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것의 미학] ① 생태-미학과 몸-모음

‘생태미학과 생태미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탐색하기 위해 기획된 이 연재는, 생태미학과 생태미술의 개념 정립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기후위기에 대한 지적과 코로나19 팬데믹 등의 상황 속에서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생태’와 ‘생명’ 관련 논의가 활발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학과 예술 영역 역시 대안 담론과 활동을 마련하고 있다. 본 연재는 그간 우리가 지녀온 것에 대한 성찰의 취지를 강조하면서, 특히 국내 생태미학과 생태미술의 주요 계기와 활동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기후와 생태 문제는 국경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뚜렷하게 직시하고 실제 할 수 있는 일들을 도모해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언가를 ‘알고자’ 하기보다는 ‘하고자’ 할 때이다. 또 무언가를 단지 ‘하고자’ 하기보다는 그야말로 그것을 ‘할’ 때이다.

생태미학의 곤궁함

재난 상황이나 인류가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를 만났을 때, 게으르지 않은 학문이라면 해당 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 의미, 해결 방법을 모색해 보기 마련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 역시 개별 학문으로서는 반드시 풀어가야 할 시대적 난제 중 하나(어쩌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학문 스스로 아무리 게으르지 않으려 해도 학문 자체의 ‘뒤따라가는’ 본성과 ‘말(만) 잘하는’ 본성으로 인해 사후약방문의 성격을 벗어나기 어렵다. 쉽게 말해 일이 다 터지고 난 뒤에 간신히 수습하는 정도이거나 허울 좋은 말잔치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미학의 경우 상황이 더욱 좋지 않다. 법과 정치, 경제, 과학 등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소위 ‘주요’ 지식 영역에서 미학의 영토는 거의 보이지 않거나 주변으로 밀려나 있다. 미학 스스로 학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 왔는지 성찰해야 할 지점이긴 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욕망하는 바가 그대로 드러나는 국면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미학을 갈급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나마 미학을 찾는 이라면 – ‘아름다운 학문’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 때문인지 – 정신적인 안락이나 위안, 혹은 어떻게든 상황을 미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미학 스스로도 그 이상의 욕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려운 말들을 여럿 동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설사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어떤) 시원의 세계를 상기시키는 일, 혹은 인간의 경험과 감각을 (가능하다면 예술을 통해) ‘보다 미적으로’ 승화시키길 요구하는 일로 정리되는 것이다. 일종의 ‘환상 만들기’, 혹은 잘해야 ‘환경 미화’ 정도의 작업이라 하겠다(이 말이 환경 미화 활동을 폄훼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잘 알 것이다).

“‘아름다운 학문’을 ‘생태’라는 생명력 넘치는 말이 꾸며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말을 찾기 어렵다.” by Gaston Roulstone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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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학문’을 ‘생태’라는 생명력 넘치는 말이 꾸며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말을 찾기 어렵다.”
사진 출처 : Gaston Roulstone

미학에 덧붙여 ‘생태-미학’의 경우는 환상과 미화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킨다. ‘아름다운 학문’을 ‘생태’라는 생명력 넘치는 말이 꾸며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말을 찾기 어렵다. 흐름을 보자면, 미학 내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집중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생태적 담론은 일반적으로 서구의 근대 낭만주의 사상에서 그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일원론적 사상에 근거한 이들 사상의 주요 포인트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말고 양자의 ‘연결’과 그러한 연결 자체로서 생의 자유로운 ‘운동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생명’, ‘호흡’, ‘리듬’ 등의 ‘낭만적’ 표현은 현대 물리학의 언어와 만나 ‘합리적’으로 설명되기까지 하는 ‘느낌’을 준다. 생태-미학의 언어들은 아름답고 심오하고 또한 중요하다. 우리의 미감과 앎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지?

행위생산

다소 장황하고 냉소적으로 서술하였지만, 이는 미학 및 생태-미학의 학문적 활동을 부정하거나 평가 절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앎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위해, 나아가 그 필요한 일을 행하기 위해 미학 내의 특수한 상황을 던져 본 것이다. 이는 미학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 학문 일반이 걸어온 길의 방향과 그 특성을 다시 살피는 일과도 관련된다. 가히 인간의 본성이라 일컬어진 앎에의 욕구는 인류 문명 발달의 근원적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전보다 섬세하게 개별 학문 간 분화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인류는 현대 문명의 ‘찬란한’ 이기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앎과 지식 생산의 역사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앎 내지 지식 생산으로서 인류의 역사를 좋게 볼 수만은 없다. 유사 이래 가장 풍족하고 편리한 삶이 도래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식에 의한 것이지만, 지식 생산이라는 활동 자체에 내재된 소유와 지배에의 욕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앎, 지식이란 결국 대상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해당 사물의 속성을 인간의 정신으로 ‘점유’하는 활동을 말한다. 자신이 대상을 소유했다는 느낌이 들면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곧장 혹은 은밀하게) 뒤따른다. 인류 역사는 인간이 인간 아닌 것들을 자신으로부터 애써 분리시킨 뒤, 그것을 자기 소유물로 등록하고 지배해 온 역사에 다름 아니다.

학문 안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분리-소유-지배에의 욕망’이 노골적인지 아니면 살짝 가리는 정도인지 차이가 있을 뿐 과학과 인문학 모두 이러한 근대의 지식 체계 내에서 작동한다. 학문 자신은 스스로 새로운 욕망을 품을 수 있을까? ‘분리-소유-지배’가 아니라 ‘비분리-비소유-비지배’의 운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러한 운동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앎’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리가 아닌, 소유가 아닌, 지배가 아닌 방식으로의 전환을 위해 어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기존 지식 생산의 쳇바퀴 돌리기를 잠시 멈추도록 하자. 요구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사실 지식은 차고 넘친다.) 지식-생산이 아닌, ‘행위-생산’이란 말이 가능할까? 앎에서 함으로의 전격적인 전환이 가능할까?

만들기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을 제대로 실행해야 할 때가 왔다(사실 지금만이 아니라 훨씬 그 전부터 와 있었지만). 생태-미학 역시 무엇인가를 계속 알고자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가 말했던 바를 하고자 해야 하고 또 실행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너무 멀리 돌아왔다.)

“미학은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사물 및 동물’ 등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by Elisa Kennemer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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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은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사물 및 동물’ 등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진 출처 : Elisa Kennemer

단적으로 말하자면 ‘몸-만들기’이다. 물론 ‘몸짱’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미학은 몸-학문이라는 점에서 이미 생명과 직결된 학문이다. 비록 특유의 관념성으로 인해 미학 스스로 (몸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몸을 방치해 온 역사가 길지만, 미학은 인간의 감성 영역 일체, 예컨대 감각 기관을 통한 외부 사물의 수용 및 그로 인한 내적 운동 전반(느낌, 감정, 정서, 분위기, 기분, 정동 등)에 관련된 학문이다. 경험적 사물과 감관을 기초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미학은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사물 및 동물’ 등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간 실질적인 연결이 아니라 주객 관계 내 대립항으로 인간 자신 및 비인간 몸체들을 사상시켜서 문제이지, 미학 자체의 방향성은 몸을 지닌 개체들의 삶 전반을 살피는 일로 정리될 수 있다.

미학 본연의 의미를 살리는 맥락에서 생태-미학의 작업은 미학의 몸 만들기/살피기 운동을 보다 섬세하게 하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실상 우리 몸의 배치는 인간 종의 오랜 욕망과 의지, 충동의 역사를 담고 있다. 눈은 보고자 하고 혀는 맛보고자 한다. 몸을 살핀다는 것은 개인 단위만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종적 차원에서 행해진 우리 몸의 욕망과 의지 작용을 살피는 일이다. 몸은 무엇을 보고자 하고 무엇을 맛보고자 하는가? 개별 욕망과 의지가 모여 형성된 사회·문화적 에토스는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자 하는가?

자본이라는 대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근대 이후 더욱 강화된 분리-지배-소유 욕망이 자본이라는 형태로 극단화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생태-미학의 섬세한 몸 만들기/살피기 작업이 요구된다면, 이는 개인 차원만이 아니라 집단 차원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본 지향성의 욕망 운동을 변화시키는 일로 수렴된다. 자본의 운동은 현대 기술 문명의 가속성과 원격성으로 인해 전에 없이 빠르게, 또한 결코 쉬는 법이 없이 진행된다. 자본 지향성의 욕망 운동은 자본-운동의 속도와 거리감을 그대로 모방한다. 이러한 욕망 운동이 좋다고 한다면 새로운 운동성을 고안하는데 굳이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자본의 역능에 우리 몸의 힘과 시간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형태의 운동성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생태-미학의 출발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몸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몸-모음

“몸은 시간에 따라 변화 생성이 일어나는 운동-장場이다.” by Ahmad Odeh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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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시간에 따라 변화 생성이 일어나는 운동-장場이다.”
사진 출처 : Ahmad Odeh

개인의 몸-만들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공동-체(보다 좋은 표현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만들기로 기획이 확장될 때 미학은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동-체, 집단을 형성할 것인가? 근대 이후 사회 내지 인간 중심의 집단 형성을 위한 원리는 일종의 약속 체계로 제시된다. 그러한 체계로 ‘법’이라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데, 법의 영역에 어떠한 개체들을 어떠한 위상으로 등록시킬 것인가에 따라 사회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이 형성된다. 문제는 그간 인간 사회 내에 미처 등록되지 못한 개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브뤼노 라투르 참조). 이 개체들은 실상 인간 사회의 필수 구성원들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인간을 ‘위한’ 수단이나 사용 도구들로, 그것도 아니면 아무 이름도 없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인간과 법이 그들을 언어로 구성해낸다고 하지만, 우리 인간과 사회를 실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비인간 사물’들이다. 인간은 자기 욕망의 한계 내에서만, 또 그런 용도로만 사물들을 법에 등록시키고, 그에 해당하지 않은 사물들은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없는 것으로 치부하였다.

몸-만들기/살피기 기획으로서 생태-미학의 작업이 인간과 비인간 몸-모음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제안은 브뤼노 라투르의 ‘물정치(Dingpolitik)’1 개념을 통해서 이미 제안된 바가 있다. 근대의 주객 이분화 시도에서 벗어나 존재론적 평등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 새로운 동맹 맺기를 강조하는 라투르의 사유는 우리의 몸-모음 운동에도 영감을 준다. 그러나 역시 우리에게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몸은 단순한 연장적 실체가 아니다. 몸은 시간에 따라 변화 생성이 일어나는 운동-장場이다. 시간적 운동-체로서 다양한 (그동안 미처 있는지도 몰랐던) 몸들을 공공의 장으로 모아 볼 수 있을까? 그것도 지금껏 해오던 대로 하나의 지붕 아래 모아두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또한 이들 몸-모음을 법적인 위상으로 등록시켜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등록이 미처 등록되지 못한 사물들의 배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나아가 법적 등록 외에 공동체의 또 다른 구성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전 다양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부터 시작해본다.

※다음 편에 계속….


  1. 라투르는 ‘주체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주체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인류의 실질적인 역사는 ‘텍스트나 언어가 아닌 침묵으로, 펌프들, 돌들, 조각상들과 같은 적나라한 잔류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브루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211면 참조) 그의 ‘물정치’는 사물들의 역사로 사회 공동체를 재구성하자는 그의 철학적 기획을 구체화한 정치 실험 모델이다.

임지연

미학의 집 소장. 미학 전공. 셸링(F.W.J. Schelling)의 예술론과 시간론 연구를 시작으로, 말로든 몸으로든 ‘살아있다는 사실’의 증거들을 ‘모으고-뿌리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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