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분열을 조장한 윤석열 정부
작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며 내세운 공식적 명분은 “정부 정책에 발목을 잡고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종북·반국가 세력을 척결하여 대한민국을 지키고 자유헌정질서를 수호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임기 중 한 번도 생각이 다른 야당 지도자들을 만나 제대로 설득하거나 조정하고 타협하려는 노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야당을 반국가 종북주사파 세력으로 몰아 척결해야 할 정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
상대를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며 뒤집어씌우는 이런 프레임은 근현대사 독재 권력들이 항상 써먹었던 그 고루한 “종북 세력” 타령의 재탕이었다. 과거 독재 권력들이 노조와 소수의 운동 세력들에게 적용했던 이 극단적 프레임을 윤석열 정부는 국민이 투표로 선택한 거대 야당에게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그 바람에 정치적 전선이 확대되어 오히려 스스로 무덤을 파서 파탄을 자초하고 말았다.
윤석열 정부 3년 내내 국민들은 광화문과 시청, 여의도와 서초동으로 분할되어, 한쪽에서는 윤석열 반대 시위를, 다른 한쪽에서는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윤석열 지지 시위를 벌이며 서로 극단적 대립을 이어갔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는 국민을 통합시키기는커녕 존재하지도 않는 “종북 좌파”라는 허상을 만들어내 상대방을 매도하고 국민을 둘로 나누어 서로 적대하도록 만들었다.
나눌 수 없는 세계를 가르고 나누어온 근대의 오류
이분법적 사고의 특징은 명징하고 분명함을 최대 장점으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흑과 백으로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한 선명한 기준은 자신의 행동에 절대성을 부여하며, 악을 징치하기 위한 선한 행위이자 부정의를 척결하는 정의로운 일이라는 명분을 제공한다.

이런 이분법의 연원을 따져 보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본질인 이데아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현실로 나누는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A와 비(非)A를 가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기독교의 절대선악론, 구원과 타락, 천국과 지옥으로 가르고 나누어온 서구 사상이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로 구분하는 인식론이 더해졌고, 우주를 물질 기계로 생각하여 나누고 쪼개어 근본 입자들의 조립품으로 바라본 근대 과학의 분석적 사고가 이를 더욱 공고히 했다.
여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사회적으로 해석한 허버트 스펜서였다. 그는 인간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약육강식, 생존경쟁, 적자생존하는 것이 순리라는 사회진화론을 발표하며 근대 사회의 경쟁과 지배, 정복의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합리화했다. 이렇게 분리와 구분을 바탕으로 자연생태계의 경쟁과 인간 사이의 경쟁 구조를 당연시해온 것이 바로 오늘날 생태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근대 인식론의 정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생태학 연구 결과들은 정반대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자연에서는 경쟁보다 상호의존과 보완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서로 협력하는 종들이 생태계에서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상관없는 세계‘에서 ‘상관있는 세계‘로의 인식 전환
근대 사회는 이처럼 자연과 사회를 가르고 나누고 쪼개어 인식해왔다. 경쟁과 대립은 서로 나뉘어 구분되어 있어야만 가능하고 효과적이 된다. 근대의 무한성장주의는 경쟁에서 이기는 일, 승리하는 것만을 주된 관심사로 삼는다. 나의 성공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실패를 전제로 해야 하고, 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패배가 필연적이다.
경쟁과 대립의 논리는 결국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내부’와 ‘외부’, 그리고 가장 극명하게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그어왔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인식론적 도구를 넘어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질서를 구축하는 근본 원리로 작용해 왔다. 그래서 경쟁사회는 승리와 패배, 이기고 지는 삶의 전투화를 근본 토대로 삼는다. 전투력을 강화시키고 내부를 강력하게 단결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악마화할수록 더욱 효율적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패배한 이들의 고통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든 말든, 자연생태계가 멸종 위기에 처하든 말든, 극지방의 빙산이 녹아내리든 말든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나와 너를 철저히 구분하고, 자연과 미래 세대의 복지는 나와 “상관없고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근대 사회의 근본 인식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무, 산, 새, 짐승, 곤충 등 비인간 존재들, 그리고 미래 세대와의 연결성과 관계성은 무시된 채, 오로지 시간적으로는 “현재”에, 생물종으로는 오직 “인간”종의 이익만을 위해 무한히 자원을 채굴하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에만 몰두해왔다. 자원은 무한한 것으로 착각하며, 미래 세대가 써야 할 자원은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무한자원주의, 무한성장주의, 대량채굴주의가 바로 이런 구분과 분절적 인식이 귀결되는 위기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
가르고 나누어온 이분법은 관념이 만든 허상일 뿐
“상관없고 관계없다”는 근대의 분절적 사고야말로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원인적 사고다. 위기 앞에서 인류가 깨달은 너무도 분명하고 단순한 진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관계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서로 연결된 자연계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보완적이며 서로 협력적인 관계”라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인간이 세계를 둘로 구분하고 나눠온 것은 경쟁과 대립, 이기적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적 욕망의 확대를 위한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다. 관계되고 연결된 세계에서 너의 고통은 곧 나와 연결되어 나의 고통이 된다. 아마존의 열대우림 파괴와 아프리카의 사막화로 사헬 지대가 넓어지는 것도 결국 나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는 일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과 관련되는 일이며, 수많은 동식물의 멸종과 바다 생물의 4분의 1이 서식하는 산호초 지대가 하얗게 백화되어 죽어가는 일은 곧 인간 삶의 죽음을 초래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연관된 세계 속에서 누군가의 고통은 나의 삶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끼리의 경쟁에서 누군가를 패배시켜 승리한다 해도, 결국 경쟁 시스템 속에서 자신 역시 수많은 패배와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많은 패배와 좌절이 누적되고 그 약한 고리에 수많은 죽음들이 모여든다. 생물종이 멸종하고 자연이 오염되며 인간의 우울증과 자살이 급증하는 죽임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김지하 시인이 말한 “죽임의 문화”이고, 루이스 멈포드가 지적한 “자기 파괴적 메가머신”의 현실이다.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이분법으로 나눈 두 가지는 결코 수평적으로 대등하지 않다. 이분법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자신이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려는 폭력적 질서를 구축한다. 백과 흑, 선과 악, 참과 거짓, 대승과 소승 등을 구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백이고 선이며, 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상대를 악으로, 거짓으로, 소승으로 규정한다. 구분하고 나누는 주장은 결국 자기중심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며, 위계적 질서를 강화하고, 적으로 규정된 상대를 배제하고 차별하며 심지어는 처단하고 척결하는 대상으로 규정한다.
적과 아군의 분리가 명확한 전투 상황일수록 갈라지는 경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갈등이 첨예할수록 중간의 완충지대는 사라지고, 극단적 주장이 영웅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중간적 입장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지고,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급격히 줄어든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는 100% 순수한 흑과 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진하고 옅은 명도의 차이가 있는 회색 톤 중 어디에 존재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흑과 백의 양극단이 아니라 중간이나 중도를 말하기도 하지만, 결국 무채색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 세계는 흑백이 아니다. 컬러다. 흑과 백의 선상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꽃들이 만발한 입체적인 꽃밭이다. 이분법은 가르고 구분하며 100% 순백의 순혈주의를 강조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논리다. 어떤 사람이 70-80%의 정의로운 일을 해왔다 해도 20-30%의 부정의한 면이 발견되면 정의로운 70-80%는 모두 부정되고 20-30%가 전면화하여 부정의한 사람으로 매도된다. 가르고 나누어온 이분법은 경쟁의 논리이며 배제의 논리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척결해야 할 존재로 본다.
생태위기의 극복은 인식론적으로 이분법의 극복이자 다양성을 소중한 가치로 인식하는 것이다. 다양성의 인식에서 세계는 절대적 구분과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이나 집단도 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중적이 아니라 다중적임을 받아들이는 것, 사람과 세상이 흑백으로 단순화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며, 고립된 개체나 이기적 개인이 아니라 연결된 관계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양성의 가치관은 순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천사나 악마는 존재하지 않고, 적당한 선함과 악함이 함께 공존한다고 여긴다. 나아가 선과 악은 상황 속에 존재할 뿐이지 절대적이지 않다고 본다. 30%의 잘못이 발견되어도 그것을 100%로 전면화하여 악마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단지 문제되는 30%만을 문제 삼을 뿐이다. 부분적인 오류를 부분으로 볼 뿐 전체로 단정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원활한 다양한 비판과 논쟁, 토론이 가능해진다. 이분법에서는 부분적 비판도 상대를 전면배제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진정한 비판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대안 사회의 창조를 위해서는 다양성의 사고가 필수
다양성의 관점에서 개인과 세상은 상호 연결된 연속체로 바라보며, 보이는 결과보다는 전후 맥락적 상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비위계적이고 탈중심적인 사고로 연결된다. 사람과 세계에 대한 복잡함과 내부의 다양함, 그리고 혼종성을 자연스럽게 인정한다.

사진출처 : Alexander Grey
이분법적 사고는 누가 적인가를 명확히 규정하고 전선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그래서 적을 타도하기 위해 우리팀의 적개심을 고취하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투쟁의 목표에 따라 규정된 적을 물리력으로 제압하여 승리하지만, 결국 상대의 저항 의지까지 완전히 꺾지 않는 한, 내가 약화되거나 상대가 강해질 때 복권을 시도하거나 보복을 시도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싸움은 끝없이 계속된다.
다양성의 관점은 전략적 목표를 서로 다투는 이해관계보다 한층 높은 차원에 설정하는 것이다. 나와 적이 동일한 평면에서 겨루는 것이 아니라, 상대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전투의 최고 이상이라면, 적에게 저항 의지를 생성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적을 규정하여 자기 세력의 연대를 꾀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대안 사회운동은 전선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투쟁보다는 연대와 연결에 집중하는 것이다. 대립보다는 일치를 우선하는 것, 상대와의 투쟁에 전념하고 승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승리와 이익은 연대의 자연스러운 부산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