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산책] ⑤ 어떤 봄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되면 당연히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나겠지요? 하지만 당연한 세계에는 알 수 없는 경이로움과 놀라움과 감사함이 겨울을 견디는 나무에 숨어있습니다. 마른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살아 있는 건지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겨울이지만 나무들은 생명 가득한 봄을 위해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봄을 준비하고 있는지요?

어두운 혼란 속에서 시작한 새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벌써라고는 했지만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비겁하고 비열하게 책임을 떠넘기며 비루하게 구는 모습을 지난 한 달 동안 비참하게 지켜보는 것이 힘들고 지루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봄에 흘러 들어가는 入春(입춘)이 아니라 기운을 새롭게 하고 뜻을 세워 봄을 맞이해야 하기에 立春(입춘)이라고 씁니다. 사진제공 : 강세기

이제 시간은 새해를 맞아 다시 한번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같은 설날을 거쳐 입춘의 절기를 지났습니다. 입춘은 24절기의 첫 번째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한 해를 스물네 개로 나누어 정한 24절기는 일정한 기간이 되풀이되는 시간의 마디를 의미하는 節期(절기)가 아니라 태양의 기운에 따라 구분한다는 뜻으로 節氣(절기)라고 씁니다. 봄의 시작이라는 입춘도 시간의 흐름을 타고 봄에 흘러 들어가는 入春(입춘)이 아니라 기운을 새롭게 하고 뜻을 세워 봄을 맞이해야 하기에 立春(입춘)이라고 씁니다. 그래서 아직 겨울의 한가운데 같은 시간에 입춘이 있나 봅니다.

특히나 이번 입춘은 전국 대부분 지역에 한파 특보가 내려질 정도로 강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입춘이라는 절기는 시간이 지나 때가 되면 당연히 봄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봄이 되면 얼음이 녹고 땅에 풀이 돋고 나무에 꽃이 피고 새잎이 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당연한 일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당연히 내일 아침이 찾아 올 거라는 말은 오늘 밤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환자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닐 겁니다. 겨울이 지나면 당연히 따뜻한 봄이 올 거라는 것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각자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모든 생명들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그러니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롭게 돋아날 여린 잎도, 언 땅을 뚫고 올라올 작은 풀꽃 하나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 나무가, 저 풀이 죽음과도 같은 겨울을 힘차게 이겨내고 만들어낼 경이롭고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당연히 따뜻한 봄이 올 거라는 것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각자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모든 생명들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사진제공 : 강세기

사실 아무 것도 없이 메마른 나뭇가지만으로 찬바람을 가르며 서있는 겨울나무에서 생명의 기운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식물이라는 생명은 씨앗에서 시작됩니다. 씨앗에서 태어난 풀은 대부분 짧게 한해, 두 해, 길어봐야 여러해살이로 생을 마감하고 다시 씨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풀과 달리 오래오래 사는 방식을 택한 나무는 첫 시작은 풀과 다름없이 씨앗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매년 봄이 되면 씨앗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년까지 키워낸 가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그래서 겨울나무의 가지 끝에는 새봄에 새롭게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자라날 겨울눈(冬芽, winter bud)이 있습니다. 매번 씨앗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풀은 눈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나무만이 눈을 만들어 새로운 성장을 준비합니다.

겨울눈은 겨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늦봄부터 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늘 계절에 앞서 준비하는 것이지요. 사진제공 : 강세기

그런데 나무는 언제 눈을 만들까요? 겨울눈이라 부르니 겨울에 만드는 걸까요? 나무는 늘 계절에 앞서 준비합니다. 겨울눈은 겨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겨울이라는 혹독한 시간을 이겨내어야 할 눈이기에 겨울눈이라고 부릅니다. 봄꽃 대표 중에 하나인 개나리와 철쭉은 이미 5, 6월에 겨울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봄꽃 대표 진달래는 7월, 생강나무는 8월이 가기 전에 겨울눈을 준비합니다. 나무들은 열심히 광합성하여 모은 영양으로 가지고 늦봄부터 소중히 눈을 만들기 시작해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 있도록 자기만의 특성을 따라 부드러운 털옷을 입히거나 끈적한 방수액을 바르거나 가죽옷 같기도 하고 기왓장 같기도 한 껍질을 착착 포개어 눈을 감싸 놓습니다. 이 준비가 완전히 끝나야만 비로소 낙엽을 떨군다는 것을 그저 스쳐 지나갈 뿐 나무에 눈길 한번 제대로 준 적 없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식물분류학자인 허태임 박사는 겨울눈을 ‘나무의 심장’이라 부르며, 겨울눈이야말로 생명이 나무의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쉼 없이 박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1 『파브르 식물기』에서 파브르는 (네, 파브르 곤충기의 파브르 맞습니다. 파브르는 곤충기에 앞서 식물기를 썼습니다. 식물기와 곤충기를 쓴 파브르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되기도 했답니다) 겨울눈 중에 잎을 만드는 잎눈은 현재의 번영을 위해 애쓰는 눈, 꽃을 만드는 꽃눈은 미래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눈이라고 부릅니다.2 잎눈이든 꽃눈이든 내일의 봄을 준비하는 눈인데도 이미 도달한 내일의 관점에서 좀 더 거시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번영으로 구분한 파브르의 생각이 참 놀랍습니다. 파브르에 따르면 생강나무의 둥글고 큼직한 꽃눈은 미래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눈이고 날씬하고 뾰족한 잎눈은 현재의 번영을 위해 애쓰는 눈입니다.

겨울 한기가 가득한 메마른 가지 끝에 생명의 증거, 봄의 기운이 겨울눈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고 야무지게 서 있습니다. 사진제공 : 강세기

이제 다시 겨울나무를 찾아 살펴봅니다. 겨울 한기가 가득한 메마른 가지 끝에 생명의 증거, 봄의 기운이 겨울눈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고 야무지게 서 있습니다. 반드시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해 새롭게 잎을 내고 꽃을 피어 내고야 말 것이라는 결기가 느껴지는 당당한 겨울눈을 보고 나니 봄이 됐으니 당연히 잎이 나고 꽃이 핀다는 한가한 소리를 더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봄을 세운다는 뜻의 입춘 절기를 지나며 겨울나무 곁에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어떤 봄을 준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오지만 놀랍게도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봄. 그 경이롭고 감사한 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말 없는 겨울나무 곁에 서서 생각해봅니다.


  1. 허태임,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김영사, 2022, p92.

  2. 장 앙리 파브르, 조은영 옮김, 파브르 식물기, 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23, p151.

강세기

빨리 이루고 많이 누리기 위해 무겁게 힘주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조금씩 가볍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풀과 나무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숲과 산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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