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것의 미학] ② 아름다움과 물구나무 서기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은 자연을 지식이나 유용성을 생산할 수단으로 보지 말고 하나의 미적 대상, 즉 아름다움과 숭고의 이념 하에서 경험하도록 권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적 태도가 단지 말과 앎의 차원에서만 작동한다면 이는 기존 자연관을 그대로 반복하는 일에 불과하다.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은 ‘앎’이 아닌 ‘함’ 차원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자연에 대한 미적 태도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개념이 자연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인식 주체의 대립항으로서 객체로 취급되거나, 법칙을 부여하는 이성의 힘을 통해 여하한 유용성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수단 내지 도구로 인식된다. 자연에 관한 지식의 생산과 그에 기초한 문명 발달은 현대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양식을 가능케 했다. 이에 반해 생태 관련 사상과 그 실천들은 근대 이후 가속화된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인식 대상과 생산 수단으로만 간주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방식에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지식 및 유용성을 추구하는 일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다른 일일까? by Ezequiel Garrido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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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지식 및 유용성을 추구하는 일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다른 일일까?
사진 출처 : Ezequiel Garrido

인간과 자연 사이에 한 차원 더 높은 본질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음을 강조할 때 주로 호출되는 미학 개념은 아름다움과 숭고이다. 국가 정책이든 기업의 이윤 추구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대규모 자연 개발/훼손이 이익을 목적으로 심심치 않게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자연을 아름다움과 숭고의 이념 하에서 대하는 일은 응당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내려놓도록 하는 윤리적, 미학적 태도로 간주되기에 충분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하나의 호의와도 같으니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인간의 알량한 인식 수준으로는 자연의 이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으니 겸손하게 굴어라.’

아름다움과 숭고란 말이 자칫 무겁게 느껴진다면, 이의 일상 버전은 ‘힐링’ 정도로 풀어쓸 수 있을 것이다.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우리는 산이나 바다 등을 찾아 생기를 회복하기도 한다. 최소한 이때만큼은 자연 속에서 유용한 무엇인가를 생산하려는 욕망을 잠시 접어두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본의 포장지로 쉽게 소비되어 버리기도 하지만, ‘친환경’, ‘친자연’이란 말에서도 자연의 치유력과 생명력을 일상 차원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애정 어린(?)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연을 지식화 내지 산업화 논리로 보지 않고 미학적 시선으로 관조하는 일은 분명 다른 경험이다. 또한 그 차이만큼, 미학이 인간과 자연 간 새로운 관계 형성의 대안적 원리로 제안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자연에서 지식 및 유용성을 추구하는 일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다른 일일까?

원근법적 시각과 교양인의 이상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식-유용성-아름다움은 서구 근대의 전형적인 사유 패턴인 ‘거리두기’ 형식 속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고, 더구나 그러한 거리두기 내지 분리 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적 이념으로 아름다움을 기대할 때 난감함은 더 클 수 있다.

아름다움이 경험되는 그 시각 구조를 생각해 보자. 실상 아름다움은 무한한 이념이기에 감각적 속성이나 개념상의 한계를 넘어선다. 칸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초감성적인 기체’이고, 라이프니츠식으로 말하자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마치 신에 대한 서술과도 유사하며, 이러한 미 규정은 서양 전통 미학의 근대적 개정이다.

서양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규정된다. 영원불변하는 미의 객관적 속성을 규명하려는 차원과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자의 주관적 조건 하에서 미를 규정하는 차원이 그것이다. 전자는 소위 서양 고전 미학의 핵심으로, 서구인들은 일차적으로 ‘수적 비례에 근간한 조화로움의 이념’을 아름다움의 객관적 속성이라 생각했다. 오랜 피타고라스의 고대적 사유 전통으로부터,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미 규정은 서양 미학의 중심 줄기를 이루며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친다. 한편 후자, 즉 인식 주체의 주관적 조건 하에서의 미 규정은 소위 ‘취미(Taste)’ 개념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아무리 수적 비례를 잘 갖춘 사물이라도 판단하는 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름다운 대상이길 그친다는 것이다. 서양 근대 미학은 이러한 취미론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개인마다 다른 취향의 차이 속에서 공통의 합의점을 발견하려는 경험론의 입장과 미를 판단하는 자의 내적 원리를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차원에서 규명하려는 인식론의 입장으로 정리된다.

서양 미학의 담론이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객관적 미 규정의 노력에서 미의 주관적 조건과 그것의 선험적 형식을 조명하려는 작업으로 전환되었고, 미학에서는 이를 (특히 칸트를 위시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까지 표현하지만, 이들이 자연과 사물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재차 떠올려 보면 사실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자연이나 사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그들을 초연하게 관조하는 태도는 고대이든 근대이든 서양 미학의 전형적인 미적 태도로 자리 잡고 있다.

거리두기에 기초한 관조적 태도는 르네상스 시대 재현의 규칙으로서 원근법의 발명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인식된다. 원근법은 서구 근대의 인간 중심의 욕망을 철저하고 또한 아름답게 구현하는 시대적 발명품이다. 자연은 이제 신(그것이 신화적 신이든, 인격화된 신이든, 실상 이들 모두 관념상일 뿐이지만 여하한 그러한 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의 눈’을 중심으로 질서 잡히고, ‘인간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도록 조정되고 재배치된다. 당대 회화와 건축 등 시각예술은 이 규칙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나아가 원근법적 시각 활동은 자연과 사물을 대하는 보편적인 감각 경험으로 근대인의 몸에 심어졌다.

17세기 이후 본격화된 서구의 계몽 프로젝트는 원근법적 시각 활동과 그로 인한 태도를 지성과 미감을 겸비한 ‘교양인’의 덕목으로 독려하였다.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하여 보편적 지식을 생산하고, 나아가 이 지식을 힘으로 삼아 유용한 사물을 만들어내도록 하라, 그러나 결코 이로부터 사적인 욕심을 채우려거나 이전투구하려 하지 말고 그저 무사 공평한 침묵 속에서 아름다움을 관조하라.’ 상당히 탁월하고 완전해 보이는 인간상인 듯하지만, 분열적이고 귀족적이다. 이성을 강조한 탓에 인간의 욕망 운동은 금기시되며, 노동을 통한 경제 활동을 암묵적으로 평가 절하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지 등 자체 생산 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자본가 계급에 그 가치가 한정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교양인은 근대 국가 시스템 내에서 시민들이 마땅히 도달해야 할 이상적 모델로 추구되었다. 원하든 원치않든 자연 상태의 인간이 국가 내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 모델에 따라 잘 길들어져야 할 의무가 있고, 그런 한에서만 개인의 권리가 보장된다. ‘열심히 공부하고, 욕심부리지 마세요, 그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세요, 인간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근대의 진-선-미를 이루는 기본 에토스이다.

결국 원근법적 시각과 그에 기초한 교양인 양성 기획 속에서 아름다움은 이성의 ‘길들이기’ 운동 속에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사물이든 자연 상태의 인간이든 그대로는 안 된다. 이들은 이성의 힘으로 길들어져야 하고 그 상태로 고분고분하고 착실하게 공동체 형성에 기여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게 가능할까? 진공 상태의 인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을 비롯한 자연 개체는 이성만이 아니라 욕망과 의지를 지닌 존재이며, 삶의 실질적인 추동력은 이로부터 나온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성에 따라 욕망을 다스리는 일에서 아름다움은 매력적인 수단이다. ‘거칠게 굴지말고 배운 사람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행동해야지.’ 근대의 아름다움은 욕망 운동의 생생한 역동을 잠재울 수 있는 대단히 효능이 좋은 수면제이다.

거리두기의 한계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은 지식이 아닌 이 단 하나의 행동에서 출발하고 그와 동시에 완성된다. by Miguel Bruna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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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은 지식이 아닌 이 단 하나의 행동에서 출발하고 그와 동시에 완성된다.
사진 출처 : Miguel Bruna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의 담론에서 자연을 여전히 아름다움의 관점으로 대하고 있다면 재차 성찰이 필요하다. 원근법적 시선 속에서의 아름다움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철저한 거리두기와 관조 행위를 통해 생성된다. 글 서두에 언급하였던 숭고 역시 마찬가지다. 본래 ‘높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숭고(hysous)는 무한성을 체험할 때 겪는 감정으로서, 근대에 이르러 ‘공포와 기쁨이 혼합된 모순적 감정’ 혹은 ‘인간 인식의 한계 경험’ 정도로 정식화된다. 고양된 감정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숭고가 아름다움 보다 자연에 대한 대안적 태도로 더욱 적절하게 보이기도 한다. 숭고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무한한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듯한 ‘느낌’, 나아가 자연 자체를 ‘보다 높은 대상’으로 규정할 근거가 마련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자연을 숭고하게 보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숭고한 자연’이란 것도 하나의 관념상으로서 철저히 인간의 인식 지평 내에서 빚어진 산물이다. 또한 그런 정도의 숭고 경험이라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연의 크기와 위력으로부터 인식 주체의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위험이 닥쳐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아름다움이든 숭고든, 즉 조화로부터 비롯된 만족감이든 모순에서 빚어진 만족감이든 여하한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틈이 없다. 숭고는 미적 관조 행위와 다른 범주에서 일어나는 경험임에 틀림없지만, 대상과의 안전한 ‘거리두기’를 기본 구조로 하고 있는 한, 자연에 대한 대안적 태도로는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지식이 아닌 행동

분리를 전제하고 있음에도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의 자연관에서 여전히 아름다움과 숭고를 동경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의 이기적 욕망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나의 세속적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딱 그만큼만 물러나 있으렴, 나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정도로만 자연, 네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하렴.’

물론 인간으로서 자연과의 합일 경험이 완전히 불가능하거나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최소한 아름다움과 숭고라는 이념 혹은 말의 지평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말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언어적 서술을 위해서라면 유용하겠지만 부수적이다. 자연 및 대상과의 합일 경험은 말 그대로 ‘거리두기’ 및 ‘분리’의 상태를 걷어치우는 일 그 자체를 일컫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친다. 실상 분리를 걷어치우는 한 번의 행위가 일어난다면, 그것을 아름다움이라 하든 숭고라 하든, 아니면 산이라 하든 물이라 하든, 뭐라고 부르든 상관이 없다. 단 하나의 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연속,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은 그 자체 이러한 행위 및 운동 차원에 기초한다.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간단하고 명확하다. 대상과의 분리를 걷어치우는 활동 속에서의 관계 맺음, 네 고통이 곧 내 고통으로 느껴지는 그러한 상태의 관계 맺음, 나아가 너와 나의 분리조차 걷어치워져서 고통을 벗어나려는 하나의 움직임 속에 있는 상태의 관계 맺음!

물이 필요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말고 실제 그에게 물을 ‘줘라’, 짐의 무게를 가늠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의 짐을 함께 ‘짊어져라’.

생태미학과 생태예술은 지식이 아닌 이 단 하나의 행동에서 출발하고 그와 동시에 완성된다. 아름다움이란 말이 여전히 가능하려면 이는 ‘앎’이 아니라 ‘함’ 차원에서 작동해야만 한다.

※사족1 : 이렇게 글을 써 놓고도 모든 것을 머리로만, 관념으로만, 글로만 해결하려는 내 습관을 재차 성찰해 본다. 나름 사회 운동을 한다고는 해도 작은 행동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고통에 빠진 존재를 떠올리며, 그리 될 수 밖에 상황에 분노하기도 하고 비판의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딱 거기까지. 결국 대상과의 분리를 걷어차는 활동을 일으키기엔 여전히 공감하지 못하고 둔감한 면이 있는 것이다. 단 하나의 행위! 힘들어 하는 대상 앞에서 단순히 ‘힘들겠구나’ 하고 떠올리는 것과 그를 생각하며 물구나무라도 서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고, 이러한 차이만큼 세상은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있는 운동-장이 된다.

※사족2 : 이렇게 적어 놓고 나는 물구나무를 섰고, 물론 바닥에 제대로 머리를 박아 버렸다. 우스꽝스럽지? 생명의 이 천진함! 생태적 삶의 핵심이다.

임지연

미학의 집 소장. 미학 전공. 셸링(F.W.J. Schelling)의 예술론과 시간론 연구를 시작으로, 말로든 몸으로든 ‘살아있다는 사실’의 증거들을 ‘모으고-뿌리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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