, 충격 효과로만 환원하는 관계를 계속 반복해도 되는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상어가 우리에게 어떤 관계를 열어주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상어라는 비인간 존재와 윤리적 관계를 맺게 하는가. 아니면 상어의 죽음을 인간의 공포와 미술관의 스펙터클을 위해 소비하게 하는가. 작품이 죽음을 말하면서도 그 생명의 존엄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한 작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술관이 무엇을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질문하지 않은 채 전시하는가입니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이름은 가볍지 않습니다. 국립이라는 말에는 공적인 승인과 책임이 있고 현대미술이라는 말에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새롭게 감각하고 다시 물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침묵 행진과 헌화는 단순한 반대의 표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작품 뒤에 가려진 생명을 다시 보이게 하는 일입니다.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사라졌던 몸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미술관이 생명의 죽음을 개념과 형식 뒤에 숨기지 말라고 요구하는 일입니다.
저는 예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술은 더 엄격하게 질문받아야 합니다. 예술이 우리의 감각을 넓히는 일이라면 그 감각은 인간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습니다. 작품만 보지 않겠습니다. 작품 뒤에 있었던 생명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죽음을 애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예술이 더 이상 아무 질문 없이 미술관 안에 놓이지 않기를 요구하겠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죽임이 승화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비인간 동물들의 생명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하고, 그누구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